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43화 (44/261)
  • #43화. 드레스 전쟁

    “어때? 이런 톤을 계속 유지하게 될 거야.”

    “괜찮은데요?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감독님 작품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놀란 눈으로 이윤기를 쳐다봤다.

    이윤기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고민 많이 했어. 예전과 같은 스타일로는 안 되겠더라고.”

    “정말 대단하세요. 놀랐습니다.”

    나는 진심이었다.

    십 년이 넘게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던 이윤기 감독이 섬세하고 느린 연출 습관을 버리고 저렇게 속도감 있고 빠른 연출로 바뀌다니.

    “우 작가도 저렇게 내 의견 받아들이며 원고를 수정하는데, 내가 뭐라고 가만히 있겠어? 바꾸길 잘한 것 같아.”

    이윤기 감독은 이 상황에서도 우연미 작가를 칭찬하며 자신을 낮췄다.

    명품 연출의 대가와 막장 드라마의 여왕이 이토록 잘 어울릴 거라고 그 누가 상상했을까?

    나는 그제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더 지켜볼 것도 없다.

    이대로 이윤기 감독과 우연미 작가를 믿으면 된다.

    “그만 방해하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방송 한 달 남았으니까 우리 열심히 해 보자고.”

    “예. 감독님.”

    * * *

    어느새 드라마 방영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KBC 드라마국은 화제작 두 개가 동시에 시작하자 요란하게 홍보를 했다.

    [강하나 KBC 월화 드라마 보그 주연으로 발탁. 제2의 이자현으로 쐐기를 박나?]

    [역대급 신인 서이렌의 차기작. KBC 수목 드라마 마네킹.]

    두 작품은 같은 시간대도 아니고 같은 방송국의 드라마지만 묘하게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배우가 드라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번 주말, 드라마를 앞두고 전초전이 벌어진다.

    트리플에이 시상식.

    빈선예는 시상식에서 서이렌의 위엄을 보여 주겠다며 몇 주 전부터 명품 브랜드를 쫓아다니며 드레스를 골랐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대여를 못 해 주겠다면 본인 사비를 들여서라도 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서이렌이 입을 드레스가 결정되었다.

    빈선예는 여성미를 물씬 풍기는 것으로 유명한 소피노아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흐르는 듯한 상체 라인은 고급스러워 보였고, 풍성한 치마에 꽃잎을 뿌려 놓은 듯한 화려한 장식은 우아하고 귀여운 느낌을 동시에 주는 드레스였다.

    한 달 전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공개된 작품이고 한국에는 압구정 갤러리스 매장에 달랑 한 벌 들어왔다고 했다.

    빈선예가 보내 준 피팅 사진을 본 나로서도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빈선예의 말로는 삼십 년 전 소피노아를 탄생시킨 초대 디자이너가 만든 드레스의 오마주라고 하는데 나 같은 패션계 알못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한편, 같은 시각 보그의 주인공인 강하나는 드레스 피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스 여신같이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강하나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흡족한지 미소를 지었다.

    “영은아. 다른 배우들 드레스 다 확인해 봤어?”

    강하나의 질문에 스타일리스트 영은이 깜짝 놀라 뛰어왔다.

    “예. 다 확인했어요.”

    “보여 줘 봐.”

    “잠시만요.”

    영은이 허둥지둥 핸드폰을 꺼냈다.

    강하나는 허둥대는 영은을 보며 혀를 찼다.

    “좀 천천히 해. 보는 나까지 숨넘어가겠다.”

    “죄송해요. 언니.”

    “됐고. 빨리 보여 주기나 해.”

    영은이 떨리는 손으로 강하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 위에 떠 있는 첫 번째 옷을 확인한 강하나가 물었다.

    “이건 뭐야?”

    “윤향기라고 신인상 후보 배우가 입을 겁니다.”

    “누가 시상식에 바지 정장을 입고 와. 얘 미친 거 아니냐?”

    “그게 다이안 홀 오마주 같아요.”

    “다이안 홀이 누구야?”

    “미국 배우인데요. 과거에 오스카 시상식에서 저런 디자인의 정장을 입고 나타났거든요.”

    “여기가 무슨 외국이야 뭐야? 이상한 애네.”

    강하나는 코웃음을 치며 다음 화면으로 넘겼고, 블랙의 똑 떨어지는 멋진 드레스가 화면에 나타났다.

    “뭐야? 이건 누구 거야? 내가 못 본 드레스 같은데?”

    “그건 최우수상 후보인 이진아 드레스요.”

    “나는 이걸 왜 못 봤을까?”

    강하나가 영은을 째려보자 영은은 몸이 굳었다.

    “저건 아직 한국에 안 들어온 거예요.”

    “그럼 이진아는 어떻게 구한 건데?”

    “파리 패션쇼에 구경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사비로 샀대요.”

    “진짜야? 이진아 배포가 그렇게 컸어?”

    “이진아가 산 게 아니라 숲 엔터 대표가 샀다고 해요. 이진아가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게 미안해서 사 줬다고.”

    “참나. 드라마도 잘되고 회사에서도 엄청나게 밀어준다고 하고. 되게 부럽네.”

    “언니가 더 대단하죠.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미니시리즈 주연이시잖아요.”

    영은의 입바른 소리에 강하나는 기분이 좋은지 표정을 풀었다.

    “됐어. 블랙이 뭐야? 너무 올드해. 나랑은 안 어울리니까 상관없어.”

    “당연하죠. 언니 드레스가 제일 예뻐요.”

    “그런 당연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강하나는 그 이후로도 다른 배우들의 시상식 드레스를 품평했다.

    마지막 사진까지 확인한 강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서이렌 드레스는 왜 없는 건데?”

    “그건 몰라요.”

    “제일 중요한 서이렌 드레스를 먼저 알아 와야지. 청담동 샵에 안 가 봤어? 거기서도 모른대?”

    “압구정 갤러리스 백화점에서 단독으로 골랐나 봐요. 저한테는 어떤 드레스인지 안 알려 주더라고요.”

    “되게 웃기네. 거기 모델은 나잖아.”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강하나가 갑자기 일어섰다.

    “야. 짐 챙겨.”

    “집으로 가시나요? 오늘 촬영은 끝났잖아요.”

    강하나가 가방을 챙기는 영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압구정으로 가.”

    * * *

    촬영 중간에 쉬러 잠시 차로 돌아온 서이렌을 이락이 맞이했다.

    이락은 서이렌에게 따뜻한 핫팩과 차를 건넸다.

    “추우시죠?”

    “괜찮아. 할 만해.”

    서이렌은 아무렇지도 않다며 이락을 향해 웃어줬다.

    서이렌이 차에 놓고 간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톡이 들어와 있었다.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서이렌이 문자를 주고받는 사람이라면 스타탄생 식구들 그리고 이진아뿐이다.

    “이진아 배우님?”

    “응. 맞아.”

    “이진아 배우님 알고 보면 친구 없는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이렌 님께 연락을 많이 한 대요?”

    “진아 언니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

    서이렌은 웃으며 이진아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진아는 시상식에서 입을 드레스 피팅 사진을 잔뜩 찍어서 서이렌에게 보냈다.

    서이렌은 바로 이진아에게 답장을 보냈다.

    [언니. 너무 예뻐요. 잘 어울려요.]

    [이렌이 너는 내가 뭘 찍어서 보내도 예쁘다고 해 줄 거잖아.]

    [아니에요. 언니. 정말 예뻐요.]

    [고마워. 그런데 넌 뭐 입어?]

    서이렌이 핸드폰 사진첩을 뒤져서 자신의 드레스 피팅 사진을 이진아에게 전송했다.

    이진아는 바로 드레스를 알아보고 메시지를 보냈다.

    [소피노아 드레스? 파리에서 봤어. 예쁘다.]

    그때 카니발로 스태프가 다가왔다.

    “서이렌 씨 곧 촬영 들어갑니다.”

    서이렌은 들고 있던 핫팩을 다시 이락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압구정 갤러리스 백화점에 나타난 강하나는 소피노아 드레스를 보여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점장은 안 된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하지만 다른 배우님께서 입기로 하고 맡겨 놓은 겁니다.”

    “누가 입겠대요? 한번 보자고 하는 거잖아요.”

    “규정상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점장은 생떼를 쓰는 강하나를 달래며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을 보여 줬다.

    열받은 강하나가 핸드폰을 들었다.

    “록 실장님. 저 강하나인데요. 지금 갤러리스 백화점이에요. 제가 한번 보고 싶은 옷이 있는데 규정상 못 보여 준다잖아요. 백화점 모델한테 이래도 되는 거예요?”

    강하나의 대화를 듣는 점장의 얼굴에서 점점 핏기가 가셨다.

    “갤러리스 홍보 담당자 전화번호 아시죠? 저 좀 알려 주세요.”

    핸드폰 너머로 록 실장의 거친 언사가 언뜻언뜻 들렸다.

    “그러게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모르겠어요.”

    전화를 끊은 강하나가 점장 앞으로 다가왔다.

    강하나는 록 실장이 보내 준 백화점 홍보실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보여 주며 말했다.

    “어떻게 할래요? 보여 줄 거예요? 아니면 지금 통화 버튼을 누를까요?”

    “보여 드릴게요.”

    점장은 결국 강하나의 억지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강하나는 점장을 따라 안쪽의 VIP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서이렌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옷장을 열자 소피노아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보였다.

    “영은아. 치워 봐.”

    “예. 언니.”

    영은이 마네킹을 감싸고 있던 천을 치우자 우아한 드레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 진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강하나는 미간을 찡그리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제 보셨으니까 가시죠. 강하나 배우님.”

    점장은 안절부절못하며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강하나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잠깐 거기 계셔 보세요. 나 전화 좀 할 테니까.”

    강하나는 결국 록 실장에게 받은 홍보실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 * *

    스타탄생 사무실에서 서이렌의 다음 촬영 의상을 정리하던 빈선예의 전화벨이 울렸다.

    갤러리스 백화점 번호를 확인한 빈선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예. 스타탄생 빈선예 팀장입니다.”

    전화를 받은 빈선예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드레스를 못 입게 됐다니요?”

    [죄송합니다. 다른 배우분께서 그 드레스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요.]

    “우리가 먼저 픽한 드레스잖아요. 그게 말이 됩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막아 봤지만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빈선예는 사죄하는 점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혹시 누가 가져갔는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차피 레드카펫에 서면 누가 가져갔는지 알 텐데요.”

    […….]

    “말씀해 주세요. 누군데요?”

    [그게…….]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미 드레스는 날아간 거고 되돌릴 수 없잖아요. 난 그냥 욕이나 해 주려는 것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점장이 입을 열었다.

    [강하나 배우님이요.]

    “아. 그렇군요.”

    빈선예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으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만 끊을게요. 다른 드레스 수배하러 가야 해서요.”

    [제가 이미 다른 드레스를 알아봐 뒀습니다. 오시면 바로 입어 보실 수 있어요.]

    “괜찮아요. 또 빼앗길까 봐 무서워서 못 가겠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점장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주인 있는 거 뻔히 알고도 강탈해 간 도둑놈이 미안해해야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서이렌 씨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들어가세요. 오늘 힘드셨을 텐데. 이만,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빈선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와. 이게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거구나. 진짜 웃기네.”

    빈선예는 사장실로 바로 전화를 걸려다가 멈칫했다.

    “그렇다고 엄마한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 드레스가 딱이었는데.”

    핸드폰을 만지며 고민하던 빈선예는 결국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 * *

    오랜만에 오는 본가다.

    빈선예가 집으로 들어오자 입주 가정부가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선예 아가씨.”

    “아주머니 조용히. 조용히 해 줘요.”

    빈선예는 주위 눈치를 살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

    “엄마 어디 가셨어요?”

    “사모님은 출근하셨죠.”

    “그럼, 집에 아무도 없겠네요.”

    빈선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데 웬일이세요? 이제 집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요? 엄마한테 쥐어 터질 일 있어요?”

    빈선예는 웃으며 이 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제방 남아 있죠?”

    “그럼요. 제가 계실 때랑 똑같이 매일 매일 청소하고 있어요.”

    “역시 아주머니가 최고예요.”

    이 층으로 올라간 빈선예는 복도 끝에 있는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아주머니 말씀대로 방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빈선예는 서랍장 안에서 열쇠를 찾아 옷장 방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이 옷으로 가득 찼는데 그중에서 가장 구석에 있는 옷장에만 열쇠가 달려 있었다.

    그 옷장은 빈선예의 할머니가 유품으로 남겨 주신 옷이 들어 있다.

    빈선예의 할머니는 대한민국 패션 디자이너 1세대셨다.

    이건 옷이라기보다는 할머니가 남긴 인생의 발자취나 다름없었다.

    옷장을 열자 희천으로 잘 포장된 옷이 수십 벌이나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빈선예는 그중에서 제일 앞쪽에 걸려 있는 드레스 하나를 꺼냈다.

    강하나가 빼앗아 간 소피노아 드레스의 원조.

    삼십 년 전의 그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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