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온 우주가 돕는다
이윤기가 놀란 나를 안심시켰다.
[모두 실력 있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원 대표는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이라니요.
‘지금 예상치도 못한 드림팀이 꾸려져서 너무 놀란 것뿐입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윤기 감독은 갑자기 내가 웃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냥 너무 좋아서요. 감이 좋네요. 저는 너무 좋습니다.”
[아. 그래?]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감독님. 우리 대박 날 거 같지 않으세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꽉 다물었다.
[원 대표 미안해. 나 전화 끊어야겠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전화가 들어왔네.]
“괜찮습니다. 저는 이만 끊을게요.”
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한편, KBC 방송국 드라마국의 박호중 감독이 캐스팅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방송하는 보그와 마네킹을 묶은 VS 기사가 벌써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두 작품의 주연이 피치업의 모델인 서이렌과 강하나라서 그런지 라이벌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 피치업 두 스타의 맞대결인가?
- 강하나에 스타 PD 박호중 거기다 서주희 작가까지. 대박 드라마 하나 나오겠네.
- 강하나는 진짜 작품 잘 들어가네. 서주희 작가 글빨 좋잖아.
- 소속사가 LOK잖아. 거기서 차세대 이자현이라고 강하나 엄청나게 밀어준다.
- 이자현은 무슨. 순전히 푸쉬빨인데.
- 같은 시기에 서이렌 막장 드라마도 하지 않냐?
- 아직 드라마도 안 했는데 뭔 막장이야?
- 작가를 봐라. 시어머니의 남자 작가라고.
- 그건 맞음. 시남이 재미있긴 했지만 막장이지.
- 서이렌이 보그를 했어야지. 이거 서이렌 회사가 문제 아니냐? 보니까 회사에서 배우라곤 서이렌 한 명밖에 없던데.
- 이래서 영세한 회사에 오래 있으면 안 돼. 작품 고르는 안목이 형편없잖아.
- 서이렌 기세 좋았는데ㅠㅠㅠㅠ 여우비에서 얼떨결에 조연으로 신분 상승하고, 바로 연극 터지고 영화 촬영하고. ㅠㅠㅠㅠ- 지금도 기세는 좋음. 소속사가 병신이라 그렇지.
- 스타탄생 대표 잘생겼다고 좋아했는데. 내 실수다. 대표가 잘생기면 뭐 하냐? 일을 못 하는데. 서이렌 빨리 계약 끝났으면 좋겠다.
- 신인이라 5년에서 7년은 계약했을 텐데.
- 망했네.
- 그래도 우리 엄마는 좋아하심. 울 엄마 시남 팬이거든.
- 사실 나도 시남 좋아했다.
박호중 감독은 칸막이 너머 구석 자리에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이윤기 감독을 힐끔 쳐다봤다.
이윤기 감독의 옆에는 자신이 빼앗긴 오주환 조감독이 있었다.
박호중은 이윤기 감독 사단이라 불리던 스태프를 모두 빼 왔으면서도 오주환 한 명 빼앗긴 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서이렌이다.
여주인공이 강하나로 결정되고 서이렌에게는 대본도 보내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배우를 빼앗긴 것 같아 심사가 뒤틀렸다.
‘신생 회사라서 그런지 대표가 감이 없어. 어떻게 저딴 작품에 들어가냐고. 이윤기 감독도 그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랑 음악방송 PD? 저딴 쓰레기들로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올 리가 없지.’
박호중은 인터넷 여론 역시 자신이 만드는 보그가 기대된다는 의견이 대세인 걸 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차피 이 작품이 KBC에서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보그를 보란 듯이 성공하고 회사를 차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락이 정리해준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을 살피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서이렌을 욕하는 글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나와 스타탄생을 욕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욕받이가 필요하다면 내가 적임자긴 하다.
그때 이 층으로 올라온 빈선예가 실실 웃는 나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예요? 기사 뜨고 욕먹는 거 같아서 걱정돼서 올라왔더니.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소름 끼치게.”
“빈 팀장님. 오셨어요?”
빈선예의 손에는 방금 받은 따끈따끈한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거 뭐예요? 대본인가요?”
“1, 2화 수정고요. 출근하는 길에 작가님 집에 들러서 받아 왔어요. 이틀 후에 3, 4화 수정고도 주신다네요.”
“빠르네요.”
“제가 위층에 자주 가는데 이윤기 감독님이 완전 빨간펜이시더라고요.”
“빨간펜이요?”
“빨간펜 첨삭 지도 몰라요? 선생님이 빨간펜으로 쫙 긋고 문제 풀이해 주시잖아요.”
“아. 그 빨간펜이군요. 그런데 그 정도로 세세하게 봐주신대요?”
섬세하고 꼼꼼한 이윤기 감독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한가지 염려되는 점은 그러다가 우연미 작가가 또다시 자신의 색과 장점을 잃어버리고 헤매면 어쩌냐 하는 거다.
나는 다급하게 마네킹의 1, 2화 수정고를 펼쳤다.
이십 분도 안 돼서 수정고를 다 읽은 내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거…….”
“더 재미있어졌죠?”
“막장스러운 소재는 여전한데 뭔가 더 세련돼졌네요.”
신기하다. 내용이 크게 달라진 게 없는데 디테일한 게 추가되고 막나가던 악역의 대사가 바뀌다 보니 전보다 훨씬 읽기 수월해졌다.
“제가 빨간펜 달린 거 봤는데 이윤기 감독님이 악역이 너무 단조롭게 악만 쓴다고 바꿔 보자고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바뀐 거고요?”
“두 분이 같이 캐릭터를 다시 만드셨대요. 나는 가끔 위층 올라가서 상황만 보는 거라서 잘은 모르는데 올라갈 때마다 두 분이 전화 통화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아까 이윤기는 반드시 받아야 하는 전화라며 나와의 통화를 끊었다.
그게 우연미 작가님 전화였던가?
드림팀에서 제일 걱정이던 게 작가였는데 이러면 작가까지 완성인가?
나는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루빨리 촬영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내 눈으로 결과물을 보고 싶다.
* * *
9월 말, 드디어 마네킹의 촬영이 시작됐다.
서브 여주인 이혜성이 사는 저택에 도착한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한 재벌의 저택이 아니라 판타지 드라마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드라마 미술팀이 혼을 갈아 넣은 수준이었다.
“와. 여기서 살고 싶네요.”
이락은 나와 함께 촬영장을 돌아다니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오주환 조감독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원 대표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대본 리딩 때 보고 다시 뵙네요.”
“서이렌 씨 촬영은 11시부터 시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팀이 힘 좀 썼네요. 저택을 안 빌리고 세트를 지을 거라고 하셔서 걱정을 좀 했는데 기우였네요.”
“민수 형이 다큐멘터리 찍다가 만난 분이 영화 소품실 사장님이시더라고요. 그분 소개로 철거될 세트 가져와서 리모델링만 한 겁니다. 소품도 일부는 그대로 쓰고요.”
“아. 그래요?”
“그럼요. 우리 드라마 예산으로는 이런 화려한 세트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오주환 조감독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촬영장 분위기도 훈훈했다.
민수라는 사람이 데려온 스태프와 기존 드라마 촬영 스태프의 합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고 나와 빈선예, 이락은 멀찌감치 서서 첫 촬영을 구경했다.
“이렌 님의 촬영을 이렇게 생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이락은 두 손을 꼭 모으고 대기 중인 서이렌을 바라봤다.
이락의 옆자리에 선 빈선예도 표정이 남달랐다.
빈선예는 이번 작품을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
서이렌이 맡은 윤서라가 전도유망한 디자이너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돌아오는 역이므로 변화를 줄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라서 그런지 원하는 의류 브랜드에서 협찬을 거부했기에 빈선예가 의상을 구하느라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녀야 했다.
촬영장이 처음인 이락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되게 빨리빨리 지나가네요.”
“우리 이렌 씨가 NG 하나 없이 한 번에 가잖아.”
첫날 촬영은 아무 문제 없이 밤 여덟 시가 되어 끝이 났다.
서이렌이 카니발에 오르자 나는 이락과 빈선예에게 말했다.
“락 군. 나는 잠시 어디 좀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어디 가시는데요?”
“그건 비밀입니다.”
“예?”
이락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농담이고요. 감독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요. 먼저 들어가요. 락 군.”
“알겠습니다. 대표님.”
스타탄생 카니발이 사라지자 나는 한창 현장을 정리하고 있는 이윤기 감독에게 다가갔다.
나는 오늘 촬영을 지켜보며 대체 어떻게 영상이 뽑혔을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편집실에 따라갈 생각이다.
예전에도 종종 이윤기의 편집실에 놀러 갔었기에 이번에도 문제없을 거라 여겼다.
이윤기는 내가 주위에서 알짱거리자 내 의도를 파악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건데요?”
“심하영 처음 촬영할 때도 그렇게 안절부절못했잖아.”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요.”
“몇 년 전 일이라고 벌써 까먹었어? 첫 편집 결과물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나는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따라가도 될까요? 저 정말 없는 사람처럼 구경만 할 겁니다.”
“생방되면 어차피 가고 싶다고 졸라도 못가. 지금은 여유 있으니까 괜찮아.”
“정말이시죠?”
“그래. 가자.”
나는 이윤기가 이끄는 제작 스태프들과 함께 편집실로 향했다.
첫 촬영의 편집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면 극의 색깔이 뚜렷하게 보인다.
지금까지 이윤기 감독은 섬세하고 잔잔한 연출을 선호했는데 아까 촬영장에서 지켜보니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자연광을 선호했던 이윤기 감독이 조명도 강하게 쓰고, 그가 선호하는 롱 테이크보다 컷을 짧게 가는 장면이 많았다.
나는 긴장해서 손에 땀이 났다.
“우선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예. 감독님.”
나는 뒷자리의 간이 의자에 앉아 감독의 손에서 펼쳐지는 마법을 지켜봤다.
이윤기는 한 컷씩 찍은 장면들을 자르고 이어 붙여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을 완성했다.
그때 기다리는 내 핸드폰으로 빈선예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표님. 대박이에요. 우리 이렌 씨 Awesome Actor Awards에 초대됐어요.]
메시지를 읽은 내 눈이 커졌다.
Awesome Actor Awards는 흔히 트리플에이라고 부르는 배우 시상식으로 한국에서는 드문 통합 시상식이다.
곧이어 빈선예에게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올해의 신인상 후보에 올라갔대요. 이건 그냥 상 맡겨 놓은 수준이에요.]
나는 빈선예가 함께 보낸 신인상 후보를 살펴봤다.
올해 특출난 신인이 없어서 그런지 서이렌의 이름이 제일 눈에 띄었다.
만약 서이렌이 못 탄다면 한바탕 뒤집힐 정도로 서이렌을 위한 상이다.
[저는 이만 드레스 고르러 갑니다. 우리 이렌 씨가 처음으로 레드카펫 밟는 건데, 레드카펫 찢어 놔야겠죠?]
메시지에서 빈선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우비를 방송한 JTV는 케이블 방송사라서 드라마 시상식을 하지 않는다.
마네킹이 11월부터 방송할 테니 잘한다면 KBC 신인상 후보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트리플에이 신인상을 놓칠 수는 없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윤기 감독이 나를 불렀다.
“원 대표. 와서 한번 봐 봐.”
“예. 감독님.”
나는 벌떡 일어나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대충 느낌만 봐 봐. 음악이 없어서 어색할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작은 모니터 화면에서 오늘 촬영한 장면이 펼쳐졌다.
배경 음악이 없어서 심심할 거라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고급스러운 대저택에서 윤서라로 분한 서이렌이 걸어 나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구도와 조명.
스타일리시하게 뽑힌 짧고 스피디한 편집까지.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순간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건 되겠는데요?”
“뭐라고?”
“감독님. 마네킹 대박 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