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45화 (46/261)

#45화. 시상식의 꽃

“어디 보자.”

강하나가 포털사이트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자 레드카펫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강하나는 자신의 기사 사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영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배우님.”

“나 지금 기사 사진 보고 있어. 바쁜 거 아니면 나중에 말해.”

“배우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래?”

강하나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영은을 쳐다보자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넸다.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트리플에이 시상식의 게시글이었다.

그런데 글의 베스트로 올라간 댓글이 강하나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 강하나 서이렌 짝퉁 드레스 입었네.

짝퉁? 강하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댓글을 아래로 내렸다.

- 강하나 드레스 짝퉁이 아니라 소피노아에서 나온 신상임. 알고들 떠들어.

- 서이렌이 입은 드레스가 30년 전에 나온 오리지날이라는 거지? 나보다 늙은 드레스라니. ㅋㅋ- 관리 진짜 잘했다.

- 나만 막눈인가? 난 왜 두 드레스가 똑같이 보이지?

- 똑 같은데 서이렌 드레스가 더 고퀄리티로 보임.

- 강하나 어캄? 같은 드레스 입고 시상식 내내 앉아 있어야 하잖아.

- 보는 우리는 꿀잼임.

- 시상식 빨리했으면 좋겠다. 팝콘 튀겨 놨다.

댓글을 읽던 강하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하나는 검색창에서 서이렌을 입력했다.

그러자 자신보다 두 배는 더 많은 기사가 화면에 쏟아졌다.

강하나는 제일 위에 걸린 기사를 클릭했다.

레드카펫 위를 걷는 서이렌의 여신 같은 모습을 본 강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이렌이 입은 드레스와 디테일과 색감이 다를 뿐 분명히 같은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서이렌이 입은 드레스가 오트 쿠튀르에 선 예술 작품이라면 자신의 드레스는 그것을 모방한 기성품같이 보였다.

강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스타일리스트 영은을 불렀다.

영은은 매니저와 함께 상황 파악 중이었다.

“야. 이거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같은 드레스가 두 개냐고?”

“언니. 그거 같은 드레스는 아니고요.”

“너 눈이 삐었어? 이게 어떻게 같은 드레스가 아니라는 거야?”

영은은 안절부절못하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강하나에게 보여 줬다.

누군가 발 빠르게 올린 소피노아 드레스에 대한 설명글이었다.

[서이렌, 강하나 드레스는 같은 것일까?]

게시글은 소피노아 브랜드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삼십 년 전 소피노아를 세운 초대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올해 다시 리메이크해서 만들었다는 히스토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결론은 서이렌의 드레스가 더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외국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그 드레스가 우리나라에 저렇게 잘 보전되어 있다니 놀랍다며 극찬을 했다.

강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댓글을 확인했다.

- 오. 드디어 패션전공자 나타났네.

- 웃기지 마라. 서이렌이 입으면 그게 무조건 원조다. 봐라. 모델보다 예쁘잖아.

└원글러인데 이건 나도 동감. 서이렌 핏이 진짜 마네킹임. 퍼펙트한 듯.

- 강하나 눈물 나겠네. 서이렌이랑 같은 드레스 입고 시상식 내내 앉아있어야 하잖아.

- 미리 애도의 말을 전하지만 나는 꼭 봐야지.

- 나도 지금 시상식 본방 대기타고 있다. 둘이 투 샷이라도 잡히면 끝장이야.

- 그런데 이건 스타일리스트 직무유기 아닌가? 어떻게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지? 보통은 겹치게 안 입잖아.

- 그거 방금 기사 떴어. 서이렌이 원래 입기로 한 드레스를 바로 엊그제 다른 배우가 채갔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타일리스트 소장 드레스 풀었다고 하던데.

- 스타일리스트는 무슨 저런 드레스를 소장하고 있냐?

- 저거 1세대 디자이너 루엔 장 소장품이라던데. 스타일리스트가 루엔 장 손녀래.

- 뭐야? 이렇게 상세한 걸 어떻게 아는 거냐?

- 기사 떴다고. 좀 보라고.

- 그럼, 서이렌 드레스 채간 게 강하나야?

- 루머는 자제하시고. 잘못하면 잡혀간다.

강하나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강하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언니.”

“배우님.”

영은과 매니저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강하나에게 다가왔다.

강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갈래. 짐 싸.”

“언니 안 돼요. 오늘 인기 스타상 받기로 하셨잖아요.”

영은이 말리자 강하나가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이 꼴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서 투 샷이라도 찍히라고?”

“배우님. 이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상 받고 가셔야죠. 이렇게 가면 후폭풍은 어떡합니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강하나가 화를 참지 못하고 화장대 위에 올려진 물병을 던졌다.

그때 영은이 외쳤다.

“언니. 원래 입기로 했던 드레스 입으세요. 그거 아직 우리가 킵해 놓고 있잖아요.”

얼굴이 시뻘게진 강하나가 영은을 돌아봤다.

영은은 짐을 챙기며 말했다.

“근처 피팅룸에 챙겨 놨으니까 제가 가져올게요.”

“배우님. 그것밖에 방법이 없겠네요.”

드레스를 바꿔입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강하나는 입술을 깨물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트리플에이 시상식이 시작됐다.

서이렌은 이진아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진아가 앉아 있는 자리는 원래 트리플에이에서 배정해 준 자리가 아니었다.

이진아가 주최 측에 말해서 서이렌 옆자리로 옮겨 온 거다.

대기실에서 서이렌과 이진아의 투샷을 지켜보는 이락과 빈선예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진아는 완전 우리 서이렌 껌딱지네. 그런데 보기 좋긴 하다.”

“빈 팀장님. 여우비 팬들도 좋다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 둘 사이가 안 좋다는 루머는 쏙 들어가긴 하겠다.”

빈선예의 말대로 최근에 서이렌과 이진아를 사이를 이간질하는 루머가 판을 쳤다.

서이렌이 포상 휴가에 빠지면서 이런 루머가 생겨난 것이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왔다.

나를 보고 놀란 빈선예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됐어요? 록 실장이 뭐라고 하는데요?”

빈선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냥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물어서 아는 거 다 얘기해 줬어요.”

“그랬더니 뭐래요?”

“뭐라고 하겠어요. 드레스를 먼저 빼앗아 간 사람이 강하나라고 하니까 록 실장님도 말문이 막히는지 입 다물던데요.”

“천하의 록 실장이 입을 다물어요? 하. 웬일이래.”

빈선예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아마 강하나 드레스 빼앗은 거에 록 실장도 관계되어 있나 봐요. 누가 드레스 빼앗아 간 건지 소문나면 각오하라던데요. 그래서 그런 야비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전화 끊었습니다.”

“우리 대표님이 자기 같은 줄 아나? 웃기네요.”

내가 미리 알고 깡기자와 함께 기사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니 진땀이 났다.

나는 이 상황을 고소해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빈 팀장님.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인 거예요? 이렌 씨가 이름도 없는 신인이었으면 꼼짝없이 우리가 지금 드레스 바꿔 입어야 했을 거라고요.”

“몰라요. 잘 해결됐으니까 된 거죠. 암튼 강하나 진짜 꼴 보기도 싫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락이 손까지 들며 빈선예를 옹호했다.

“됐습니다. 어차피 이제 일단락된 거니까 넘어갈게요. 우린 이렌 씨가 신인상을 받기를 기도해 보자고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인상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받지 못한다.

나는 지금껏 세 명의 배우들과 함께했으나 한 번도 내 배우가 신인상을 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기세 좋던 이자현도 천재라고 불리며 혜성처럼 나타난 김이솔에게 신인상을 빼앗겼다.

내 배우들에게 한 번도 신인상을 안겨 주지 못한 것이 내 능력 부족인 것 같아서 항상 미안했다.

서이렌에게도 일생에 한 번뿐이겠지만 내게도 단 한 번뿐인 신인상이다.

더 받고 싶어도 이제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그때 텔레비전 화면에 신인상이라는 세글자가 떴다.

“오. 드디어 신인상 시상하나 봐요.”

빈선예와 이락이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 역시 떨리는 손으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럼, 여자 신인상 후보를 먼저 보시죠.”

뒤이어 화면에 여자 신인상 후보들의 연기가 펼쳐졌다.

“어떻게 어떻게. 나 못 보겠어.”

“빈 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우리 이렌 님이 안 받으면 대체 누가 받는다고 그러세요.”

그때 시상자가 카드를 열고 미소 지었다.

오 초의 침묵이 흐르고 시상자의 입이 열었다.

“여자 신인상 수상자는 여우비의 서이렌 씨. 축하드립니다.”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서이렌에게 향했다.

서이렌은 처음에는 당황한 듯 두 눈이 커졌으나 이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서이렌은 담담해 보였으나 오히려 옆자리의 이진아가 감격에 겨워하는 표정이었다.

이진아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서이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소피노아 드레스가 조명을 받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서이렌이 무대 위에 서자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이렌이라는 이름이 찍힌 트로피를 받아 들고 잠시 그것을 응시했다.

텔레비전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내 눈이 시큰해졌다.

드디어 신인상을 받는구나.

서이렌이 상을 받는데 이상하게도 지난날 함께했던 내 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하영. 윤조 그리고 이자현.

그녀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쉴 새 없이 몰려왔다.

그때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우선 저를 사랑해 주시는 팬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리고 싶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진아가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이렌을 바라보는 장면이 짧게 지나갔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순간이 꿈은 아닐까? 작은 텔레비전 안에 펼쳐진 세상은 새장에 갇힌 제게는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합니다.”

서이렌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눈동자에 별이 박혀 있다는 표현은 지금 그녀를 위한 말 같았다.

서이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황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원히 여러분들 곁에서 살아 숨 쉬며 연기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이렌의 수상소감이 끝나자 시상식장을 빛내고 있던 동종업계 관계자들과 일반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서이렌의 저 말은 진심일 거다.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의 몸에 갇혀 살던 서이렌이다.

그녀는 지금 진심으로 이 순간을 기뻐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지난 십 년을 돌이켜보면 실패가 더 많았다.

내게 남은 삶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거다.

내 배우 서이렌을 위해서.

* * *

드레스를 갈아입은 강하나가 나타났다.

강하나가 들어오자 객석이 술렁였다.

무대에는 축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화면으로는 회장의 분위기를 몰랐으나 객석에 앉은 배우들은 달라진 강하나의 드레스를 보며 한마디씩 건넸다.

그때 이진아가 서이렌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강하나 드레스 바꿔 입고 나타났어.”

“그래요?”

서이렌은 이진아의 눈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왼쪽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강하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강하나의 드레스를 본 서이렌이 한마디를 건넸다.

“왜 처음부터 저걸 안 입었을까요? 강하나는 쿨톤이라서 저 드레스가 훨씬 잘 어울리잖아요.”

서이렌은 강하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축하 무대가 끝나고 인기 스타상 시상이 시작되고 강하나의 이름이 호명됐다.

강하나는 갈아입은 드레스의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표정만은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런데 그때, 길게 끌린 치맛자락에 강하나의 하이힐이 걸렸다.

“어머!”

외마디 비명이 들렸고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흩어졌다.

강하나는 그렇게 계단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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