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레드카펫의 승자
소피노아의 이름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드레스.
무려 삼십 년 전에 만들어진 드레스였으나 보관 상태가 좋아 당장이라도 그걸 입고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걸 꺼내게 만들어? 진짜 웃기지도 않아.”
빈선예는 드레스를 가져간 강하나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배우들은 시상식 드레스 때문에 연말마다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곤 한다.
내가 입지 않을 거라도 남이 입는 게 싫어서 여러 벌을 킵해 놓고 다른 사람들은 구경도 못 하게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빈선예는 소피노아의 드레스를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기에 다른 드레스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른 배우들처럼 얌체같이 입지도 않을 드레스를 킵해 놓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렇게 나름 정도를 지킨다고 지켰는데 강하나가 나타나 홀랑 서이렌의 드레스를 채 간 것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어. 어디 한번 오리지널이랑 대결해 보라고.”
빈선예는 드레스를 꺼내 챙기고 집에서 나왔다.
* * *
강하나는 소피노아의 드레스를 보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옆에 선 스타일리스트 영은만 안절부절못했다.
“언니. 정말로 그 드레스 입고 가실 거예요?”
“응. 너무 맘에 들어.”
“그럼, 언니가 입기로 한 다른 드레스는 어떻게 할까요? 샵에 다시 가져다 놓을까요?”
“미쳤니?”
“예?”
“서이렌이 입을 수도 있잖아. 안 돼.”
강하나는 마치 드라마 악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낼모레가 시상식인데 지금 모든 드레스가 대여 중일걸. 내가 이거 샵에 가져다주면 서이렌이 입을 거 아냐? 싫어. 가뜩이나 요즘 비교 기사가 나기 시작해서 짜증 난다고.”
스타일리스트 영은은 강하나가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는 서이렌의 드레스를 강제로 가져왔으면서 서이렌은 자신의 드레스를 입으면 안 된다니.
하지만 영은은 속마음을 숨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
강하나가 부르자 영은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드레스가 나한테 딱 이잖아. 그래? 안 그래?”
“예. 잘 어울리세요.”
“그런데 너는 왜 처음부터 이걸 가져오지 않은 거야?”
영은은 자신한테 불똥이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답했다.
“소피노아 측에서 안 보여 줬어요.”
“그게 스타일리스트의 역량이라는 거야. 안 보여 준다고 해도 봤어야지. 내가 너처럼 무능력한 스타일리스트를 데리고 계속 일해야겠어? 꼴 보기 싫으니까 나가 봐.”
“언니. 죄송해요.”
“변명하지 마. 짜증 나니까.”
영은은 눈물을 삼키며 대기실에서 나왔다.
한편, 오리지널 소피노아 드레스를 가지고 샹그릴라 호텔로 간 빈선예는 호텔 안에 있는 세탁소로 들어갔다.
세탁소에 들어서자 머리에 듬성듬성 흰머리가 난 노년의 남자가 빈선예를 알아보고 반겼다.
“선예니? 여긴 네가 웬일이야?”
“아저씨.”
빈선예가 아저씨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할머니가 디자이너 시절에 함께 했던 단골 세탁소 사장이었다.
“아저씨. 이 드레스 좀 봐주세요.”
빈선예는 탁자 위에 가져온 드레스를 올려놨다.
드레스를 유심히 관찰하던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소피노아 드레스네.”
“역시 아저씨는 알아보실 줄 알았어요.”
“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시던 거였어.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이거 가지고 싶다고 그때 뉴욕 블루필 백화점까지 가서 구한 거야.”
“알아요. 한국에는 달랑 한 벌뿐이잖아요.”
아저씨는 드레스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관리 잘했네. 그냥 스팀만 하면 되겠다. 언제 입을 거야?”
“낼모레요.”
아저씨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낼모레 오후 두 시쯤 드레스 가지러 올게요.”
* * *
드디어 트리플에이 시상식 날 아침이 밝았다.
서이렌은 오랜만에 촬영장이 아닌 청담동의 샵으로 갔다.
연예인 화장과 머리를 담당하는 샵 중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배우들로 인산인해였다.
서이렌은 그곳에서 오랜만에 이진아와 재회했다.
“진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이렌아.”
이진아가 머리에 롤을 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서이렌을 반겼다.
“너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정말 그 작품 들어가는 거 맞아?”
이진아는 서이렌이 막장 드라마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했다.
서이렌은 이진아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며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이제 곧 방송해요.”
“신중하게 고른 거 맞아? 혹시 너희 대표님이 네 의견은 듣지도 않고 밀어붙인 건 아니고?”
“아니에요. 제가 먼저 대본 보고 하고 싶다고 졸랐어요. 우리 대표님은 오히려 반대하셨는걸요.”
“그랬구나. 그럼, 다행이긴 한데…….”
이진아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이렌을 쳐다봤다.
“난 그래도 걱정이다. 그거 막장 드라마라고 기사도 나고 그러던데.”
“언니도 대본 봤으면 한다고 했을걸요? 제가 앉은 자리에서 대본 4화까지 다 읽었어요.”
“그 정도로 재미있어?”
“그럼요.”
이진아는 서이렌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하자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진아 언니. 우리 대표님이 막 강제로 시키고 그런 분이 아니에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알아. 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원 대표님이야 젠틀하고 멋지다고 이 바닥에서도 유명하잖아. 나도 실제로 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
“그래요? 우리 대표님이 그렇게 유명해요?”
“몰랐어? 스태프들이 원 대표님이 배우인 줄 알고 실수한 게 한두 번이 아니래. 유명한 이야기잖아.”
서이렌이 당황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신인 여배우들도 우리 대표님 알고 있을까요?”
“우리 회사 신인은 알던데?”
이진아의 말을 들은 서이렌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샵의 문이 열리며 새빨간 코트를 입은 화려한 여자가 들어왔다.
강하나였다.
강하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샵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서이렌과 이진아가 앉아 있는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서이렌에게 시선이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나는 평소처럼 독립된 공간에서 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강하나가 스태프가 안내하는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강하나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하나 요즘 왜 저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녀? 아직 신인인데 벌써 스타병 걸린 거야? 너무 빠른데?”
“LOK에서 차세대 이자현이라고 푸쉬가 엄청나잖아. 이번에 새로 주연으로 발탁도 되고.”
“연기는 못하던데.”
“야. 들린다. 조용히 해.”
“어차피 혼자 메이크업 받는다고 방에 들어갔는걸.”
방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강하나는 아까 밖에서 본 서이렌이 계속 신경 쓰였다.
‘쟤는 볼 때마다 왜 저렇게 예쁜 거야. 분명히 수술했을 거야. 절대 자연적인 얼굴이 아니야.’
강하나는 자신의 메이크업을 위해 방에 들어온 원장에게 물었다.
“서이렌은 누가 해 줘요? 아까 보니까 아주 실력 있는 사람이 해 준 거 같던데. 원장쌤인가요?”
“서이렌 씨요? 저 아니에요.”
“원장쌤이 안 했어요? 그럼, 누가 한 건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화장이 잘된 거예요? 나는 왜 이 샵에서 그 사람한테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거 같죠?”
강하나가 원장에게 따져 물었다.
원장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답했다.
“서이렌 씨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뭐라고요?”
“지금 쌩얼일 겁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 거죠.”
“무슨 말도 안 되는…….”
강하나는 말도 안 된다며 아까 밖에서 봤던 서이렌을 떠올렸다.
‘말도 안 돼. 그게 쌩얼이라고?’
서이렌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웠으며 입술은 틴트를 바른 듯 발갛게 빛났었다.
지금 엄청 세심하게 베이스를 깔고 있는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강하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원장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메이크업을 진행했다.
* * *
샵에서 나온 강하나가 밴에 올라탔다.
기다리고 있던 스타일리스트 영은이 강하나를 반겼다.
“이제 드레스 입으러 가시죠. 시상식 열리는 곳 근처에 피팅룸 대여해 놨어요.”
“나 이제 이 샵 안 다닐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좋아하시잖아요.”
“싫어졌어. 당장 다른 곳 알아봐.”
“예. 언니.”
영은은 더 물어보지 않고 입을 굳게 닫았다.
강하나의 심기가 불편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았다.
피팅룸으로 간 강하나는 소피노아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완벽하게 화장하고 헤어까지 완성한 상태에서 드레스를 입으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레드카펫 큐시트 가져와 봐.”
“여기 있어요. 언니.”
영은이 건네주는 큐시트를 확인한 강하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큐시트 순서상 자신이 먼저 레드카펫을 밟고 바로 뒤가 서이렌이다.
“서이렌 아직도 드레스 못 구했다고 했지?”
“예. 어제 샵이랑 백화점에서 드레스 대여된 거 확인해 봤을 때는 서이렌 이름으로 빌린 드레스는 없었어요.”
“대체 뭘 입고 나타날지 궁금해 미치겠다. 뭘 입고 올지 모르겠지만 내 뒤에 레드카펫 밟는 거 후회하게 될 거다.”
밴에서 나온 영은은 마침 커피를 사 들고 오는 매니저를 만났다.
사정 이야기를 하자 매니저의 얼굴이 굳었다.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서이렌을 싫어하는 거예요?”
영은의 질문에 매니저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피치업 때부터 악연이잖아. 그리고 사실…….”
매니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들어가는 보그 말이야. 그거 원래 서이렌한테 대본 갈 거였대.”
“예? 정말요?”
“응. 그거 듣고 발작하는 거지. 그리고 요즘 드라마 시작 직전이라 비교 기사도 많이 나고.”
“겨우 그런 거로 그러는 거예요?”
“우리 강 배우님이 그런 거 얼마나 따지는데. 암튼 커피는 내가 들고 들어갈게. 넌 여기서 쉬어.”
“고마워요. 오빠.”
* * *
트리플에이 시상식은 아직 방송 전이지만 레드카펫 스트리밍에는 벌써 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곽이석도 오늘 일찌감치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이락이 사전에 큐시트를 보내 줬기에 서이렌이 언제 나올지 알고 있었다.
강하나가 레드카펫을 밟자 곽이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하나 바로 뒤 순서가 서이렌이기 때문이다.
실시간 채팅창에는 강하나 드레스를 보며 예쁘다고 난리가 났다.
- 미친. ㅈㄹ예뻐.
- 오늘 드레스 중 베스트야.
- 드레스 잘 골랐다.
- 강하나 보그 주인공 맡더니 패셔니스타 된 거냐? 작년에는 워스트 드레서였는데 ㅋㅋ- 오늘 본 사람 중 젤 예쁘다. ㅋㅋ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포토 타임을 가진 강하나가 안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서이렌이 레드카펫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이렌은 소피노아의 오리지널 드레스를 입고 단정한 화장과 헤어로 나타났다.
드레스가 워낙 튀기 때문에 화장과 헤어까지 부담을 줄 필요가 없었다.
서이렌이 나타나자 채팅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댓글이 쏟아졌다.
- 서이렌 미쳤네. 레드카펫을 찢으셨다.
- 여신. 존예 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차에서 내리는 거 영화의 한 장면 같음.
- 존예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너무너무 이쁨 ㅜㅜ
- 얼굴 몸매 다 가졌어. 이 언니 ㅠㅠㅠㅠㅠ
그때 누군가 서이렌의 드레스에 대해 한마디를 건넸다.
- 저 드레스 방금 강하나가 입은 드레스랑 똑같은 거 아니냐?
- 어? 그러네. 저거 강하나랑 똑같은 옷인데?
그때 패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글을 올렸다.
- 저거 소피노아 초대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네.
- 그게 뭔데? 나도 알려 줘.
- 강하나가 입은 게 올해 30주년 기념으로 나온 거고 서이렌이 입은 게 원본임. 여기 30년 전 드레스 사진 봐라.
- 뭐냐? 강하나 짝퉁 입은 거야?
└짝퉁은 아니고. 오리지날 본떠서 새로 만든 거라잖아.
└그게 짭이잖아.
- 강하나 어떡하냐? 벌써 인터넷에 두 배우 사진 붙여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 서이렌 압승이냐?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여신님 승이지. 인간이 어떻게 여신님을 이기냐?
한편 대기실로 들어온 강하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영은이 건네준 태블릿 PC를 켰다.
“또 무슨 찬양 기사가 올라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