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8화 (39/261)

#38화. 막장의 여왕

박호중은 요즘 KBC에서 제일 잘나가는 PD 중 한 명이다.

드라마 두 편을 연달아 성공시키고 KBC에 남느냐 종편으로 이적하느냐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는 그가 차기작으로 보그를 할 거란 걸 알고 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적이다 뭐다 말이 많더니 결국 남기로 했나 봐. 대신 차기작은 본인이 모든 전권을 가지기로 했다더군. 그래서 주환이도 빼앗아 가고 여기저기서 스태프 빼앗긴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건 너무 했네요. 아무리 그래도 다른 팀 스태프까지 빼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우연미 작가를 섭외했나 봐. 그래서 신임 국장님이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어.”

“우연미라고요?”

이건 조금 놀랍다.

우연미는 시어머니의 남자라는 희대의 막장극으로 드라마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신인 작가다.

시어머니의 남자는 악질 시어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여주인공이 교통사고로 회귀하는 내용을 담은 아침 드라마다.

회귀한 주인공은 삼십 년 전, 시어머니의 첫사랑인 남자의 몸에 빙의하게 되고 자신을 괴롭힌 시어머니에게 복수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막장 드라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스피디한 전개, 시원시원한 사이다에 로맨스까지 터지면서 작년 공중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무려 아침 드라마로 말이다.

그런데 우연미가 이렇게 빨리 다음 작품을 썼었나?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는 우연미는 데뷔작 시어머니의 남자를 히트시키고 삼 년이나 공백기를 가졌다.

그 후에 나온 그녀의 차기작은 막장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시어머니의 남자 같은 신선함은 모두 사라지고 천편일률적인 그저 그런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보그가 우연미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우연미 작가랑 계약했대요?”

“우습지? 막장이라면 치를 떨던 박호중도 시청률은 무시 못 하나 봐.”

이상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그럼, 보그가 엎어진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대단하네요.”

이윤기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서이렌 씨 차기작 생각하고 있는 거 있어?”

“들어온 대본은 모두 꼼꼼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함부로 정할 수 없어서요.”

“그렇지. 데뷔를 그렇게 요란하게 했는데 아마 차기작이 잘 안 되면 여기저기서 물어뜯으려고 난리가 날 거야.”

이윤기 감독은 섣불리 나에게 작품을 함께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여우비로 확 뜨고 나서 연극과 소규모 영화를 선택한 거 보고 서이렌 씨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어. 이자현 배우랑은 다른 길을 가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사실 이자현과 서이렌을 대하는 내 마음은 똑같다.

다만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거기에 서이렌이 아무 역이나 던져 줘도 되는 완벽한 배우라는 것도 한몫하지만 말이다.

“감독님. 저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밖으로 나온 나는 근처의 비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곧바로 오주환 조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윤기 감독에게 거절의 말을 하기 전에 그의 상황이 어찌 되는 건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원 대표님. 어쩐 일이세요?]

“오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아이고. 저는 잘 지냈죠. 원 대표님이야말로 요즘 살맛 나시죠?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오주환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혹시 이윤기 감독님 준비하신다는 작품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세요?”

[아. 그거요.]

오주환의 목소리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예. 그랬었죠.”

[저 그거 안 하고 박호중 감독님 작품에 들어갈 거 같습니다.]

“이윤기 감독님도 작품 하시는 거 맞죠?”

[그게 지금 위태위태하다고 들었어요.]

“왜요? 문제가 있나요?”

[작가 문제죠. 하기로 했던 작가를 박호중 감독님이 채 갔어요.]

“박호중 감독이라고요? 박 감독님은 우연미 작가랑 하는 거 아니었나요?”

[어라?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윤기 감독님께 들었어요. 이거 비밀이었나요?”

[아. 그러시구나.]

오주환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박호중 감독님이 신중하신 분이시더라고요. 지금 작가 두 분 중에 누구로 할지 고민 중이세요.]

신중은 개뿔. 저런 건 욕심이 많은 거다.

“혹시 고민 중이라는 다른 작가님은 서주희 작가님 아닌가요?”

[어? 그것까지 아셨어요? 그것도 이윤기 감독님께 들으신 거예요?]

“아뇨. 이건 내가 따로 들어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군요. 이거 일급비밀인데 어디서 얘기가 흘러 나간 거지?]

“작가님들은 자신들이 박호중 감독의 저울에 올라간 거는 알고 계세요?”

[당연히 모르죠. 그러니까 원 대표님만 알고 계세요. 이거 소문나면 저희 팀 다 사망입니다. 박호중 감독님이 성격이 만만한 분이 아니시라서요.]

오주환은 걱정스러운지 말을 아꼈다.

이렇게 된 거구나.

아마도 우연미가 떨어져 나가고 내가 본 미래대로 서주희 작가가 보그를 쓰게 될 거다.

저쪽 방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윤기를 떠올리니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에게 조감독도 빼앗기고 작가도 빼앗긴 것이다.

이윤기는 그래서 나를 찾아왔을 거다.

서이렌이 이윤기 감독과 차기작을 함께한다는 말이 퍼지면 작가를 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이윤기가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라 해도 드라마 판은 작가 놀음이다.

작가도 정해지지 않는 작품에 함부로 서이렌을 들이밀 수는 없다.

나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뱉었다.

방 안 구석의 병풍 안쪽에 서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바깥으로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익숙한 남자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작가님 우선 앉아요.”

박호중 감독이다.

저 쇳소리 나는 저음은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순간 얼음이 돼서 그 자리에 멈췄다.

지금 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직원이 들어와 메뉴판을 건넸지만, 박호중 감독이 사양했다.

“음식은 나중에 시킬게요.”

“예. 메뉴판은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직원이 사라지자 박호중 감독이 입이 열렸다.

“어제 보내온 시놉시스랑 대본 말이에요. 그거 정말 진심으로 쓴 거 맞습니까?”

박호중은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거의 심문하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본이라는 말을 보아하니 작가인가 보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작가에게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걸까?

그제야 박호중 감독의 맞은편에 있는 작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힘이 넘쳤다.

“당연히 진심으로 쓰지 그럼 심심해서 썼겠습니까?”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장난이라뇨. 정말 열심히 준비한 거예요.”

“아. 진짜.”

박호중 감독은 뒷덜미를 부여잡더니 직원이 올려놓은 재스민차를 벌컥벌컥 마시다 사레가 들었다.

“아오. 이건 왜 이렇게 뜨거워.”

아까 바로 나갔어야 했는데.

나는 빨리 튀어 나가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리고 이윤기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이 생겨서 못 갈 거 같다고 하자 이윤기가 괜찮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럼, 내 앞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요. 나는 도저히 그 시놉시스를 이해할 수가 없어.”

“쉽게 써서 보낸 건데요.”

“그러니까 지금 앞에서 다시 설명해 보시라고요.”

박호중 감독이 재촉하자 작가가 입을 열었다.

“주인공이 친구와 약혼자한테 배신을 당해요. 그래서 복수하는 내용인데요.”

“왜 그건 빼먹는 겁니까? 복수하려고 약혼자 동생을 꼬신다면서요?”

“꼬시는 게 아니고 이용하는 건데요.”

“그런 거는 아침 드라마에나 어울리는 스토리죠. 근데 우린 아침 드라마가 아니라 미니시리즈를 찍는 겁니다.”

“기본 줄기는 복수극이에요. 클리셰는 아침이든 저녁이든 다 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주인공은 초반에 살해당하고 다른 사람에 빙의해서 복수한다? 이게 무슨 SF 드라마도 아니고.”

“그게 제 드라마의 키라고 생각했는데요.”

작가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박호중 감독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했다.

박호중 감독이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우연미다.

지금 박호중 감독을 펄쩍 뛰게 만들고 있는 작가는 우연미가 틀림없다.

안 돼. 지금 웃으면 절대 안 된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어머니의 남자도 신선한 내용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 더한 게 나타났다.

우연미는 확실히 미친 자다.

저 미친 작품에 우리 서이렌을 출연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드라마가 나오면 나도 꼭 챙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호중의 생각은 달랐다.

“우 작가. 내가 이 세계 선배니까 말해 주는 거니까 고깝게 듣지 말아요. 이런 식으로는 드라마 못 나와.”

“시어머니의 남자는 잘만 나왔는데요.”

“그거야. 아침 드라마잖아.”

“아침 드라마는 드라마에서 제외하자는 법이라도 나왔나 보죠?”

“어쩌다 아침 드라마 하나로 성공했다고 너무 자만하고 있는 거 아닌가? 세상에 어떤 미친 배우가 그걸 하려고 들겠어?”

“세상에 배우가 한두 명도 아닌데 설마 제 작품 하려는 배우가 한 명이 없겠어요? 저도 알고 있어요. 시어머니의 남자도 처음에는 다들 고사하고 그랬대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시어머니의 남자 찍은 배우들 모두 대박 났잖아요.”

사실이다. 시어머니 남자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은 그 드라마를 기점으로 대박이 나서 차기작에서는 모두 주연급으로 올라섰다.

그때 박호중 감독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그 배우들이 우 작가 작품에 출연한 걸 자랑스럽게 여길 거 같아?”

“조연에서 주연급으로 올라선 발판이 된 작품인데 왜 싫어하겠어요?”

“잘못 알았어. 그 배우들 다 우 작가 작품을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뭐라고요?”

이건 좀 치사하다.

어디서 뒷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이렇게 배우와 작가를 이간질하다니.

박호중 감독은 명성만 대단했지, 인간으로는 낙제점이다.

미래에서 본 그는 나와 지수연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그의 실체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전혀 몰랐다.

우연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 당장 전화해 보죠. 정말 내 작품을 그렇게 생각했는지 확인해 보자고요.”

우연미가 핸드폰에서 전화번호를 검색하는데 박호중이 자신의 핸드폰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전화할 필요 없어. 봐 봐.”

“이게 뭐예요?”

“보기나 하라고. 시어머니의 남자에 출연했던 김지성이랑 나눈 대화니까.”

우연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박호중이 건넨 핸드폰에는 캐스팅 때문에 만난 김지성 배우와의 대화창이 떠 있었다.

톡 대화를 읽어 내려가던 우연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병풍 뒤에 숨어 있는 나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몰라 마른침을 삼켰다.

병풍 너머로 살짝 보이는 우연미는 굳은 표정이었다.

저 말 잘하는 우연미가 벌써 일 분째 아무런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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