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9화 (40/261)

#39화. 위층 여자

긴 침묵을 깨트리고 드디어 우연미가 입을 열었다.

“이게 나를 향한 진짜 업계 평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럼, 감독님은 왜 저랑 같이 일해 보자고 손 내미신 건데요? 함량 미달의 막장 드라마 작가한테요.”

“우 작가가 그래도 싹이 보이거든. 스토리가 뻔하지 않아서 좋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또 재미는 기가 막히게 챙기거든.”

“지금 병 주고 약 주시는 건가요?”

“나나 되니까 이런 말도 해 주는 거야. 그러니까 그 말도 안 되는 복수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새로 써 보자고. 우 작가 장점은 살리되, 질 떨어트리는 막장은 버리고 말이야.”

박호중 감독은 지금 우연미 작가 작품의 장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

우연미 작가가 몇 년 동안이나 작품 활동을 못 했던 게 혹시 지금 일 때문인가?

우연미 작가는 시어머니의 남자를 대박 내고도 몇 년간 차기작을 내지 못했다.

심지어 간신히 나온 신작에서는 우연미 특유의 통통 튀는 막장의 매력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

“감독님 의견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다시 써 보죠.”

“그래. 잘 생각했어.”

“언제까지 쓸까요? 올해 안에 방송 들어가야 한다면서요?”

“아무래도 이번엔 우 작가랑 같이 못 갈 거 같아. 준비하고 있어 봐. 다음 작품에서 만나자고.”

“저랑 못 하시겠다고요?”

“지금부터 써서 언제 찍어? 준비 기간만 몇 개월이 걸릴 텐데. 아쉽지만 이번에는 말고 다음 작품에서 함께해 보자고.”

박호중 감독은 이미 이윤기 감독과 함께하기로 했던 서주희 작가를 빼앗아 갔다.

어차피 우연미랑 안 할 거였으면서 왜 저렇게 그녀의 자존심을 뭉개 놓은 걸까?

다행히 우연미 작가는 이 정도 일에 좌절하거나 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봬야겠네요. 하지만 다음 작품을 박호중 감독님과 할지는 장담할 수가 없네요.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삼류였던 글빨이 갑자기 일류가 되겠어요?”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야? 나는 이 바닥 선배로서 조언해 준거잖아.”

“감독님이 언제 제 선배가 된 건가요? 전 감독님 같은 선배 둔 적 없는데요.”

“까칠하네.”

“더는 하실 말씀 없으시죠?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무섭도록 차가워진 목소리의 우연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연미가 나가자 박호중 감독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 법인카드 들고나왔는데 밥도 못 먹고 가네. 여기는 기본이 2인 이상이라 혼자 시킬 수도 없는데. 쩝.”

박호중 감독은 아쉬움을 토로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박 대표, 나랑 같이 식사나 할까?”

박 대표는 누구지?

박 대표라는 사람이 떠오를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았다.

“우연미 작가랑은 이번에 같이 안 해. 아니지. 영원히 못 할 거야. 나는 그런 막장은 못 하겠더라고. 박 대표네 회사에서 우연미 작가 영입하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지금 우연미 기 좀 죽여 놨으니까 계약 이야기 한번 꺼내 봐. 미니시리즈 작가로는 못 써먹어도 주말 드라마 작가로는 써먹을 수 있을 거야.”

박호중 감독의 대화를 엿듣던 내 머릿속에 드디어 박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튜디오 엔진의 박주오 대표구나.

박주오가 우연미 작가를 노리고 있었어.

하긴 요즘 엔진에서 유명 작가들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뒷공작이 무시무시하군.

“나 새로 들어가는 작품? 그거 보그라고 했잖아. 작가는 서주희.”

박호중의 입에서 보그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대본 2화 나왔어. 아직 캐스팅은 이르지. 그래도 대충 생각해 놓은 사람은 있어. 작가가 원하는 배우도 나랑 마음이 맞고.”

서주희 작가가 원하는 배우는 서이렌일 거다.

그녀의 취향을 잘 알기에 확신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박호중 감독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요즘 한창 핫한 서이렌이 일 순위야. 대본 4화까지 나오면 바로 보내려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보그를 기다린 보람이 있다.

“그래. 거기서 보자고. 뭐? LOK 김경록이는 왜 또 같이 보자는 건데? 우리 둘만 만나는 거 아니었나?”

록 실장?

왜 갑자기 록 실장이 튀어나오는 걸까?

“알았어. 같이 봐. 지금 갈게.”

박주오 대표와 전화를 끊은 박호중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호중 감독까지 방에서 나가자 나는 병풍 뒤에서 나왔다.

이십 분간이나 병풍 뒤에서 서 있느라 다리가 저렸다.

밖으로 나가려던 내 머릿속에 자꾸만 록 실장이 떠올랐다.

뭔지 모르지만, 록 실장의 이름을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 * *

빈선예가 이사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빈선예와 서이렌이 함께 이사했다.

빈선예는 이전에 혼자 쓰던 오피스텔이 좁은 거 같다며 아파트로 옮겼다.

서이렌의 집을 따로 얻어 줘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다행히 빈선예가 서이렌과 계속 함께 살고 싶다고 해 줬다.

서이렌을 혼자 살게 하는 것은 나도 걱정이 된다.

나와 이락이 집들이 선물을 들고 이사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는 단 한 동밖에 없는 나홀로 아파트였다.

아파트는 언덕 위에 산을 끼고 있었는데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고 차를 타고 이에서 삼 분쯤 가야 시가지가 나온다.

빈선예는 일부러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사를 한 거다.

서울 근교에 이렇게 조용한 곳을 찾아낸 빈선예에게 박수를 보냈다.

빈선예와 서이렌은 이십 층 아파트의 십구 층으로 이사를 했다.

나와 이락이 집들이 선물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때 문이 닫히는 순간 검은 아우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왔다.

그는 타자마자 이십 층 버튼을 눌렀다.

윗집이다.

이 아파트는 한 라인에 한 집만 있어서 윗집이 분명하다.

나와 이락은 그를 피해 구석에 붙었다.

앞에 선 사람은 새카만 바지에 새카만 운동화, 새카만 후드티까지 온몸을 블랙으로 꽁꽁 싸맸다.

그때 이락이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 속의 사과가 데구루루 굴러서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검은 아우라의 그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떨어진 사과를 줍더니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락은 깜짝 놀라며 그가 건네준 사과를 받아 들었다.

그는 후드티를 눌러썼으나 얼굴이 반쯤 드러나서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우연미 작가?

패배의 아우라가 짙게 깔린 그는 다름 아닌 우연미 작가였다.

고작 일주일 사이에 사람이 이토록 망가질 수 있나?

지난주에 중국집에서 스타 PD 박호중 앞에서도 꼬박꼬박 말대꾸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던 우연미는 없었다.

그때 십구 층 문이 열리고 마중 나와 있던 빈선예와 서이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선예와 서이렌은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아우라의 우연미를 보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우연미가 서이렌을 알아보고 어깨를 들썩거린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대표님. 빨리 내려요.”

“아. 예. 그래요.”

나는 이락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문이 닫혔다.

곧이어 위층으로 올라간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렸다.

“빈 팀장님. 위층에 사람 안 산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안 사는 줄 알았어요. 밤에도 불이 꺼져 있고 사람은커녕 개미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거든요.”

“개미 지나가는 소리가 어떻게 들립니까?”

“너너. 그렇게 말끝마다 꼬투리 잡을래?”

이락이 한마디를 하자 빈선예가 이락을 쏘아봤다.

이락은 금세 풀이 죽어서 나의 뒤로 숨었다.

* * *

빈선예와 서이렌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예상보다 훌륭했다.

오래된 나홀로 아파트지만 숲 뷰라서 그런지 거실에서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사 오길 잘한 거 같아요. 여기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 은퇴하고 소일거리 하시는 노인분들이 많거든요. 사람 마주칠 일도 드물고 편하게 다닐 수 있어요.”

빈선예의 말에 서이렌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화 도중에도 방금 봤던 우연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는 박호중 감독 앞에서 떨지도 않고 말만 잘하더니만 일주일 새에 이렇게 망가지다니.

우연미가 몇 년이나 차기작을 못 낸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거실 모니터로 보니 검은 아우라를 뽐내며 누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우연미다.

빈선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섰다.

“올 사람이 없는데.”

나는 빈선예를 말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나가 볼게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놀고들 있어요.”

나는 모두를 거실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이 전실로 분리된 집이라서 안심이 됐다.

내가 문을 열자 폐인 우연미가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오셨죠?”

우연미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시죠?”

“나를 아시나요?”

“그 얼굴 보고 알았어요. 스타탄생 대표가 배우처럼 잘생긴 남자라는 소문이 작가들 사이에서 핫하거든요.”

나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뭐. 그렇게까지.”

우연미는 몸을 안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그리고 아까 엘리베이터 문 열리면서 서이렌 씨도 봤는걸요. 대한민국에서 누가 그 얼굴을 못 알아보겠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작가님. 여긴 웬일이세요?”

“제가 작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 그건.”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방송국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이 있어요.”

“방송국에는 딱 네 번밖에 안 가 봤는데 그때 보신 거예요?”

나는 당황해서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 사시나 봐요.”

“시어머니의 남자 원고료 받은 거로 얻었어요. 저한테는 집이고 작업실인 셈이죠.”

이곳이라면 작가들의 작업실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우연미가 갑자기 내 품에 종이 뭉치를 건넸다.

한쪽 팔로 문을 잡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며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우연미는 그 틈에 전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게 뭔가요?”

“제가 쓴 대본인데요. 좀 읽어 봐 주세요.”

“제가요?”

“예.”

“제가 왜요?”

나는 놀란 눈으로 우연미를 응시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지?

그때 전실의 문이 열리더니 빈선예가 얼굴을 드러냈다.

“거기 서서 뭐 하시는 거예요? 우선 들어와서 이야기해요.”

보아하니 전실 바깥에서 우리 대화를 모두 들은 것 같았다.

빈선예가 앞으로 나오더니 우연미 작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빈선예가 살갑게 웃으며 우연미에게 물었다.

“얘기 들어 보니까 시어머니의 남자 작가님 같은데 맞나요?”

시어머니의 남자 이야기가 나오자 우연미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예. 맞아요.”

“저 그 드라마 팬이에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빈선예는 나를 전실에 남겨두고 우연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 보니 이미 거실에는 서이렌, 빈선예 그리고 우연미까지 세 여자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위층에 작가님이 살고 계시는 건 꿈에도 몰랐어요.”

“이제 겨우 입봉한 작가인데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시어머니의 남자가 얼마나 대박이 났는데요. 저랑 서이렌 씨도 재미있게 봤어요.”

“정말요?”

“본방송 할 때는 못 봤는데 최근에 우리 이렌 씨가 작품 고르면서 쉬고 있거든요. 요즘 집에서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있는데 시어머니의 남자가 재방송을 하더라고요.”

그때 서이렌이 말을 보탰다.

“채널피아에서는 오전 열 시부터 2화씩, K드라마넷에서는 오후 두 시부터 5화씩, SBC 드라마 채널에서는 밤 열한 시에 1화씩 방송하고 있습니다.”

저 정도면 방송 편성표를 달달 외운 게 아닌가?

내가 놀란 만큼 우연미 작가도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역대급 신인이라 불리는 서이렌이 자신의 팬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작가님. 손에 들고 계신 그건 뭐예요? 혹시 새로 들어갈 작품인가요? 한번 봐도 돼요?”

빈선예의 말에 우연미가 흠칫 놀랐다.

시놉시스와 대본을 보여 주고 감상평을 받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지만 막상 보여 주려니 떨린 것이다.

나는 주저하는 우연미 작가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봐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우연미는 자신 없는 얼굴로 내게 원고 더미를 건넸다.

그것은 시놉시스가 스무 장에 1, 2, 3, 4화 대본이 함께 있었다.

시놉시스를 펼치자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네킹]

내 머릿속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우연미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주인공이 마네킹입니까?”

우연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사과를 먹고 있던 서이렌이 마네킹이라는 단어를 듣고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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