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쌍끌이 흥행
[대표님. 정말로 얀 필립 몰라요?]
“죄송한데 저는 정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럼, 도나텔로도 몰라요?]
“모르는데요. 그거 유명한 겁니까?”
[허. 말도 안 돼.]
전화기 너머로 빈선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얀 필립도 도나텔로도 모르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서이렌을 초대했다면 좋은 일이겠지.
“혹시 인터넷으로 유명해진 소피노아 드레스 영상보고 우리 이렌 씨를 안 건가요? 그 얀인지 하는 디자이너가요.”
[맞아요. 보그 편집장이 영상을 얀 필립한테 공유해 줬나 봐요. 미쳤어. 보그 편집장까지 우리 이렌 씨 영상을 봤다고요. 진짜 대박이야.]
“빈 팀장님. 저희가 지금 시사회 끝나고 정리 중이라서요.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해요.”
[알았어요. 빨리 오세요. 나 지금 떨려서 일이 손에 안 잡혀요.]
빈선예가 호들갑을 떨며 전화를 끊었다.
이 일은 패션 문외한인 내가 봐도 모르는 일이니, 전적으로 빈선예에게 맡겨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서이렌과 함께 시사회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 * *
서혜는 서지석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의 회사였던 대성모직 디자인팀의 피팅 모델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의 디자인 실력을 드러내고 아무 경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턴으로 채용된다.
파격적인 인사를 강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복수 상대인 이혜성이었다.
서혜는 이혜성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것을 캐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6화의 마지막.
서혜와 서지훈이 극적으로 재회하며 끝이 난다.
서혜의 본격적인 복수 행보가 시작되며 마네킹의 시청률은 독주하기 시작했다.
공중파 시청률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마네킹은 줄곧 20%가 넘는 고시청률을 유지했다.
마네킹 8화가 방송되는 그 주에 드디어 287일이 개봉했다.
시사회 평가가 예상보다 좋자 배급사는 287일을 텐트폴 영화 수준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287일 개봉 당일 오전, 아침부터 영화를 본 관객들의 후기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 287일 대박이네.
ㅅㅂ 존잼임.
- 역대급 신인 서이렌이 역대급 신인 감독이랑 만났어.
- 대체 윤서혁이 누구냐? 한국 영화를 이끌어갈 차세대 인재가 분명하다.
- 왜 다들 주인공 하경민 이야기는 하지 않나요? 이 오빠 왜 그동안 연극만 한 겁니까? 이런 배우가 텔레비전에 많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신파 아님?
노노. 그럼 감성 아님. 이렇게 밝고 웃기고 담담한 시한부 영화 처음 보는 듯.
-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눈물 나지 않음?
- 공연 끝나고 조명 꺼지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강준성 죽은 거 표현한 거겠지?
- 루머 퍼트리지 마라. 우리 준성이 안 죽었어. ㅠㅠ
- 김철도 많이 컸더라. 걔가 김선우 아역으로 많이 나온 애였지?
- 30년간 해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국인 배우만 판 사람입니다. 그런데 287일에 나오는 그 귀여운 외국인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저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거 같은데요??
287일은 첫 주에만 백팔십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청신호가 켜졌다.
마네킹과 287일의 쌍끌이 흥행으로 서이렌의 주가는 고공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대본과 광고에 스타탄생은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갔다.
마네킹에 나올 의상을 점검하던 빈선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와. 언제는 막장 드라마라서 협찬 못 하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제발 입어 달라네요.”
마네킹을 시작하기 전에 빈선예는 명품 업체에 협찬을 요청했었으나 모두 거절당했었다.
명품은 그렇다고 치는데 드라마에 협찬을 종종 해 주는 A급 브랜드에서도 거절했기에 초반에 의상을 구하느라 빈선예가 애를 많이 썼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협찬해 주겠다니 다행 아닙니까? 어디서 연락 왔는데요?”
“다요. 그때 못 해 주겠다고 퇴짜 놓은 브랜드에서 다 해 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웃기죠?”
“그래요? 다행이네요.”
내가 방긋 웃자 빈선예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대표님 너무 웃기만 하시는 거 아닌가요? 나는 열불이 나는데요? 극 초반에 협찬이 잘 안 돼서 내가 지인 찬스 쓰고, 개인 소장품 털어서 촬영한 거라고요.”
“그럼요. 우리 빈 팀장님이 고생해 주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287일도 대박이 났으니 우리도 수익이 좀 들어올 거예요. 그거 받으면 보너스로 확실하게 쏠게요.”
“아. 맞다. 우리도 287일 투자자였죠? 영화 대박 나게 생겼던데 투자금 몇 배로 불리시겠네요.”
내가 지금 예상하기론 열 배 이상 불어날 거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작 일 억밖에 투자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그런데 그 디자이너에게 온 초대장은 뭔가요? 우리가 뉴욕에 가야 하는 건가요?”
빈선예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뉴욕 패션위크 초대장이에요. 얀이 수석 디자이너로 있는 도나텔로 FW 패션쇼 초대장이요.”
“FW면 겨울옷인가요? 되게 일찍 초대장을 보내왔네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빈선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소리예요? FW 시즌이면 2월에 패션쇼를 하죠.”
“그렇게나 일찍이요? 만약 쇼에 가게 되면 마네킹 끝나고 바로 가야 하네요?”
“잠깐만요. 대표님. 만약이라뇨? 반드시 가야죠. 얀이 직접 보낸 초대장이라고요.”
나는 빈선예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보고 가슴 한구석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서이렌이 여권을 만들 수 있을까?
이락과 상의해야 하나?
* * *
마네킹과 달리 보그 촬영장은 계속된 시청률 정체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시청률이 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떨어지지도 않았다.
박호중 감독은 서주희 작가에게 온 대본 수정고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왜 자꾸 감독 말을 무시하는 거야? 멜로 좀 살리라고 했는데 왜 또 지지부진이야?”
박호중은 서주희 작가가 수정한 부분도 성에 차지 않는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버튼을 누르려던 박호중 감독의 손이 멈칫했다.
“두 번째 수정도 이런데 세 번째는 안 봐도 뻔하지.”
핸드폰을 내려놓은 박호중은 대본을 펼치고 그 자리에서 대본에 밑줄을 쫙쫙 긋기 시작했다.
밑줄을 친 자리에 박호중은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삼십 분 후, 대본을 덮은 그는 조감독을 호출했다.
“감독님. A팀은 촬영 준비 끝났습니다.”
“10화 수정고 나왔지?”
“예. 이미 배우들한테도 다 돌렸습니다.”
“이걸로 교체해.”
박호중은 자신이 고친 대본을 조감독에게 건넸다.
대본을 펼쳐 본 조감독이 놀라 물었다.
“이거 감독님이 쓰신 건가요?”
“내가 썼어. 이대로 찍을 거야.”
“작가님이 괜찮으시대요?”
“촬영은 감독이 하는 거야. 서 작가한테는 내가 나중에 잘 설명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우선 드라마가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언제까지 청춘이니 뭐니 하며 뜬구름만 잡을 거냐고.”
“아. 예. 알겠습니다.”
조감독은 뭔가 석연치 않은지 조용히 답했다.
“우리 뒤에는 지영록 국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봐 봐. 내가 삼각관계 살리니까 지수연 역이 확 쓸모가 생겼잖아. 동경하는 선배 컨셉이 뭐야? 멜로에는 이렇게 연적이 등장해야 하는 거지. 암튼 작가가 너무 마이너해. 이럴 줄 알았으면 막장이라도 우연미 택하는 건데.”
“아. 예.”
박호중이 잔인하게 우연미를 쳐 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감독은 지금에서야 이런 말을 하는 그를 보며 기가 찼다.
한편, 수정된 원고로 찍은 보그의 10화 방송 날이 되자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뭐냐. 지수연 쟤는 왜 갑자기 강하나 미워하는 거지?
- 뭐가 뭔지 모르겠다. 선배라고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갑자기 실장님 사랑한다고 저러냐? 왜 갑자기 저렇게 널을 뛰지?
- 와. 그래도 클리셰는 클리셰네. 삼각관계 나오니까 불량식품 먹는 맛이 나네.
- 보그 인기는 별로지만 그래도 청춘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린 수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이러냐. 이러면 옆 동네 막장 드라마랑 뭐가 다른데?
- 옆 동네 막장 드라마 안 보심? 그거 은근 명품 드라마야. 고품격 막장이라고 들어보셨나?
- 나 막장 알레르기야. 그런 거 못 봐.
- 그럼, 이제 보그도 못 보겠네. 보그도 막장화 돼버렸으니. 큭큭.
- 작가 바뀐 거 같은데? 이걸 같은 작가가 썼을 리가 없다.
그때 보그의 방송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서주희 작가는 들고 있던 펜을 놓쳤다.
“말도 안 돼. 왜 저런 내용이 들어간 거지?”
서주희 작가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수정고의 내용이 싹 빠지고 얼토당토않은 삼각관계가 극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보그를 시청하던 작업실 식구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걸 거야.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
서주희 작가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핸드폰을 들었다.
통화음이 울리고 얼마 뒤, 박호중 감독이 전화를 받았다.
[서 작가. 웬일이야? 혹시 방송 보고 전화한 거야?]
“감독님.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보낸 대본이랑 내용이 다르던데요?”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극에 맞게 대사를 몇 개 바꿀 거라고.]
“대사 몇 개라고 하셨지. 에피소드를 통으로 바꾼다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바꾸다 보니까 이전 원고로 찍기에는 좀 무리가 있더라고. 어때? 방송은 꽤 잘 나왔지?]
“대체 뭐가 잘 나왔다는 말씀이세요? 거기서 지수연이 악녀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요? 그동안 쌓아 올린 캐릭터가 쓸모가 없어지잖아요. 지수연 하나만 그런 거면 내가 이런 말 안 해요. 실장님은 거기서 왜 오해를 하는데요? 실장님이 바보도 아니고 누가 그런 유치한 걸로 오해를 하냐고요?”
박호중 감독은 기분이 상하는지 목소리가 다운됐다.
[서 작가 말이 너무 심하네. 나 촬영 때문에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
“감독님. 이렇게 끊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일 아침 시청률 확인해 봐. 누구 말이 맞는지 잘 알게 될 테니 말이야.]
박호중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서주희 작가는 허탈한 마음에 핸드폰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보그의 시청률이 떴다.
‘8.8%’.
첫 방송 이후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보그의 시청률이 처음으로 반등했다.
박호중 감독의 말처럼 되자 서주희 작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방송된 다음 화도 마찬가지였다.
지수연이 분한 후배 캐릭터는 강하나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어느새 드라마는 패션 잡지회사에서 연애하는 평범한 통속극이 되어 버렸다.
* * *
오늘은 서이렌이 바다에 빠지는 장면을 찍는 중요한 촬영 날이다.
서이렌이 걱정됐던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락과 함께 촬영장으로 갔다.
차 안에서 핸드폰으로 드라마 기사를 찾아 모니터링하던 내 두 눈이 커졌다.
마네킹으로 검색을 했는데 보그 기사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막장 대결. 마네킹 VS 보그]
[보그는 왜 마네킹 뒤를 따라가나?]
[명품 막장 마네킹에 반격을 가하는 신흥 막장 보그]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갑자기 내용이 돌변한 보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기사에 나온 최근 보그의 내용을 본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보그가 막장이라니?
서주희 작가가 그런 걸 쓸 사람이 아닌데?
보그는 흐름이 긴 드라마다.
공들인 탑은 후반부에 이르러 폭발하게 되고 시청률도 그때 크게 상승한다.
엔딩 후에는 명품 드라마라며 해마다 회자되는 명작의 반열에 올랐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촬영장에 도착해 보니 스태프들도 위험한 촬영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윤기 감독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의료진까지 대기시켜 놓았다.
안심하고 촬영장을 돌아보는데 스태프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나는 오주환 조감독을 찾아가 물었다.
“왜 이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합니까?”
“원 대표님 오셨네요.”
“무슨 일 있나요? 괜스레 걱정이 드네요.”
“오늘 촬영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대체 뭐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이렇게 어수선한 겁니까?”
“저. 그게.”
오주환 조감독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은 말입니다. 보그 촬영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서주희 작가님이 잠적하셨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