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1화 (52/261)

#51화. 신인들이 꾸미는 무대

지수연이 신인상 후보에 오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그 작가가 바뀐 이후, 지수연의 분량이 크게 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방송되는 보그는 김선우, 강하나 투 톱이 아니라 지수연까지 합쳐서 쓰리 톱이라고 불려야 할 정도로 그녀의 분량이 많이 늘어났다.

일정표를 보니 서이렌은 축하 공연 연습에 하루만 시간을 낼 수 있지만, 지수연은 사흘 내내 참여한다.

이렇게나 티 나게 밀어준다고?

내가 지수연의 매니저였을 때는 KBC 드라마 국장인 지영록의 후광 없이 그녀를 띄우기 위해 고심했다.

하지만 지금 지수연의 행보를 보면 아버지의 덕을 톡톡히 보려는 것 같다.

LOK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 * *

용산의 모 연습실에 그해 KBC 드라마를 빛낸 신인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서이렌과 빈선예가 도착해 보니 먼저 도착한 배우들이 통성명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연습실에는 일부러 빈선예가 따라왔다.

혹시 서이렌에게 추파를 던지는 배우들이 있다면 그녀가 사전에 차단하려고 따라온 것이다.

그때 함께 신인상 후보에 오른 정하연이 서이렌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왔다.

“이렌아!”

연습실에 앉아서 수다를 떨던 배우들의 고개가 일시에 서이렌을 향했다.

“하연아. 잘 지냈어? 흥부네 딸들 잘 보고 있어.”

“나 연기하는 거 봤어? 너 지금 촬영 때문에 바쁘잖아.”

“대기 시간에 짬짬이 봤지. 드라마 너무 재미있더라.”

“오올. 역시 서이렌 의리 있다.”

서이렌과 정하연이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자 어느새 신인 배우들이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정하연 씨. 진짜로 서이렌 씨랑 친한가 봐요.”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요?”

“대박. 진짜 서이렌 씨네. 신기해.”

“텔레비전이랑 똑같아. 어쩜 좋아.”

신인 배우들은 그들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이렌을 보고 신기해했다.

‘이게 바로 스타들의 스타라는 건가?’

빈선예는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며 어깨가 으쓱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같이 연습에 참여하게 된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은 환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휴. 저희도 반갑습니다.”

배우들이 앞다퉈 서이렌과 인사를 하러 몰려들었다.

“저는 최지호라고 합니다. 혹시 ‘나의 별로’라는 드라마 보셨나요? 거기에 나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본 작품입니다.”

“와. 정말요? 대박. 진짜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찍어 주셔서 시청자로서 제가 더 감사하죠.”

서이렌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금세 신인 배우들과 친해졌다.

어느새 서이렌도 그들과 함께 연습실 바닥에 앉아 축하 공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배우들은 자신들이 춤을 못 춰서 공연을 망칠까 봐 걱정이 가득했다.

배우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연습실 문이 열리고 오늘 그들을 가르칠 안무 선생님과 함께 지수연이 들어왔다.

신인 배우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선생님을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사흘간 여러분들을 가르치게 될 민혜리예요. 잘 부탁해요.”

안무 선생님과 배우들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빈선예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수연 쟤는 왜 저렇게 늦었어? 제일 바쁜 우리 이렌 씨도 일찍 와서 기다리는데.’

빈선예는 마치 원수 보듯이 지수연을 째려봤다.

* * *

연습실에 놓인 커다란 TV로 전문 댄서들이 추는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나의 별로’라는 OST의 선율을 배경으로 우산을 든 댄서들의 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영상이 끝나자 안무 선생님이 배우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이걸 우리보고 하라고? 라는 표정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요? 이거 보기에만 어려워 보이는 거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안무 선생님은 어렵지 않다며 배우들을 다독였으나 그들의 굳은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자자. 일어납시다. 시간이 없어요. 서이렌 씨가 오늘만 시간 낼 수 있다고 해서 서이렌 씨 위주로 오늘 일정을 짰습니다.”

안무 선생님은 서이렌이 춰야 할 독무를 시범으로 선보이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서이렌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서이렌이 연습실 한가운데로 걸어가자 배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따라갔다.

구석에 있는 그랜드피아노에 앉아서 악보를 보고 있던 지수연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서이렌을 쳐다봤다.

‘짝. 짝.’

안무 선생님이 치는 박수 소리와 함께 서이렌의 춤이 시작됐다.

마친 전문 댄서처럼 물 흐르듯 매끄러운 춤 선이 서이렌의 몸에서 나오자 안무 선생님도 놀란 듯했다.

“서이렌 씨 진짜 잘 추신다.”

서이렌은 헐렁한 연습복을 입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춤추는 동작 하나하나가 프로 댄서 못지 않았다.

독무가 끝나자 서이렌이 당당한 얼굴로 안무 선생님을 바라봤다.

“끝났습니다.”

안무 선생님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춤을 마친 서이렌에게 다가갔다.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데요? 너무 좋아요. 완벽했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만족한 얼굴로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른 분들도 실력을 한번 볼까요?”

조금 전까지 서이렌의 춤을 보며 넋이 나가 있던 신인 배우들은 안무 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 * *

화장실에 온 빈선예는 연습 장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렌 씨만 잘하면 뭘 하냐? 다들 왜 이렇게 뚝딱거리는 거야? 무슨 국민 체조 보는 줄 알았네. 사흘이 아니라 한 달 내내 연습해도 될까 말까다.”

빈선예는 그동안 신인 배우들이 꾸미는 축하 무대가 왜 엉망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렌 씨 빼고는 다 구멍이야. 하필이면 왜 올해는 아이돌 출신 배우가 한 명도 없냐고.”

빈선예는 반나절 만에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온 안무 선생님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오자마자 땀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보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떡해요. 나 도저히 못 따라 하겠어요.”

“나도 그래요. 서이렌 씨 반만이라도 됐으면 좋겠어요.”

“서이렌 씨는 무용과 출신이에요? 왜 그렇게 춤을 잘 추는 거예요?”

“난 서이렌 씨가 연습에 하루만 참여할 거라고 해서 특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특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배려였네요.”

“맞아요. 괜히 못 추는 우리 봐주느라고 서이렌 씨가 고생이죠.”

“근데 서이렌 씨 진짜 예쁘고 착하지 않아요?”

“어. 나도 그 생각했어요. 솔직히 오늘 만나기 전까지는 인기 많다고 해서 부럽기만 했는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 나눠 보니까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서이렌 씨는 진짜 인정. 착한 건 둘째고 사람이 센스가 있는 거 같아요. 우리가 버벅대니까 바로 달려와서 도와주고. 저 이따가 갈 때 번호 물어보려고요.”

“어머.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근데 번호를 줄까요?”

“서이렌 씨는 번호 안 알려 주고 그럴 사람은 아닌 거 같아요. 주말극에 나오는 정하연 씨랑도 연극 하면서 친해져서 지금까지 연락한다잖아요.”

화장실에 앉아 있는 빈선예는 배우들의 좋은 뒷담화를 들으며 광대를 씰룩이고 있었다.

‘아. 우리 이렌 씨 어쩌면 좋냐. 만나는 사람마다 팬으로 만들어 버리네.’

빈선예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데 나가려던 배우들의 입에서 원수 같은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지수연 씨 말이에요. 지수연 씨는 왜 우리랑 같이 춤을 안 춰요? 보니까 피아노 반주랑 노래만 하는 거 같던데.”

“피아노 전공에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라잖아요. 사실 나도 든 생각인데 우리가 지수연 들러리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들러리요?”

“생각해 봐요. 지수연이 혼자 피아노 치고 노래하고 우리는 뒤에서 연기하고 춤만 추잖아요. 그나마 독무가 있는 서이렌 씨가 조금 돋보이는 거지 축하 무대의 주인공은 지수연 씨 같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내가 피아노를 못 쳐서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하고 그냥 넘어갔었는데. 생각해 보니 노래까지 지수연 씨가 다하고 이상하긴 하네요.”

“뭐 노래도 못하고 피아노도 못 치는 나는 시켜 줘도 못 하겠지만 좀 그렇긴 합니다.”

“아! 우리 인제 그만 돌아가요. 휴식 시간 끝나겠어요.”

한참 수다를 떨던 신인 배우들이 나가자 빈선예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사실 빈선예도 지수연을 너무 밀어주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께름칙했다.

지금은 연습이라서 지수연이 무존재지만 실제 무대에 올라가면 피아노가 중앙에 있을 거라고 했다.

“아. 기분 좋았는데. 지수연 생각하니까 확 다운되네.”

빈선예는 투덜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 * *

12월 31일.

눈을 뜨자마자 우울해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책상 위의 달력을 바라봤다.

오늘은 KBC 연기대상이 열리는 날이다.

일 년 전인 작년 12월 31일.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서랍에서 약을 꺼냈다.

육 개월 전에 타 온 약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 수백 알의 알약을 받았을 때는 이걸 언제 다 먹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빠르게 사라지는 약을 보면서 내 삶이 그만큼 줄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틀 치밖에 없네.

최근에 너무 바빠서 병원에 가지 못했다.

약을 먹으려고 물을 따르려는데 갑자기 심장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헉.”

나는 손에 든 알약을 놓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져 핑그르르 돌던 약이 침대 아래로 굴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아픈 와중에서도 그걸 잡아 보려고 손을 뻗어 봤지만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헉.”

심장이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KBC 연기대상이 열리는 공개홀.

막 레드 카펫을 밟은 서이렌이 KBC 본관에 들어섰다.

빈선예와 이락이 달려와 서이렌을 맞이했다.

“이렌 님. 레드 카펫 너무 아름다우셨습니다. 저는 보다가 넋이 나갈 뻔했어요.”

이락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빈선예는 오늘 서이렌을 위해 핑크빛 드레스를 골랐다.

너무 튀지도 않고 신인다운 귀여움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안성맞춤인 드레스였다.

조금 전까지 여신 미를 마음껏 뽐내며 레드 카펫을 찢었던 서이렌은 굳은 얼굴로 빈선예에게 물었다.

“대표님은요? 왜 이렇게 늦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본관 앞이라고 대표님께 전화 왔어요.”

서이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빈선예는 이락이 듣지 못하게 서이렌에게 딱 붙어서 귓속말을 건넸다.

“어제도 봤는데 그렇게 보고 싶어요?”

“당연하죠. 같이 있어도 대표님이 나 안 보고 다른 사람 쳐다보고 있으면 질투 난단 말이에요.”

“어이구. 큰일이네. 중증이네요.”

“오늘 중요한 날인데 못 보고 들어갈까 봐 그랬죠.”

“하긴 오늘이 중요한 날이긴 하죠.”

그때 이락이 소리쳤다.

“대표님 오셨어요.”

이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이렌과 빈선예가 뒤를 돌아봤다.

두 여자가 동시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니 나는 죄지은 것처럼 심장이 움찔했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이렌의 앞에 가서 섰다.

“미안해요. 내가 많이 늦었죠?”

나는 서이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건넸다.

오늘 신인상 후보에 축하 무대까지 있어서 긴장될 텐데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 늦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대표님 머리가 왜 그래요?”

서이렌의 손이 내 머리 쪽으로 다가오자 나는 황급히 빈선예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KBC 본관 로비라서 보는 눈이 많다.

“빈 팀장님. 내 머리 이상해요?”

“이상해요. 우리 몰래 제주도 다녀왔어요?”

“예?”

“머리가 왼쪽으로 확 돌아갔어요. 바람맞은 것처럼.”

나는 깜짝 놀라 머리를 정리하며 답했다.

“아. 헬멧 써서 그런가? 저 퀵 오토바이 타고 왔거든요.”

“대표님이 그걸 왜 타고 와요?”

“오는 길에 팔중 추돌 사고가 나서 길이 꽉 막혔습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더 늦을까 봐 퀵 불러서 그거 타고 왔어요.”

“정말요? 다친 사람은 없어요?”

“인명 사고는 없는 거 같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저는 사고가 나자마자 이거 큰일이구나 싶어서 바로 퀵 불렀거든요.”

“그러셨구나. 고생하셨네요. 그런데 처음부터 안 늦으셨으면 됐잖아요.”

나는 삐진 빈선예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빈 팀장님. 이제 들어가야죠.”

“예. 가요. 이렌 씨 힐이 높아서 빨리 들어가서 앉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상식이 열리는 공개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본관의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지? 왜 갑자기 이렇게 소란스럽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고 정문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걸어 나오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내 세 번째 배우.

일 년 전 나를 버리고 떠난 그녀.

이자현이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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