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6화 (37/261)
  • #36화. 그 남자의 287일

    연극 ‘그날 밤’이 끝나고 영화 287일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연극을 성공리에 마치자 서이렌의 연예계에서의 입지가 한층 더 올라갔다.

    쌩신인이 무슨 연극이냐며 초를 치던 사람들도 서이렌의 연기 평가가 호평 일색이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287일도 슬로우 댄스가 제작 지원에 나서자 제작이 급물살을 탔고 예상보다 빠르게 촬영 준비가 끝났다.

    캐스팅도 끝났다.

    주인공 강준성 역에는 미래의 연기 신이라 불리는 하경민.

    키보디스트인 견습 수녀 안젤라 역에는 서이렌.

    고딩 베이시스트 김상구 역에는 아역 배우 출신인 김철.

    마지막으로 드럼을 맡을 철공소 직원 베트남인 후엉 역에는 팜이다.

    팜은 윤서혁이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그를 보고 직접 캐스팅하고 앉은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베트남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윤서혁 감독은 하경민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갔다.

    윤서혁 감독이 그토록 원했던 그대로 8월에 제주도에서 촬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주도 출신인 주인공 강준성은 그곳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모든 것을 정리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바로 견습 수녀 안젤라다.

    서이렌은 작품을 위해 지금 피아노 수업을 받고 있다.

    피아노 수업이 끝날 즈음해서 나는 그녀를 데리러 연습실로 향했다.

    선생님은 빈선예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추천해 줬다.

    “연습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촬영이 이제 곧이라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왜 저한테 이렌 씨를 맡기셨는지 그게 더 궁금할 지경인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생님이 웃으며 답했다.

    “이렌 씨 이미 피아노가 수준급이던데요? 악보를 못 보는 거지, 한번 들려주면 곧잘 따라 해요.”

    “그래요?”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놀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선생님이 떠나고 나는 서이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손가락을 허공에 튕기며 말했다.

    “보면 따라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말이에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허공에 대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서이렌이 못 하는 건 뭘까?

    서이렌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이제는 피아노까지 잘 친다.

    무용수 역도 시켜 보고 싶고, 가수 역도 시켜 보고 싶고 피아니스트 역도 시켜 보고 싶다.

    내 배우가 이렇게 다재다능하다는 걸 만천하에 자랑하고 싶다.

    “병원에는 정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서이렌이 웃으며 답했다.

    “상처는 다 아물었는데 병원에 꼭 가야 해요?”

    “그래도 걱정이 돼서요.”

    “혹시 남들한테 반짝거리는 내 심장을 자랑하려는 건 아니죠?”

    “그건 당연히 아니죠.”

    “그럼, 병원에 가지 말아요. 외계인이라고 납치라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서이렌은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꽤 진지했다.

    서이렌의 비밀을 누군가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그녀가 나를 떠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가 안전하기만을 바란다.

    “나 정말 괜찮아요.”

    서이렌은 말을 하면서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서이렌의 말대로 벌어졌던 가슴의 상처는 아물었고 그녀의 가슴에 박힌 보석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대표님은 그렇게 제가 걱정되나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걱정되죠.”

    “오호.”

    “지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대표님이 걱정해 주니까 좋은데요? 계속 걱정시킬래요.”

    “하.”

    이제는 이런 거로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받아 주면 안 된다.

    받아 줄수록 서이렌의 장난이 더 심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 * *

    일주일 후, 드디어 서울에서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금 서울 인근의 한 성당에 모여 있다.

    밴드에 들어가려고 서울에 올라온 강준성은 사기를 당하고 가진 돈도 다 털리고 만다.

    빈털터리에 멘탈까지 나간 강준성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인근 성당으로 발길을 돌리고 그곳에서 견습 수녀 안젤라와 만난다.

    촬영을 위해 수녀복을 입고 나타난 서이렌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서이렌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정하게 수녀복을 차려입고 나타났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은 서이렌을 보자마자 웅성대기 시작했다.

    나는 최근에는 이락에게 서이렌의 로드를 맡기고 따라다니지 않았는데 그날 이후로 서이렌이 걱정돼서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입에 털어놓고 촬영을 기다렸다.

    그때 이락이 내가 약을 먹는 모습을 보고 물어왔다.

    “대표님. 뭐 드세요?”

    “아. 이거요? 영양제요.”

    “뭡니까. 대표님 혼자만 영양제 챙겨 드시는 거예요?”

    “락 군은 어리잖아요. 난 나이가 많아서 약발로 버티는 겁니다.”

    “많긴요. 서른다섯 살이면 한창이시죠. 그리고 대표님은 절대 서른다섯 살로 안 보여요. 삼십 대 같지도 않아요. 이십 대 후반 같아요.”

    “어려 보인다니 기분은 좋네요.”

    약을 먹는 것을 숨기려고 영양제라 둘러댄 건데, 제대로 속이려면 스타탄생 식구들한테 영양제를 선물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촬영이 시작됐고, 성당 안에 서이렌이 치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와 이락은 스태프들이 깜짝 놀라는 걸 모두 지켜봤다.

    서이렌의 피아노 연주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단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서이렌 씨 피아노도 수준급이었네.”

    주인공인 강준성은 기타와 보컬이다.

    하경민은 기타는 그저 그렇지만 노래는 수준급이었다.

    알고 보니 친누나가 뮤지컬 배우고, 그도 예고에서 뮤지컬을 배웠다고 했다.

    서이렌은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잘 치고, 고딩 베이시스트 역의 김철은 아버지가 유명한 베이스 연주자라서 어릴 때부터 베이스 기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드럼 역의 팜은 길거리 버스킹하는 사람을 잡아다 왔으니 두말할 것도 없이 실력자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캐스트 모두 실력이 출중했다.

    모두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제작 기간도 예상보다 훨씬 단축됐다.

    촬영은 별문제 없이 빠르게 지나갔고 드디어 일정의 후반부에 이르렀다.

    윤서혁 감독은 영화를 시간순으로 찍었다.

    이유는 단 하나.

    주인공 하경민이 촬영을 하면서 조금씩 살을 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봐서 몰랐는데 지난달 제주도에서 촬영한 영상과 비교해 보니 하경민은 체중이 오 킬로그램 이상 빠져서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목표는 최대 팔 킬로그램까지 감량하는 거라고 했다.

    훈훈하게 잘생겼던 하경민의 외모는 살이 빠지면서 날카롭게 변했는데 그게 또 묘하게 분위기가 살았다.

    오늘 촬영은 강준성이 밴드 연습을 하다가 쓰러지는 장면을 찍는다.

    방송국에서 열리는 밴드 오디션의 오디션장에 밴드 ‘One Year’가 올라간다.

    심사위원들은 특이한 밴드명에 이유를 묻는다.

    “밴드 이름이 특이하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강준성은 동료들을 돌아보며 수줍게 말했다.

    “저희가 이유가 있어서 딱 일 년밖에 밴드를 못 합니다. 그래서 One Year입니다.”

    강준성이 말을 마치자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낸다.

    견습 수녀 안젤라가 먼저 입을 연다.

    심사위원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수줍은 성격의 안젤라 수녀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이제 곧 견습 기간이 끝납니다. 하느님을 위한 수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 밴드를 떠나야 합니다.”

    성스러운 그녀의 말에 심사위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수녀가 된다는데 여기 왜 나왔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는 내년에 고삼 올라가요. 그럼, 더는 밴드 못합니다. 엄마. 아빠한테 다리몽둥이 분질러져요.”

    심사위원들은 또다시 합죽이가 됐다.

    고삼 수험생이 된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철공소 직원인 후엉이 말한다.

    “나는 이제 돈 다 모았다. 고향 간다.”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사람을 잡을 수도 없고.

    심사위원들의 시선은 일제히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강준성에게 꽂혔다.

    강준성은 입은 웃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씁쓸했다.

    멀리서 촬영 장면을 지켜보는 내 심정도 씁쓸했다.

    이 감정은 아마도 동병상련이겠지.

    강준성은 멤버들을 한번 쓱 둘러보더니 이내 심사위원을 향해 말했다.

    “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합니다. One Year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프로젝트 밴드입니다.”

    강준성이 말을 마치자 심사위원들 모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밴드 오디션인데 고작 일 년짜리 밴드를 그것도 이제 유통 기한이 반년도 남지 않는 밴드를 누가 뽑고 싶겠는가?

    “알았으니 이제 시작해 보세요.”

    차가운 심사위원의 말을 시작으로 오디션장이 고요해졌다.

    강준성은 멤버들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탁. 탁.’

    경쾌한 드럼 소리를 시작으로 드디어 ‘One Year’의 노래 ‘Goodbye’가 오디션장에 울려 퍼졌다.

    [일 년에 열두 장의 편지를 써.

    매번 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지만

    너는 그걸 보물처럼 간직해.

    너와 내가 닮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해.

    슬픈 얼굴 하지 말아.

    이루지 못한 일들이 늘어갈수록

    너에게 터놓지 못하고 거짓으로 편지를 써.

    매번 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지만

    너는 그걸 보물처럼 간직해.

    슬픈 얼굴 하지 말아.

    무심하게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해 줘.

    고마워. 잘 지내.

    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뒤돌아봐.

    다시 만날 거야.

    안녕. 잘 지내. 고마웠어.]

    Goodbye는 하경민의 친누나인 뮤지컬배우님이 직접 작곡해 주신 곡에 윤서혁 감독이 가사를 붙였다.

    영화에 쓰기 위해 작곡가에게 의뢰하여 받은 곡이 있었으나 이 노래가 영화의 분위기와 훨씬 잘 어울린다.

    만장일치로 Goodbye가 밴드 One Year의 마지막 곡으로 정해졌고, 하경민의 누나는 정식으로 OST까지 불러 줬다.

    오랜 친구와 동료 그리고 가족과 헤어지며 나누는 마지막 인사 같은 노래는 촬영장에 모인 스태프들의 마음도 뒤흔들었다.

    하경민의 담담하지만, 무게감 있는 보컬.

    서이렌의 서정적인 키보드 선율.

    김철과 팜의 안정적인 연주까지.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심사위원들이 하나둘 몸을 앞으로 뺐다.

    이대로 One Year를 떨어뜨리기에는 그들의 공연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노래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은 결국 One Year에게 합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반년 남았다고 했나요?”

    “정확히는 삼 개월 반 남았습니다.”

    “짧군요. 뭐, 그래도 이렇게 된 거 같이 가 봅시다.”

    심사위원의 뒤에 있는 모니터에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준성과 밴드 멤버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미 촬영을 시작했고 One Year가 참여하기엔 너무 늦었다.

    병원에서도 강준석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퇴원을 반대하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강준석을 보며 멤버들은 탈출 계획을 세운다.

    병문안을 온 멤버들이 강준석에게 속삭인다.

    “형. 나갑시다.”

    “어딜 간다는 거야?”

    “노래 부르러 간다. 내가 신청했다.”

    후엉이 강준석의 손에 종이를 건네줬다.

    종이를 본 강준석의 두 눈이 커졌다.

    [시영공단 근로자 가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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