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40화 (41/261)
  • #40화. 여왕의 부활

    “진짜로 마네킹이 주인공이라고요? 와.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요.”

    빈선예가 내 손에서 1화 대본을 빼앗아 가더니 서이렌과 함께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서이렌의 눈빛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마네킹의 시놉시스를 먼저 읽어 내려갔다.

    마네킹은 주인공 윤서라가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지며 시작된다.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살해당한 윤서라는 서서히 감기는 눈으로 지난날을 회상한다.

    제일 친한 친구라고 여겼던 대기업 상속녀 이혜성은 디자이너인 그녀의 작품을 표절하고 그녀를 회사에서 내쫓았다.

    운명의 남자라고 여겼던 약혼자 서지훈은 상속녀 이혜성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

    사랑했던 모두에게 배신당한 윤서라는 복수를 다짐했으나 그 복수는 실행되지 못했다.

    윤서라는 서지훈을 만나러 갔다가 살해당하고 이렇게 쓰레기더미에 누워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복수할 거야. 절대 용서 못 해.’

    복수를 다짐하는 윤서라는 눈을 감고, 그녀의 옆에 있는 고장 난 마네킹의 몸으로 되살아난다.

    드라마는 마네킹에 빙의해 되살아난 윤서라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약혼자를 응징하는 복수 스토리였다.

    심지어 윤서라와 러브 라인이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원수인 서지훈의 동생인 서지석이다.

    돈 때문에 결혼을 선택한 마성의 남자.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억지로 결혼하는 상속녀.

    죽음에서 돌아와 원수의 동생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여주.

    여기에 복수까지.

    키워드만으로도 드라마의 막장성이 물씬 느껴진다.

    이게 될까?

    내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빈선예와 서이렌이 1화 대본을 다 보고 2화 대본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1화 대본을 펼쳤다.

    이것이 막장의 힘인가?

    나는 대본의 속도감에 깜짝 놀랐다.

    대본이 술술 읽혔고 재미까지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4화 대본의 마지막 장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우연미를 바라봤다.

    우연미는 이미 대본을 다 본 빈선예와 서이렌과 함께 대화 중이었다.

    “작가님. 이거 너무 재미있어요.”

    “완전 술술 읽혀요. 제가 보기엔 이거 시어머니의 남자보다 더 잘될 거 같아요.”

    서이렌과 빈선예가 극찬하자 우연미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마침 뒤늦게 대본을 다 읽은 이락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이거 완전 내용은 막장인데 뒷이야기가 엄청 궁금하네요.”

    이락의 입에서 막장이란 단어가 나오자 우연미 작가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막장이죠?”

    이락은 우연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웃으며 말했다.

    “막장이긴 한데 엄청 재미있어요. 시어머니의 남자도 그래서 히트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어느 배우가 내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 하겠어요. 막장 드라마인데 말이에요.”

    “그럴 리가요?”

    “사실입니다. 제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도 시어머니의 남자에 출연한 걸 흑역사라고 여기는걸요.”

    나는 상처받은 우연미 작가의 표정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배우의 뒷담화를 직접 본 게 지금까지 영향이 있나 보다.

    그때 서이렌이 말했다.

    “저는 작가님 드라마가 하고 싶은데요.”

    놀란 나는 서이렌을 돌아봤다.

    서이렌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우연미 작가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했다.

    “진심으로요. 저는 작가님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꼭 하고 싶어요.”

    나는 서이렌과 우연미 사이에 황급히 끼어들었다.

    “서이렌 씨가 작가님의 팬이라서 그런가 보네요. 그렇죠? 이렌 씨?”

    그때 서이렌이 큰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서이렌의 눈빛에 흠칫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서이렌은 흥분한 상태로 내게 말했다.

    “대표님. 저는 이거 꼭 해야겠어요. 왜 그런지 아시겠죠?”

    설마, 나는 마네킹이니까요, 이건가?

    서이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이 작품을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엿봤다.

    순간 내 기억 속에 꼭꼭 숨겨 뒀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사막을 하고 싶다고 했던 자현이도 딱 저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었지.

    그때는 나도 확고한 소신이 있었기에 절대 사막은 안 된다고 이자현을 뜯어말렸으나 지금은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마네킹이 미래에는 없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서이렌은 나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이고 사라졌다.

    “저 이거 할 거예요. 내가 바로 마네킹이니까요.”

    * * *

    KBC 드라마 제작국에 앉아 있는 이윤기 감독은 건너편 칸막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속이 쓰렸다.

    박호중 감독과 이윤기가 애지중지 키운 스태프들이 함께 모여 작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감독님. 이거 서이렌이 일 순위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오주환 조감독은 이윤기 감독의 눈치가 보이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박호중 감독은 제작국이 떠나갈 정도로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캐스팅이야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는 거지. LOK 강하나가 주인공이야.”

    “서주희 작가님이 서운하시겠네요. 서이렌으로 꼭 캐스팅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말입니다.”

    “캐스팅이 어디 작가가 원한다고 해서 다 이뤄지나? 이것저것 얽혀서 결정되는 거지. 서주희 작가는 내가 잘 달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박호중은 핫한 신예 스타인 서이렌이 아까웠지만, 강하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여주가 아니라 실장님 역의 남주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감독님. 그럼, 남주는 LOK 김선우로 확정인 거죠?”

    “그렇지. 한류스타 잡느라고 고생깨나 했다.”

    오주환 조감독은 김선우와 강하나가 함께 캐스팅된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역시 작가를 갈아 치우길 잘한 거 같다니까. 서주희 작가가 글빨이 아주 좋더라고. 아주 섬세해. 김선우가 대본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군. 하하.”

    작가 이야기가 나오자 오주환 조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이윤기 감독과 차기작을 논의하던 서주희 작가를 박호중이 빼내 온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감독님. 우리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회의실 비었던데. 회의실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오주환 조감독의 말에 박호중이 혀를 차며 말했다.

    “뭘 그렇게 눈치를 보고 그래? 우리가 지금 작품 얘기하지, 다른 이야기 하나? 우리도 일하는 거야. 그리고 난 이상하게 회의실이 갑갑해서 싫더라. 창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꽉 막혀서 말이야.”

    박호중은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KBC 최고참 PD인 지영록이 국장으로 올라가고 현재 KBC에서 드라마 국장 바로 아래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박호중이다.

    제작국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박호중의 행동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이윤기 감독이 일어섰다.

    박호중이 나갈 생각이 없으니 자신이 나가려고 일어선 것이다.

    섬세한 성격의 이윤기 감독은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아 견디기 힘들었다.

    오주환 조감독은 이윤기가 일어서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 바로 이윤기다.

    이윤기의 처진 어깨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이윤기 감독이 나가자 박호중 감독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아무리 박호중이 시청률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도 이윤기가 십 년 전 내놓은 수많은 레전드급 드라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박호중이 보기에 이윤기의 감성은 이제 한물갔다.

    빠른 전개에 시원시원한 연출을 위주로 하는 자신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때 드라마 제작국 앞문 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박호중은 혹시 국장이라도 왔나 싶어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모여 있는 사람 중 박호중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우연미 작가?

    박호중은 우연미 작가를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좋은 글이나 쓸 것이지 왜 또 나를 찾아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연미가 비켜서자 그 뒤에 서 있던 서이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이렌이다!”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서이렌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서이렌이 여기 왜 왔지?”

    “서이렌 우리랑 드라마 하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대화를 듣던 박호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편 같은 시각, 옥상에 올라가 한숨을 삼키던 이윤기 감독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KBC 드라마 제작국의 회의실에 나와 이윤기 감독이 마주 앉아 있다.

    내 양옆에는 서이렌과 우연미 작가가 함께였다.

    옥상에서 전화를 받고 놀라서 내려온 이윤기는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줄 몰랐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직접 왔습니다.”

    내 말에 이윤기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원 대표한테 마음 상해서 안 받은 건 아니고 원 대표가 나 신경 쓸까 봐 안 받은 거야.”

    “알죠. 감독님과 제가 한두 번 일해 봤습니까? 감독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해 같은 거 안 합니다.”

    이윤기 감독은 서이렌과 우연미를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분들과 함께 왜 나를 찾아온 거야?”

    “드라마 제작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저희가 하고 싶은 대본을 찾았는데 대본만 나왔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서요.”

    “아. 그럼, 다른 제작자를 소개해 달라는 건가?”

    “아뇨. 감독님이 직접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윤기 감독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직접?”

    “예. 여기 시놉시스랑 총 4화 원고가 있습니다. 우선 읽어 보세요.”

    나는 방금 완성된 따끈따끈한 대본을 이윤기 감독 앞에 밀어 넣었다.

    이윤기는 놀라면서도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강하나가 보그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바로 어제다.

    아직 언론에 발표되지 않았지만, 강진석 팀장한테서 들은 소식이므로 확실할 거다.

    그때 중국집에서 록 실장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기분이 싸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다.

    그래서 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보그가 안 되면 하려고 했던 다음 작품을 깔끔히 버리고 마네킹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오십 퍼센트는 서이렌이 원해서고 나머지 오십 퍼센트는 대본이 재미있어서다.

    나는 그래서 오늘 이윤기 감독을 찾아온 것이다.

    우연미 작가의 작품은 방금 물에서 건진 물고기 같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며 재미를 주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부담이 된다.

    저렇게 사정없이 날뛰다가 언제 다시 물속으로 날아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걸 진중한 연출로 잡아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 머릿속에는 이윤기 감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윤기 감독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시놉시스와 대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본을 읽는 이윤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이윤기는 순식간에 대본을 읽고 덮었다.

    “이거 내용이 완전…….”

    “막장이죠?”

    내가 답을 말하자 이윤기가 놀라서 쳐다봤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안 하던 스타일이라서…….”

    이윤기 감독은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진중한 얼굴이 되었다.

    “대본이 속도감이 있어. 술술 읽히더군. 설정도 흥미롭고. 캐릭터들 간의 케미도 좋고 대사도 통통 튀는 게 매력 있어.”

    계속되는 칭찬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우연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문제는 내용이 너무 황당무계하다는 건데. 정말 인간이 아니라 마네킹이어야 하는 거야?”

    그때까지 내 옆에 앉아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서이렌이 외쳤다.

    “당연하죠. 반드시 마네킹이어야 합니다.”

    우연미가 서이렌의 발언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스토리가 어찌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하면 내용이 산으로 간다고 욕먹을 텐데. 아니 마네킹이 나오는 시점부터 바로 욕먹을 거야.”

    “우리 작가님이 원래 그런 거 전문이세요.”

    내 말을 들은 이윤기는 그제야 우연미를 돌아봤다.

    “아. 제가 작가님 성함을 못 여쭤봤네요. 저는 이윤기라고 합니다.”

    이윤기가 자신의 명함을 우연미에게 건넸다.

    우연미는 이윤기의 명함을 받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는 우연미라고 합니다.”

    “우연미 작가님? 잠깐. 우연미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이윤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연미를 떠올렸다.

    그때 우연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어머니의 남자를 집필했습니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이윤기 감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시어머니의 남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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