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도망간 작가
나는 놀라서 오주환 감독에게 물었다.
“서 작가님이 사라지셨다고요? 무슨 사고라도 난 겁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박호중 감독님이랑 의견 차이가 있어서 싸우다가 못 하겠다고 하고 잠적하셨다고 해요.”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는 길에 기사를 보고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긴 했는데.
작가가 도망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다니.
만약 이 사태가 내 배우의 드라마에서 벌어졌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두근대고 손에서 땀이 났다.
“그럼, 보그 촬영은 올스탑인가요? KBC도 난리가 났겠네요?”
“그게 또 웃긴 게 원래 서 작가님 대본으로 촬영을 안 했답니다.”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작가님 대본으로 촬영을 안 하다니요?”
오주환 조감독은 화끈하게 모든 상황을 다 털어놨다.
“박호중 감독님이 씬 일부를 날려 버리고 직접 대사를 써서 촬영하셨나 봐요.”
“감독이 직접 대본을 썼다고요?”
그렇구나.
그래서 보그가 산으로 간 거였어.
그럼 그렇지. 서주희 작가가 그런 내용을 쓸 리가 없다.
박호중 감독은 왜 그런 무리수를 둔 거지?
보그는 시청률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답보 상태긴 했으나 이제 후반부에 접어들면 시청률이 터질 각이었는데.
나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내가 본 미래와 달라졌다.
뭐 때문일까?
서이렌?
그녀 때문인가?
서이렌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 * *
KBC 국장실에 불려온 박호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지영록 국장과 대면하고 있었다.
“아니. 박 PD. 그동안 잘해 왔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입니까?”
“송구합니다. 문제가 생겨도 촬영장 안에서 다 해결해야 하는데 이번엔 그게 좀 안됐습니다.”
“서주희 작가는 계속 연락이 안 되는 겁니까?”
“조감독이 집이랑 작업실까지 찾아갔다는데 없답니다. 보작들한테도 아무 말도 안 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아. 이거 큰일이네.”
지영록은 드라마 시작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네킹 쪽이 더 걱정거리였다.
감독은 최근에 성공한 작품이 없는 고인물 PD에 작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장 여제 그리고 배우는 서이렌을 빼놓고는 모두 B급.
서이렌도 믿고 보는 배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드라마 한 편으로는 검증받았다기 말하기 부족한 경력이다.
마네킹에 비하면 보그는 준비된 작품이었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박호중에 믿고 본다는 마니아가 형성된 서주희 작가.
그리고 한류 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김선우와 차세대 이자현이라고 LOK에서 띄워 주고 있는 강하나까지.
그런데 어이없게도 믿고 있던 박호중 감독의 보그가 시청률도 밀리고 내홍이 생긴 것이다.
“어떻게 할 겁니까? 당장 서주희 작가 잡아 오든지 하세요. 드라마는 계속 방영돼야 할 게 아닙니까?”
지영록의 눈치를 살피던 박호중 감독이 입을 열었다.
“국장님. 이렇게 된 거 작가를 바꿀까 하는데요.”
“작가를 바꿔요?”
“서주희 작가 보작들 가운데 우리 회사 신인 공모전에 당선된 작가가 있습니다. 그 작가가 이어서 쓰게 하죠. 어차피 틀은 서주희 작가가 다 만들어 놓고 갔으니까 상관없을 거 같습니다.”
“서주희 작가는 정말 못 찾는 겁니까?”
“가족들과도 연락이 안된다고 합니다. 단단히 틀어져서 드라마 끝나기 전에는 안 나타날 것 같습니다.”
“하, 이거 참.”
지영록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그때 박호중 감독이 준비해 온 후반부 시놉시스를 꺼내 들었다.
“이거 보십시오. 앞으로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될 겁니다.”
박호중이 건넨 시놉시스를 읽어 내려가던 지영록의 눈빛이 변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어요? 너무 급발진하는 거 아닙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지난주부터 시청률이 다시 상승세로 접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급발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동안 너무 호흡이 느렸습니다. 터트릴 땐 제대로 터트려야죠.”
잠시 고민한 지영록 국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식으로 작가 바뀌었다고 기사 내고 시작하세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서 더는 틀어막지도 못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장실을 나서는 박호중 감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고 온 시놉시스를 가방에 넣은 박호중은 국장실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역시 자기 딸 분량 늘어난다고 하니까 바로 넘어오는구나.’
박호중은 곧바로 조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다 해결됐어. 서주희 작가 보작이랑 작품 끝마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국장님도 허락하셨어. 대신 이번 주는 특별방송 내보내고 다음 주부터 정상 방송하게 될 거야. 내가 써놓은 시놉시스 먼저 서 작가 보작한테 보내고 당분간은 쪽대본 위주로 진행될 거라고 배우들한테도 사정 잘 설명하고.”
전화를 끊은 박호중은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KBC를 떠났다.
* * *
서혜가 위태로운 자세로 요트 위에 서 있다.
요트에는 마네킹의 네 남녀가 타고 있다.
서혜의 복수 상대인 서지훈과 이혜성 그리고 서혜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서지석이다.
네 남녀의 끊어질 듯한 텐션이 화면을 뚫고 나왔다.
서혜는 일부러 파도가 넘실거리는 우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때 큰 파도가 왔고 그곳에 서 있던 서혜의 몸이 휘청거린다.
서혜는 뒤로 넘어지며 옆에 있는 이혜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혜와 이혜성은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바다에 빠진다.
바다에 빠지는 찰나의 순간 미소 짓는 서혜.
서혜는 일부러 바다에 빠진 것이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동시에 두 남자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바다에 빠진 네 남녀.
이내 이혜성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를 돌아봤다.
“지훈 씨! 지훈 씨!”
이혜성이 서지훈을 소리 높여 외치는데 바닷속에서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절한 서혜를 양옆에 끼고 데리고 나온 두 사람.
서지훈과 서지석이었다.
이 모습을 보는 이혜성은 입술을 깨문다.
- 서이렌 무섭네. 두 남자를 손안에 쥐고 좌지우지하네.
- 이혜성은 갑자기 왜 저래? 서지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윤서라한테 작품집 빼앗으려고 먼저 접근한 거잖아.
- 원래 그랬는데 지금은 이혜성도 서지훈 좋아하는 듯.
- 서지훈 이 농약 같은 남자. 망할 놈인데 안 망했으면 좋겠다.
- 이게 다 서지훈 멜로 눈깔 때문이다. ㅠㅠ
- 지훈이랑 지석이는 좀 대화를 하고 살아라. 너네 같은 여자 좋아한다고. 형제끼리 그러면 쓰냐?
- 내가 너무 유교걸인가? 형제끼리 이러는 거 너무 막장스러운데?
- 그게 마네킹의 매력입니다. 이런 거 싫으면 보그나 보시던가요?
- 보그도 요즘 막장화 돼가고 있음 ㅋㅋ
- 보그가 막장이라고? 서주희 작가 작품인데?
- 서주희 작가 아파서 보그 작가 바뀌었어. 보그 이제 완전 다른 드라마임. 거기 서브여주가 갑자기 분량 많아져서 강하나는 쩌리 됨.
- 지금 보그는 뻔한 삼각 멜로라고 보면 된다.
- 헐. 몰랐네.
서혜는 회사에서도 이혜성을 압박하기 시작하고 이혜성이 이뤄 놓은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작품이란 것이란 걸 만천하에 알린다.
이혜성은 죽은 친구의 유작을 가로챈 악녀가 되어 집 밖을 돌아다닐 수도 없이 정신이 피폐해졌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이혜성을 만나러 서혜가 찾아 온다.
이혜성은 서혜를 향한 서지훈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기에 그녀와 만나고 싶지 않다.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고 들었어. 이제 나 같은 건 없어도 승승장구할 텐데 왜 나를 찾아왔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팀장님이 제 멘토시잖아요.”
서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다.
서혜는 새로 나올 대성모직의 신상 의류 카탈로그를 이혜성에게 건넸다.
“새 작품이에요. 서지훈 본부장님께서도 흡족해하셨어요.”
서지훈이라는 말에 이혜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혜성은 서이렌이 건넨 카탈로그를 펼쳤다.
그 안에는 죽은 윤서라가 남긴 미공개 작품이 실려 있었다.
놀란 이혜성이 서혜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신상이라고 했잖아요.”
“너 내 작품집 훔쳐 갔지?”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내가 만든 내 작품이에요.”
“아냐. 거짓말하지 마. 이건 내 작품이야. 누굴 속이려고 드는 거야?”
“팀장님.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바람이라도 좀 쐬세요.”
서혜는 굳게 닫힌 거실의 커튼을 치웠다.
오후의 태양 빛이 거실을 비추는 데 이혜성이 소리를 질러 댔다.
“거짓말하지 마! 작품집이 사라져서 내가 그걸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걸 가져갔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작품집이 사라졌다’라. 이상하네요. 저는 아니니까 의심하지 마세요.”
이혜성은 훔쳐 온 작품집이 사라지고 난 뒤, 불면증까지 생겼다.
윤서라의 작품을 베끼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그걸 대체 누가 가져갔을까 하는 공포.
이혜성은 죽은 윤서라가 그걸 가져간 것은 아닐까 하는 피해망상까지 생겼다.
서혜는 이미 폐인이 된 이혜성을 그대로 집 안에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이혜성은 이제 끝이다.
더는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십 년간 가족처럼 지낸 정이 있기에 복수는 여기까지만이다.
서혜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서지훈을 향해 복수할 때다.
진정한 복수의 서막을 알리며 마네킹 10화가 끝났다.
* * *
연말이 되자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였다.
지난달부터는 사무실에도 새 식구가 생겼다.
경영 지원 업무를 봐줄 신입을 채용한 것이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그녀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게 큰 도움이 됐다.
나는 지금 서이렌과 이락을 촬영장에 보내 놓고 홀로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그때 우리 신입 사원인 이선아가 이 층으로 올라왔다.
“선아 씨. 무슨 일 있어요?”
“대표님. KBC에서 팩스가 왔습니다.”
이선아는 내 책상에 팩스를 올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팩스로 시선을 옮기는데 마침, 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를 보니 이윤기 감독이었다.
“예. 감독님. 원세강입니다.”
[원 대표. 팩스 받았어?]
“지금 받았습니다.”
나는 대화를 하며 팩스에 시선을 옮겼다.
[KBC 연기대상 신인상 후보 축하 공연 연습 일정]
팩스의 제목을 본 내 두 눈이 커졌다.
“이렌 씨가 신인상 후보인가 보네요.”
[오늘 소식이 떠서 촬영장에서도 축하 인사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KBC는 아직도 이걸 하네요.”
[그거야 KBC 전통이잖아. 신인들이 꾸미는 축하 무대. 예전엔 그냥 가요 하나 녹음해서 춤추고 노래하는 거로 끝났는데 요즘은 뭘 그리 준비를 많이 하는지. 내가 지금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촬영 일정 때문에 그러시죠?”
[그래.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이렌 씨 CF 일정 좀 조정해 주라.]
“이렌 씨는 촬영이 한창인데 좀 봐주는 거 없나요?”
[그나마 봐줘서 하루만 빼는 거야. 다른 신인들은 사흘 내내 연습실에서 연습해야 한대.]
“예. 알겠습니다. 일정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부탁한다.]
이윤기의 전화를 끊은 나는 팩스를 꼼꼼히 확인했다.
남녀 신인배우 열 명이 꾸미는 축하 무대.
나는 이런 걸 잘 못 보는 성격이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글거렸다.
보아하니 이번 축하 공연은 뮤지컬 무대로 연출한다고 나와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는 서이렌의 모습이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 이래서 신인들 데리고 축하 무대를 하는 거구나.
팬들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겠어.
나는 웃으며 일정표의 다른 신인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데 신인상 후보의 이름 중에 익숙한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지수연?
지수연이 신인상 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