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48화 (49/261)
  • #48화. 287일 시사회

    나는 놀란 눈으로 진설을 쳐다봤다.

    진설은 내게 폭탄을 던져 놓고도 무심한 얼굴로 내 명함을 자신의 핸드백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동안 서이렌이 했던 모든 연기는 진설이 세상에 내놓은 수많은 명작을 레퍼런스해서 탄생했다.

    서이렌의 연기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하고 진설에게 입을 열었다.

    “서이렌 씨가 진설 배우님의 오랜 팬입니다.”

    “후배들이 나한테 종종 팬이라고 하는데. 난 그게 좀 우습던데.”

    “예?”

    “후배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던 내 작품을 일일이 찾아봤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하지만 진설 배우님이 그동안 하신 작품이 다 한국 영화사의 전설이지 않습니까? 후배들이 챙겨서 볼 겁니다. 그리고 서이렌 씨는 정말로 어렸을 때부터 진설 배우님의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자랐습니다.”

    이건 사실이다.

    내 어머니가 진설을 좋아해서 그녀의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보셨고, 서이렌은 마네킹으로 함께 그걸 봤을 테니까.

    “알았어요. 조만간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조만간 만날 일이요?”

    나는 진설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설은 당황한 나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일행이 있어서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네요. 다음에 봐요. 잘생긴 매니저 양반.”

    진설은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나를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 * *

    사람들의 관심 속에 드디어 마네킹 3화가 막을 올렸다.

    드라마를 보지 않던 사람들도 마네킹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궁금증을 못 참고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그녀가 걸어 나온다.

    몸에는 찢어진 쓰레기 같은 옷을 입고 있고 맨발에 머리는 다 헝클어졌지만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다.

    윤서라는 자신이 되살아 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윤서라는 사라지고 마네킹이 되어 살아난 것이다.

    마네킹의 몸을 한 윤서라는 그대로 도로변에 주저앉는다.

    윤서라는 길가의 흙을 두 손으로 줍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흙먼지 보며 윤서라는 입술을 깨문다.

    “부숴 버릴 거야. 내가 당한 만큼 되돌려 줄 거야. 다 망가뜨려 버릴 거야.”

    천사 같던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빛을 잃고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

    복수하겠다며 울부짖는 서이렌의 연기는 막장 드라마나 구경하려고 텔레비전을 틀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 연출이며 연기며 다 미쳤네.

    - 지금 나오는 OST까지 미쳤음.

    -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냐? 나 방금 소름 돋았다고.

    - 주인공이 마네킹일 뿐. 막장 드라마는 아니지.

    - 그게 제일 큰 건데. ㅋㅋ

    윤서라는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녀가 기거했던 이혜성의 저택 앞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가득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성모직 상속녀의 약혼자에 대해 연일 뉴스를 쏟아 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대성모직의 평사원에서 상속녀의 약혼자로 신분 상승한 행운아에 관한 이야기뿐, 죽은 윤서라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텔레비전 속의 서지훈은 이혜성과의 만남을 말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윤서라는 가증스러운 그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복수를 다짐한 윤서라는 이민 가기 전에 친했던 친구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친구는 마침 해외로 출장으로 집을 비웠고, 윤서라는 친구의 집이자 작업실 앞에 쓰러진다.

    작업실을 공유하는 친구의 동료가 쓰러진 윤서라를 발견하고 그녀를 작업실로 옮긴다.

    그녀를 침대에 뉘어놓고 밖으로 나온 그는 전화를 건다.

    “형. 나야. 지석이. 오늘 한국 왔어. 짐 정리하고 바로 달려가게. 조금만 기다려.”

    그가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은 서지훈의 동생 서지석이다.

    서지석은 전화를 끊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온다.

    온몸이 불덩이가 돼서 악몽을 꾸는듯한 윤서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서지석의 눈빛과 함께 3화가 끝났다.

    3화까지 감상한 내 감상평은 캐스팅이 너무 잘됐다는 거다.

    마네킹 제작에서 제일 큰 난항은 내가 생각하기에 배우 캐스팅이었다.

    이윤기 감독이야 스태프를 제일 걱정했지만, 드림팀이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캐스팅이 더 걱정이었다.

    마네킹은 여주 원톱물이다.

    제아무리 서이렌의 기세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올해 데뷔한 신인 배우이기에 다른 주요 배역을 S급 스타로 캐스팅하기 어려웠다.

    나는 이윤기 감독을 설득했다.

    스타는 오로지 서이렌 한 명뿐이고 나머지 배우들은 인기에 상관없이 오로지 연기만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연만 내리 했던 서지훈 역의 최지환과 서지석 역의 강석현은 최적의 캐스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청자들도 내 생각과 같은 반응이었다.

    - 강석현 눈빛 돌았네. 강석현이 저렇게 잘생겼던가?

    - 강석현 나만 알던 존잘 배우였는데. 이제야 뜨는 건가?

    - 강석현이 서이렌 지긋이 바라볼 때 나 숨 막히는 줄. 통창으로 달빛 비추는 연출까지 완전 돌았음.

    - 왜 아무도 우리 최지환 배우님 이야기는 안 하냐? 최지환도 이 작품으로 이름 좀 알리자.

    - 이미 천하의 개새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음. ㅋㅋ- 최지환 오랜 팬인데 난 악역도 나쁘지 않다.

    우리 오빠가 원래 미친 연기력의 소유자인데 맨날 주인공 친구 역할만 하느라 연기력을 드러낼 일이 없었다고. 이렇게라도 빛을 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ㅠㅠㅠㅠ마네킹 4회에서 깨어난 윤서라는 자신을 보살펴 주는 서지석이 서지훈의 친동생임을 알게 된다.

    “이름이 뭐예요?”

    “윤…….”

    자신의 이름을 말하려던 윤서라의 입이 굳게 닫힌다.

    모든 걸 버리고 복수하기로 한 그녀는 새 이름을 갖기로 한다.

    “서혜. 내 이름은 서혜예요.”

    서혜는 서지훈의 동생인 서지석을 이용해 복수를 다짐하며 마네킹 4회가 끝난다.

    * * *

    287일의 시사회 일정을 확인하는데 내 핸드폰이 두두거리며 책상 위에서 흔들렸다.

    액정을 확인해 보니 빈선예였다.

    마네킹 촬영장에 가 있을 빈선예가 웬일로 지금 이 시간에 전화했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로 빈선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대표님. 우리 이렌 씨 영상 뜬 거 보셨어요?]

    “예? 영상이라뇨? 무슨 영상을 말입니까?”

    나는 다짜고짜 영상이라고 외치는 빈선예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졌다.

    혹시 또 촬영장 영상이 풀린 건가?

    악플러 평론가에게 한번 데인 것이 있기에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빈선예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요. 우리 레드카펫 영상이 SNS에 떴는데 그게 지금 난리래요.]

    “레드카펫 영상이요? 혹시 트리플에이 시상식 말하는 겁니까?”

    [예. 그거 맞아요. 이렌 씨 팬이 레드카펫 영상을 편집해서 SNS에 올렸는데 그게 지금 엄청나게 알티 타고 있나 봐요. 소피노아 공계에서도 리트윗했다고요.]

    “아. 그렇군요. 잘됐네요.”

    [지금 그게 뭔가요? 왜 이렇게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거예요? 소피노아 공계 말고도 미국 보그 공계도 우리 이렌 씨 영상을 리트윗하고 난리라고요.]

    나는 흥분하는 빈선예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나야 소피노아도 처음 들어 보는 브랜드고 패션 쪽에는 일자무식인 사람이라 잘 모르지만 대단한 일인 거 같긴 했다.

    “다 빈 팀장님 덕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287일 시사회 드레스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아부하자 수화기 너머로 빈선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TPO에 딱 맞게 찰떡같은 의상을 준비했으니까요.]

    “그럼, 빈 팀장님만 믿을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SNS를 확인했다.

    빈선예의 말대로 서이렌의 드레스 영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이 오진 않았지만, 반응이 좋다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 * *

    다음날 287일의 언론 시사회에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287일 같이 작은 영화가 언론 시사회까지 하게 될 줄 몰랐던 윤서혁 감독은 이곳에 오자마자 청심환부터 먹었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연극만 오래 해 왔던 하경민과 아역 배우 김철 그리고 외국인 팜은 몰려온 취재진을 보며 긴장했다.

    서이렌은 그런 동료 배우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본인도 올해 데뷔한 신인이면서 어디서 저런 여유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드디어 극장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했다.

    기자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의 마지막 삶의 여정이라는 영화의 홍보 내용과 달리 초반부터 경쾌한 톤을 유지하는 287일을 신기해하며 감상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One Year가 근로자가요제에 참가하는 장면에서는 기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죽음을 눈앞에 앞둔 주인공이 연인, 지인, 가족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 같은 노래가 기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마지막까지 경쾌하고 담담한 톤을 유지하던 287일이 끝내 주인공 강준성의 죽음을 보여 주지 않고 끝이 났다.

    기자들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오기가 무섭게 노트북을 열어 기사 초고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이렌의 첫 영화라서 기자들이 몰린 것이었는데 까 보니 영화가 대박이었다.

    재미와 감동.

    관객을 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담담한 시선.

    그때 극장에 불이 켜지며 287일의 감독과 배우가 들어왔다.

    기자들은 쓰고 있던 기사를 접고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윤서혁 감독은 아버지 양복을 빌려 입은 것같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 올라 기자들을 보며 입을 뗐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287일을 감독한 윤서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윤서혁은 기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윤서혁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똥그란 안경에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옷만 체크 셔츠, 청바지에서 양복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처음 입어 본 듯한 그의 옷 태에 너드미가 물씬 풍겼다.

    기자들은 방금 본 영화를 눈앞의 어리숙한 감독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놀란 것 같았다.

    윤서혁이 버벅거리며 인사를 마치자 드디어 배우들 차례가 됐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경민이 나오자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영화 속의 하경민은 촬영 내내 살을 빼느라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 아래가 어두워질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 보였지만 무대 위에 오른 하경민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하경민을 보며 기자들은 새로운 스타가 나타났음을 예감했다.

    뒤이어 아역 연기자 김철이 인사를 했고, 외국인 배우 팜도 나와서 자신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서이렌이 마이크를 들자 극장 안은 차마 눈을 뜨고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윤서혁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은 사방이 번쩍이는 걸 보고 식겁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서이렌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슈퍼스타처럼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영화 287일의 견습 수녀 안젤라 역을 맡은 서이렌입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출연을 결정지은 영화입니다. 여기 계신 기자분들은 제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모두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좋은 영화이니 기사도 잘 써 주세요. 감사합니다.”

    서이렌이 말을 마치고 마이크를 내려놓자 다시 한번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시사회는 대성공이었다.

    아직 시사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사가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영화평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극찬의 연속이었다.

    [베일을 벗은 서이렌의 첫 영화]

    [29살 천재 감독이 만들어낸 화제작 287일]

    [대흥행을 예고하는 역대급 시사회 현장]

    국내 최대 영화 커뮤니티에도 시사회를 참여한 관계자들이 후기를 올렸다.

    - 287일 너무 좋은데요. 삼십억 예산으로 만든 소규모 영화 같지 않습니다. 올해 본 영화 중에 제일 좋네요.

    - 서이렌도 좋은데 다른 배우들도 엄청납니다. 특히 주인공은 올해의 발견입니다. 대체 저런 배우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네요.

    성공리에 시사회가 끝나고 드디어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대기실로 향했다.

    윤서혁과 배우들은 시사회를 겪으며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영화의 대박을 예상한 나는 녹다운된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시작일 텐데.

    그때 내 핸드폰이 두두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 빈선예에게 온 전화였다.

    “빈 팀장님. 시사회 걱정돼서 전화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 끝났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요.]

    나는 흥분한 빈선예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완전 큰일이 났어요.]

    “빈 팀장님. 천천히 이야기해 봐요. 뭔데 그래요?”

    [얀 필립이 우리 이렌 씨를 초대하고 싶데요.]

    “예? 얀? 얀이 뭐죠?”

    [얀 필립 몰라요? 이 시대 최고의 디자이너. 장 루이의 수제자. 명품 브랜드 도나텔로의 수석 디자이너 얀 필립이요.]

    대체 빈선예가 뭐라는 걸까?

    “전혀 모르겠는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