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41화 (42/261)

#41화. 드림팀

시어머니의 남자는 작년 최고 히트작 중의 하나다.

아침 드라마로 한정한다면 아침 드라마 역사상 최고시청률을 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윤기 감독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흥행 작가와 대본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제야 왜 이 대본이 파격적인지 알 것 같았다.

첫 작품으로 막장 드라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단 우연미가 쓴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뭔가요? 하자고 하는 PD들이 많을 텐데요?”

이윤기 감독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와 우연미 작가를 바라봤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서이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그동안 작품 선택만큼은 온전히 내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서이렌이 간절하게 이 작품을 원하고 있다.

내 배우 그리고 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그녀가 이렇게나 원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보그가 날아간 것도 다 운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문제는 어떻게 이 대본으로 드라마를 만드냐 하는 거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이윤기 감독이었다.

이윤기 감독의 감성적이고 고급스러운 연출과 우연미 작가의 막장 대본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감독님이 우연미 작가님 대본을 명품 드라마로 살려 주세요. 감독님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윤기 감독은 내 칭찬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워했다.

“원 대표.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이런 종류의 작품을 해 본 적이 없어.”

“서이렌이 주인공을 연기하고 싶어 합니다. 저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데 감독님은 어떠세요?”

“서이렌 씨가 주인공이라고?”

이윤기 감독의 시선이 서이렌에게 향했다.

서이렌은 그때까지 멀뚱멀뚱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복수심에 불타는 드라마 여주인공 윤서라로 돌변했다.

이윤기 감독은 순식간에 변한 서이렌의 아우라를 보고 흠칫 놀랐다.

“감독님.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습니다. 서지훈, 부숴 버리고 말 거예요.”

서이렌은 이미 주인공 윤서라가 되어 있었다.

이윤기는 아무 말 없이 떨리는 눈동자로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윤기 감독을 오래 봐 온 나는 그의 버릇을 잘 알고 있다.

지금 감독님의 머릿속에는 대본 속의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이윤기 감독이 그제야 눈을 깜박였다.

“결정하셨습니까?”

내 물음에 이윤기 감독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한번 해 봅시다.”

* * *

KBC 드라마국 안의 모두가 미어캣처럼 회의실을 바라보고 있다.

드라마국이 마치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떠들던 박호중 감독 일행의 시선도 회의실로 향해 있었다.

자신이 서이렌을 선택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던 박호중 감독은 막상 그녀를 실제로 보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촬영팀 대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아까 보니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랑 같이 왔던데요. 혹시 우리 모르게 이윤기 감독님이 새 작품을 준비하셨나요?”

촬영팀 대리는 오주환 조감독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오주환이 이윤기의 수제자나 다름없다는 것을 드라마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주환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 감독님이 같이 할 작가를 찾고 계신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미 작가님과 함께하시다니. 저도 놀랍네요. 서이렌 씨랑 같이 들어간 분 우연미 작가님 맞죠?”

“예. 우리 쪽이랑 미팅하느라 몇 번 얼굴 본 적 있습니다. 그때보다는 살이 많이 빠진 거 같지만 확실히 우연미 작가 맞아요.”

오주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윤기가 막장 드라마의 여왕이라는 우연미와 손을 잡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우연미는 박호중이 깐 작가가 아닌가?

그때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박호중이 입을 열었다.

“미쳤구나. 그 말도 안 되는 막장 드라마를 찍겠다고? 스타탄생 대표는 미친 거 아니냐? 서이렌 주가가 지금 하늘을 뚫고 있는데 고작 저런 막장 드라마나 시키냐고.”

박호중 감독의 말에 촬영팀 대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시어머니의 남자가 막장이지만 시청률, 화제성 다 잡았잖아요. 이번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순간 박호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리는 그제야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럼, 편성 관련해서는 감독님이 알아봐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내년 1분기에 들어갈 작품 하나 펑크 났다고 들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윤기는 우연미 작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연미는 패배의 아우라를 모두 떨쳐 내고 당당하고 밝은 그녀의 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가님. 작품 쓰시면 나한테 바로 보내 줘요. 내가 같이 봐 줄게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이윤기는 마지막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 씨. 같이 일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서이렌 일행이 드라마국을 빠져나가고 이윤기 감독이 자리로 돌아왔다.

넓은 드라마국은 키보드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고 조용했다.

책상에서 노트북을 챙긴 이윤기는 그길로 국장실로 올라갔다.

이윤기가 나가자 그제야 사람들이 놀라 외쳤다.

“이윤기 감독님 서이렌이랑 작품 해?”

“아까 그 사람 우연미 작가잖아.”

“서이렌 미친 거 아니야? 우연미 작가가 시어머니의 남자 쓴 막장 드라마 작가잖아. 서이렌이 막장 드라마에 출연한다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박호중 감독만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깐 두 사람이 같이 드라마를 해?’

* * *

서이렌이 드라마를 한다는 소식이 조금씩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기사가 떴다.

[역대급 신인 서이렌. 시어머니의 남자 우연미 작가의 신작 출연.]

사람들은 기사가 잘못 나온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이렌과 시어머니의 남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 오늘 만우절임?

- 오보 같은데. 서이렌이 시남 같은 막장을 할 리가 없잖아?

- KBC에서 일하는 지인한테 들었는데 이거 맞음. 서이렌 이 드라마 하는 거 맞대.

- 여신님이 왜 그러시지? 혹시 인간세계의 추악한 면을 보고 싶으신 건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 시어머니의 남자 무시 쩌네. 그거 역대 드라마 시청률 12위에 아침 드라마에서는 독보적으로 1위야.

└응. 그래 봤자 막장임.

기사의 영향이었을까?

내년 1분기를 바라보고 있던 드라마 제작이 앞당겨졌다.

KBC 드라마국에서는 서이렌과 우연미 작가의 조합을 반대할 리 없었다.

올해 말 수목 자리에 들어가려고 했던 작품이 캐스팅이 난항이자 그걸 빼 버리고 서이렌과 우연미 작가의 작품을 꽂아 넣은 것이다.

촬영 일정이 일사천리도 잡히자 나는 이윤기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독님. 저 원세강입니다.”

[아. 원 대표.]

평소와 달리 이윤기 감독의 목소리가 급해 보였다.

“지금 바쁘세요? 나중에 걸까요?”

[아니야. 괜찮아. 내가 보낸 일정표 보고 전화한 거지?]

“촬영이 코앞이네요. 준비는 잘돼 가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요.”

[나도 걱정하긴 했는데 문제없을 거야. 제일 중요한 대본이 다 준비됐거든. 우연미 작가가 손이 빠르더라고.]

“손이 빠르다고요?”

[대본을 빨리 써. 완성고는 아니지만 벌써 12화까지 다 썼어. 아침 드라마로 120부작까지 썼던 사람이라 그런지 미니는 껌이라고 하더군.]

나는 이윤기 감독의 목소리에서 설렘을 느꼈다.

“내용이 너무 막장은 아니고요?”

[간혹가다가 이건 아니다 싶게 급발진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랑 상의해서 수정하고 있어. 우연미 작가가 다른 작가들처럼 빡빡한 사람은 아니더라고. 의견을 제시하면 대본에 잘 반영해 줘. 토씨 하나 못 바꾸게 하는 작가들도 많잖아.]

“아무래도 대본이 자기 자식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나도 그런 작가들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암튼 우 작가는 같이 일할 맛이 나.]

오랜만에 듣는 이윤기 감독의 흥분한 목소리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스태프는 어때요? 박호중 감독이 스태프를 다 빼 간다면서요.”

[그렇지. 그게 문제지.]

어쩌다 보니 보그와 마네킹이 같은 시기에 방영하게 되었다.

보그가 월화 드라마고 수목 드라마가 마네킹이다.

보그는 벌써 촬영을 시작했는데 박호중이 어떻게 힘을 썼는지 몰라도 일 잘하는 인력을 몽땅 다 빼 가서 마네킹팀은 쓸 만한 스태프가 없었다.

[난 몰랐는데 우연미 작가나 서이렌 씨나 다 박호중 감독이랑 같이할 거였다고 소문이 났더라고.]

“그래요?”

[나만 졸지에 작가, 배우 다 빼앗아 간 나쁜 선배가 됐어.]

나는 어이없는 소문에 헛웃음이 났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는 대본도 못 받아 봤습니다. 그리고 우연미 작가님은…….”

내가 말끝을 흐리자 이윤기가 바로 답했다.

[작가 이야기는 나도 알아. 우 작가가 직접 이야기해 줬어. 그런데 너무 걱정은 말아. 주환이가 우리 쪽으로 오기로 했어.]

“오주환 조감독이요? 오 감독님은 보그 찍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박호중 감독한테 스태프 다 빼앗기는 거 안타까웠는지 국장이 주환이 빼서 주더라. 그건 진짜 다행이지.]

“박호중 감독이 화 많이 냈겠네요.”

[박 감독이 욕심이 많아. 그게 다 작품 잘되고자 하는 욕심이겠지만 잘못하면 극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스태프 막 빼 가도 되는 겁니까?”

[지영록 국장 딸이 보그에 출연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 국장이 보그를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어.]

기어이 지수연까지 출연시키는구나.

나는 LOK의 미친 것 같은 끼워팔기에 한숨이 나왔다.

[그럼, 이제 끊을게. 지금도 정신이 없다.]

“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일 층으로 내려왔다.

사무실에는 이락이 홀로 남아 인터넷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렌 님 팬들 반응은 안 좋네요.”

이락은 인터넷 반응에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드라마 대본 잘 나왔다고 하니까 방영 시작하면 그런 소리 싹 들어갈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시험 준비는 잘돼 가고 있어요?”

이락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온 이락은 지금 검정고시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이락이 잘 적응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락은 공부가 적성에 맞는다며 밤마다 참고서를 들여다봤다.

나도 공부 머리가 있어서 아는데 이락의 머리가 꽤 좋다.

이왕이면 대학까지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통화한 이윤기 감독에게 온 전화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감독님. 무슨 일 있나요?”

[원 대표. 우리 팀 다 꾸려졌어.]

“예? 이렇게 빨리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태프가 없어서 고민하셨잖습니까?”

삼십 분 전만 해도 오주환 하나 데리고 왔다고 기뻐하던 우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없던 스태프가 다 꾸려졌다는 것일까?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말씀 좀 해 주세요.”

[드라마 말고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구했어.]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요?”

[주중에 방송하는 사람 사는 세상 알지?]

사람 사는 세상은 일반인들의 실제 삶을 밀착 취재하여 제작하는 휴먼 다큐 프로그램이다.

벌써 이십 년이 된 장수 프로그램으로 시청률이 드라마 뺨을 후려갈긴다.

“다큐멘터리팀인데 드라마 스태프로 잘 찍을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 민수라고 내가 예전에 데리고 있던 촬영감독이 있는데 잠깐 다큐멘터리 쪽으로 갔다가 자기 사단 이끌고 다시 드라마국으로 왔어. 첫 복귀 드라마가 우리 마네킹이야. 민수가 그러는데 자기 스태프들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엄청 자랑하더라고.]

민수?

나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민수라면 거장이라 불리는 김창주 촬영감독의 애제자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영화판으로 가서 김창주 촬영감독과 함께 일하며 그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게 된다.

[그리고 또 있어. 민수가 아는 음악 감독도 함께할 거야. 뮤직원탑 PD인데 실용음악과 출신이래.]

“뮤직원탑 PD요?”

내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를 듯 말 듯했다.

그때 이윤기가 내 의문을 해소해 줬다.

[주용현이라고 하는데 어린데도 감각 있더라고.]

순간 내 눈이 커졌다.

주용현이라면 앞으로 제일 핫한 드라마 음악 감독이 되는 사람이다.

[다행이야. 이 정도면 드라마 제작에 차질은 없을 거 같아.]

이윤기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인 정도가 아니다.

내 예상과 달리 역대급 드림팀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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