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광란의 콘서트
촬영을 위해 대기 중인 ‘One Year’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병원에서 탈출한 강준성뿐만 아니라 밴드 모두가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서이렌은 환자복을 입고 얼굴까지 붕대를 감아서 그녀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오늘 근로자 가요제는 진짜 가요제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우리가 세팅된 무대를 빌리기로 한 것이다.
관객들도 노래자랑을 보러 온 실제 관객이다.
‘나는 이게 무리수가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윤서혁은 실제 반응을 담을 거라고 괜찮다고 했다.
사실 우리 배우들이 다 악기와 노래를 할 줄 알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다만 일반 관객들이 참여하는 거라서 진행이 잘될지 그게 걱정이었다.
나는 서이렌의 분장을 한 번 더 체크했다.
얼굴 반을 붕대로 가렸기에 멀리서 보면 서이렌인지 모를 거다.
“자, 이제 들어오세요. 촬영 시작합니다.”
스태프의 말과 함께 ‘One Year’ 멤버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황급히 무대 밖으로 나가 객석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요제가 끝났지만, 관객들은 한 명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유명 가수가 축하 무대 한다며?”
“그렇다니까. 아까 사회자가 유명하신 분들이 무대에 오르니까 큰 박수로 호응해 달라고 했잖아.”
“아따. 가수도 보고 좋구먼.”
무대 위에서 세팅을 끝낸 ‘One Year’.
하경민이 대표로 무대 앞쪽으로 나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촬영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대로 된 라이브로 보답하겠습니다.”
하경민의 굵은 바리톤 베이스가 무대를 꽉 채웠다.
“목소리 좋네. 노래 잘하겠어.”
“근데 왜 다들 환자복이래?”
“김 씨는 요즘 텔레비전도 안 봤는가? 가수들이 별 요상한 차림을 다하고 노래만 잘 부르더만.”
“아이고. 저짝에 드럼 치는 분은 외국인 노동자구먼.”
그때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고 팜의 드럼 소리가 무대의 시작을 알렸다.
‘틱. 탁.’
강준성은 촬영이 시작하자마자 사람이 돌변했다.
쓰러질 것처럼 스탠드 마이크에 기대서 있던 그는 실수로 앞 소절을 놓쳤다.
계산된 연기였지만 이를 모르는 관객들은 가수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관객 쪽을 동시에 찍고 있는 조감독은 관객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이거구나 싶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관객들도 어느덧 몰입하기 시작했다.
[일 년에 열두 장의 편지를 써.
매번 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지만
너는 그걸 보물처럼 간직해.]
노래 가사에 이입한 관객들도 많아 보였다.
이 절이 되자 몇몇은 후렴 부분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슬픈 얼굴 하지 말아.
무심하게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해 줘.
고마워. 잘 지내.]
갑자기 떼창을 하는 분위기로 흐르자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정도로 관객들이 호응해 줄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앵콜! 앵콜!”
관객들은 앙코르를 외치며 환호했다.
진짜 관객을 상대로 촬영하는 거라서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관객 반응도 너무 좋고 촬영분도 환상이었다.
그때 감독이 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정말 잘 찍혔지만, 모두가 이렇게 원하시니 한 번 더 갈까요? 똑같은 곡을 다시 부르려는데 어떠십니까?”
감독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외쳤다.
“아따. 한 곡이면 섭섭하지.”
액션 사인이 떨어지자 윤서혁이 다시 무대 위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저 사람은 이거 끝나고 수액이라도 맞아야 쓰겠네. 계속 비틀거리네.”
사회자가 영화 촬영이라고 사전에 말했으나 관객들의 대부분은 그걸 까먹은 것인지 ‘One Year’를 진짜 초대 가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컷도 환상이었는데 두 번째는 더 좋았다.
이런 라이브 무대가 처음인 멤버들이 관객과 호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극이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힘차게 키보드를 치고 있던 서이렌이 갑자기 헤드뱅잉을 시작했다.
신이 나서 그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든 것이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싸맸던 붕대가 풀리고 그녀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윤서혁 감독은 서이렌의 붕대가 풀렸지만 그대로 촬영을 진행했고 서이렌도 개의치 않았다.
그때 관객들 사이로 서이렌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둘 생겼다.
“서이렌 아이가?”
“서이렌?”
“김 씨도 좋아하잖아. 편의점에 붙어 있는 그 아가씨.”
“뭐여? 그 인어공주 아가씨라고?”
관객들이 웅성거리더니 이내 한두 명이 일어서서 무대 앞쪽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함께 일어섰고 졸지에 무대 앞은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서이렌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침 노래가 끝났고 진행 요원들이 나와서 관객들을 제지했다.
나는 윤서혁 감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하죠? 관객들이 흥분했는데요.”
윤서혁은 누구보다 기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좋아요. 관객들의 날것의 표정까지 다 담겼어요. 첫 번째랑 두 번째를 잘 섞어서 편집하면 될 거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관객들은 여전히 무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이렌을 알아본 관객이 반, ‘One Year’의 노래에 감명받은 관객이 반이다.
윤서혁은 무대 위로 올라가 사람들을 향해 큰절을 올리며 외쳤다.
관객들이 윤서혁 감독의 인사에 보답이라도 하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 * *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서이렌의 행보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서이렌이 소규모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이 기사로 나고 팬들이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 라이징일 때는 드라마로 쐐기를 박아야 하는데. 왜 우리 이렌 님은 자꾸 마이너한 거만 하시냐.
- 연극은 대성공이었잖아. 그걸로 아이돌 이미지도 벗었고.
- 연극까지가 딱 좋았어. 그거 끝나고 바로 차기작 들어갔어야지.
- 지금 차기작 찍고 있는데?
- 그런 작은 영화 말고. 영화를 찍으려면 천만 영화를 찍어야지.
- 천만 영화 대본이 그렇게 쉽게 구해지겠냐?
- 근데 서이렌 회사 말이야. 사실상 일인 기획사나 다름이 없잖아. 설마 힘이 없는 건 아닐까?
- 회사가 힘이 없어도 서이렌 정도 인기인데 캐스팅은 잘될 거 같은데?
- 그건 또 모르는 거다. 서이렌 정도면 견제도 장난 아닐걸.
서이렌의 팬들은 이런저런 걱정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때 사이트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이락이 글을 남겼다.
- 서이렌 차기작은 드라마임. 그거 기다리는 사이에 좋은 대본 발견해서 영화 찍는 거니까 마음 놓으셔.
- 계자임?
- 이거 성지 글인가?
- 인증 없으면 구씹이지.
- 인증 까 봐.
이락은 불같이 달리는 댓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인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것들아. 내가 이렌 님 로드 매니저라고 확성기 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다고.”
그때 모니터링 중인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글이 이락의 눈에 들어왔다.
[서이렌 영화 촬영 사진]
게시글에는 견습 수녀 안젤라부터 환자복을 입고 무대에서 키보드를 치는 서이렌의 사진이 수십 장 올라와 있었다.
이락은 깜짝 놀라 두 눈이 커졌다.
지난날 촬영장에 놀러 왔던 김승준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이락은 당장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촬영장 사진 풀렸어요. 그거 아세요?”
[아. 그거 내가 푼 거예요.]
“대표님이요?”
[예. 홍보용으로 좋을 거 같아서요.]
“아. 그런 거였구나.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촬영상 사진이 유출된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락 군한테 말한다는 걸 깜박했어요.]
“아닙니다. 저는 지금 당장 사진 퍼 나를게요. 사진 퀄리티 예술인데요.”
[김승준 포토그래퍼가 진짜 은인이에요. 이런 일에도 마다하지 않고 도우러 와 주시고, 말입니다.]
“그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빈 팀장님이 그러시는데 ‘그날 밤’ 초대권으로 이미 십 년 치 부려 먹을 명분이 생겼대요.”
[하하하. 그런가요? 아. 락 군. 저는 이제 주차해야 해서요. 전화 끊을게요. 내일 회사에서 봐요.]
“예.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이락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확인했다.
수녀복부터 시작해서 환자복을 입은 서이렌까지.
다양한 서이렌의 모습에 사람들은 흥분해서 주접을 쏟아 내고 있었다.
- 수녀복? 지금 서이렌 수녀복 입은 거냐?
- 서이렌이 찍는 영화 제목이 뭐라고 했지?
- 287일.
- 반드시 보러 간다. 이거 아이맥스에서 상영 안 하기만 해 봐. 다 부숴 버릴 거야.
- 이분들 방금까지 서이렌이 드라마 안 한다고 하소연하시던 분들 맞으심? 왜 그딴 소규모 영화나 하냐고 울분을 토하던 분들 맞냐고. ㅋㅋ- 우리 같은 덕후 조무래기들이 무슨 힘이 있나? 이렌 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그냥 입 닥치고 따라가야지.
- 왜 다들 수녀복 이야기만 하냐. 환자복은 안 보이냐? 심지어 붕대로 얼굴 반 가린 거. 덕후 취향을 조져 놓으심.
스틸컷만 봐도 존잼.
이락은 덕후들이 파티를 여는 것을 보며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락은 또다시 댓글을 남겼다.
- 이렌 님 신작 언제 들어가나요? 대충 몇 월인지 그거라도 알려 주세요.
- 다 알려 달라는 것도 아님. 올해 안에 들어가는 거면 점이라도 찍어 줘.
팬들의 아우성에 이락은 결심했는지 키보드로 손을 움직였다.
- .
이락이 점을 찍자 팬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 와. 진짜 올해 안에 드라마 하나 보다.
- 1년 동안 드라마 2개, 영화 1개, 연극 1개면 ㅆㅌㅊ?
- 당연하지. 사실 우리가 조금 전까지 마플달렸지만 서이렌 정도면 열일하는 거임.
- 봐도 봐도 부족함. 서이렌 부족 증후군에 걸린 거 같다고. 앞으로도 열일해 주라.
* * *
나는 오늘 KBC 방송국이 있는 여의도에 왔다.
빈선예가 혹시 KBC 드라마 하는 거냐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드라마 PD를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지만 서이렌의 차기작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방송국 근처의 유명한 중국집에서 나는 KBC의 이윤기 감독을 만났다.
이윤기 감독은 나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분이다.
내 첫 번째 배우인 심하영이 연기를 시작할 수 있던 것은 다 이윤기 감독 덕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윤조가 루머로 힘들 때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조연급으로 캐스팅하려고도 하셨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받은 나는 그곳에서 이윤기 감독을 만났다.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 팀장. 아니지. 이제 원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이름 부르셔도 됩니다.”
“그거야 원 대표가 이십 대였을 때나 그런 거지. 올해로 서른다섯 살이지?”
“아직 생일 안 지났으니 서른네 살입니다.”
“원 대표도 이제 그런 거 따질 때군. 그래 한 살이라도 어리게 살아야지.”
이윤기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껄껄 웃었다.
나이가 들면 얼굴에 살아온 세월이 묻어 나온다고 했던가?
이윤기는 저 웃는 얼굴처럼 온화한 사람이다.
연출 스타일도 섬세하고 따뜻하다.
“갑자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물었다.
물어는 보지만 사실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이윤기 감독이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윤기 감독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우선 음식이나 나오면 이야기하자고.”
“예. 그러시죠.”
곧 이윤기가 먼저 와서 주문한 코스 요리가 나왔다.
이 중국집이 고급이라서 꽤 가격이 나올 터였다.
“감독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랜만에 원 대표 만나는데 이 정도도 못 쏘겠어? 편하게 들어.”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언제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이윤기 감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차기작은 구상하셨어요? 3월에 오주환 조감독 만났을 때는 조만간 차기작 들어갈 거라고 하던데요.”
차기작 이야기가 나오자 이윤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주환이 이제 나랑 안 해.”
“예? 하지만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이 감독님과 작품 들어갈 거라고…….”
“박호중 감독한테 뺏겼어.”
나는 놀라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박호중은 내가 기다리고 있는 보그의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