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5화 (36/261)

#35화. 천재 감독

“이렌 씨 이거 어디서 났어요?”

“이거요?”

서이렌이 287일의 시나리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사무실에 갔다가 가져온 건데요.”

“어제 사무실에 왔었어요?”

“집으로 가는 길에 락이한테 말해서 잠깐 들렸죠. 사실 대표님 못 본 지 오래돼서 놀라게 해 주려고 간 건데 안 계시더라고요.”

나는 서이렌의 손에서 287일의 시나리오를 낚아채며 말했다.

“이건 왜 가져 왔어요?”

“제 차기작 아닌가요? 산더미같이 쌓인 대본 중에 이게 제일 가운데 떡하니 있던데요?”

아. 그게 그러라고 거기 둔 게 아닌데.

내가 당황하는데 서이렌이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거 진짜 재미있어요. 주인공이 밴드 오디션 보러 다니면서 좌충우돌 사람들이랑 엮이는 얘기가 신선하고 좋아요.”

“이렌 씨 마음에 들었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봐요. 나 바보같이 보면서 울었잖아요.”

서이렌은 거울을 보며 살짝 번진 무대 화장을 확인했다.

그때 스태프가 대기실로 들어와 말했다.

“삼십 분 뒤에 무대 올라갑니다.”

“이 시나리오는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오늘 무대도 잘 부탁해요.”

“전 언제나 잘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287일의 시나리오를 들고 대기실에서 나왔다.

시나리오를 펴 보니 방금 서이렌이 흘린 눈물이 마지막 장에 묻어 있었다.

0%

그리고 그 눈물 자국 옆에 지난밤 내가 흘린 눈물로 종이가 우그러져 있었다.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니 커다란 안경을 쓴 누군가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스타탄생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 어이쿠.”

남자는 일어나다가 탁자를 쳐서 물잔을 쏟고 말았다.

“어휴. 제가 처음부터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렸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눈앞의 남자는 287일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윤서혁이다.

그에게 한번 보자고 연락한 건 어제였다.

이 작품을 할지 안 할지 잘 모르지만, 윤서혁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서혁은 스물아홉 살로 나이보다 꽤 어려 보였다.

곱슬기가 섞인 머리카락에 커다란 금테 안경까지 쓰니 약간 멍해 보였다.

그래서 더 어리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스타탄생 대표님이 맞으세요?”

“예. 제가 연락드렸던 원세강입니다.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무슨 대표님이 이렇게 잘 생기셨나 해서요. 혹시 배우 하다가 회사 차리신 거예요?”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재능이 있으시네요.”

“정말입니다. 진짜 잘생기셨어요.”

남자 둘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민망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진짜 잘생긴 건 저 사람이지.

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뇨. 시간 딱 맞추셨는데요. 배우 하경민 씨 되시죠?”

“예. 맞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경민.

나와 동갑인 서른다섯 살의 이 남자는 조만간 톱스타가 된다.

윤서혁 감독이 하경민이라는 대어를 낚아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그것보다 윤서혁, 하경민 조합인데도 영화 제작에 실패한 것이 더욱 놀라웠다.

윤서혁이 내 앞으로 커피 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런데 정말 저희 영화에 관심이 있으세요?”

“관심 있으니까 보자고 했겠죠?”

“와. 안 믿겨요. 그냥 찔러나 보자는 셈으로 시나리오 보낸 거거든요. 그것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선배님께 부탁해서 전달한 거고요.”

“나는 오히려 묻고 싶은데요. 왜 서이렌이어야 하는 거죠?”

“제가 생각한 이미지랑 딱 맞습니다. 마더 테레사.”

“예?”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걸까?

서이렌에게 온 역은 키보드를 연주할 견습 수녀 안젤라다.

내가 당황하자 윤서혁이 허둥지둥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사실 저랑 여기 있는 경민 배우님과 같이 ‘그날 밤’ 첫 상연날 봤거든요. 그때 서이렌 씨 연기하는 걸 처음 봤는데. 이거다 싶더라고요.”

“엘리자베스 역은 안젤라 수녀님과는 백만 광년은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요.”

세상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엘리자베스에게 대체 어디서 마더 테레사를 본 것일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서혁이 답했다.

“엘리자베스 연기하실 때는 저도 사실 좀 무서웠죠. 중간에 무대 위에서 관객들이랑 일대일로 눈 마주치는 부분 있잖아요. 그때 소름이 돋아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근데 마지막에 무대 위에 올라와서는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으로 인자하게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그때 느꼈습니다. 저 사람이 안젤라 수녀님이시다.”

윤서혁은 꽤 말이 많은 남자였다.

하경민은 조용히 그의 곁에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제가 하경민 배우님 팬입니다. 287일 쓰자마자 경민 배우님께 보내서 하자고 프러포즈했고요.”

윤서혁의 말에 하경민이 식겁했다.

“프러포즈라니요. 원 대표님이 오해하시겠네요.”

“정정할게요. 제가 배우님을 꼬셨죠. 이거같이 하자고.”

“아. 그것도 좀.”

“이거 저예산 영화죠? 촬영 계획 같은 게 나왔습니까?”

내가 한마디를 던지자 티격태격하던 윤서혁과 하경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거 진짜 하시게요?”

“우선 일정 좀 볼게요. 서이렌 씨가 10월부터는 다른 작품 들어갈 게 있어서 그 전에 찍을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럼요. 당연히 10월까지 찍을 수 있죠. 사실 이게 완전 저예산 영화라서요. 문체부에서 주는 지원금이랑 제가 졸업한 대학교에서 주는 지원금이랑 합치면.

아. 사실 그것도 모자라서 제 사비까지 털어서 간신히 오억 만들었거든요. 그걸로 찍으려면 일주일 안에 다 찍어야 합니다. 사실 제가 지금 이런 말 드리기도 민망한데요. 개런티를 많이 못 챙겨 드릴 거예요. 제가 돈이 없거든요.”

윤서혁은 마치 래퍼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때 하경민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서 내게 일정표를 보여 줬다.

“감독님이 흥분을 잘하세요. 이거 제가 공유해 드릴까 하는데 메일 주소 좀 알려 주실래요?”

“예. 그러죠.”

나는 내 개인 메일 주소를 하경민에게 알려 줬고 하경민은 287일의 일정표를 내게 보냈다.

촬영 시작은 물음표로 되어 있었고, 촬영 시작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끝나는 극악의 스케줄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윤서혁이 쓴 것으로 보이는 코멘트가 작게 달려 있었다.

[8월에 제주도에서 촬영하면 좋을 텐데. 날씨도 좋고, 제주도의 푸른 밤이고. 그럼, 진짜 좋겠다.]

아. 윤서혁이라는 이 인간.

진짜 본 적 없는 캐릭터다.

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일정표를 세세히 살펴봤다.

예산이 오억밖에 안 돼서 그런지 꽤 진지하고 꼼꼼하게 일정이 기록되어 있었다.

혹시나 중간에 엎어지면 어쩌나 하고 고심하고 고심하며 계획을 짠 것이 다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저예산 영화라지만 오억은 너무 적었다.

내가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일억이 최대다.

지금 투자해 놓은 다른 영화들이 있어서 빼 올 수 있는 금액이 딱 거기까지다.

아무리 저예산이라지만 삼십억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되나요?”

“밴드 멤버 중에 베트남에서 온 근로자가 있잖아요. 그분이 지금 공단에서 일하시거든요. 조만간 근로자 가요제가 열릴 거래요. 거기에 얹혀서 찍기로 했습니다.”

“근로자 가요제요?”

“시나리오도 그거에 맞게 수정했어요. 주최 측에서도 축하 무대로 쓰면 되겠다고 좋아하던데요.”

윤서혁이 말을 마치며 내게 오늘 인쇄한 따끈따끈한 시나리오를 건넸다.

수정된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나는 생각했다.

바뀐 내용이 훨씬 좋다.

원하던 무대에 서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근로자 가요제에 서는 그림이 인상 깊었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으며 미소짓자 윤서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찮나요?”

“예산이 좀 더 있으면 좋겠죠?”

“당연히 돈이야 많으면 좋죠.”

그때 내 머릿속에 돈이 많은 서이렌 덕후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덕후 찬스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저 잠시만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아. 예.”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윤서혁과 하경민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카페 밖으로 나가서 조용한 곳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한편, 카페에 남은 윤서혁은 울먹이는 눈빛으로 하경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잡으러 갈까요? 안 돌아오면 어쩌죠? 나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저 방금 질릴 것처럼 말을 많이 했나요?”

“저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얌전했는데.”

“그렇죠? 나 진짜 많이 다운시킨 거라고요.”

“하지만 사람마다 참아 줄 수 있는 한계치라는 게 있기도 하니까요.”

하경민의 말에 윤서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진짜 안 돌아오면 어떡해요? 그럼, 287일은 망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심각해요?”

“사실 학교에서 받은 투자금이 확정이 아니더라고요. 저랑 학부 내내 라이벌인 친구가 있었는데 걔랑 저랑 지금 간 보고 있대요.”

“저는 이 작품 때문에 들어오는 연극은 다 거절했습니다. 방세도 내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윤서혁과 하경민이 울상인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카페로 다시 들어오던 나는 그들의 축 처진 어깨를 보고 생각했다.

아마도 저들은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치고도 영화를 제작하는 데 실패했을 거다.

내가 서이렌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고 있듯이 그들도 서이렌을 만나고 인생이 바뀌는 걸까?

내가 다가서자 윤서혁과 하경민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원 대표님.”

윤서혁은 거의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서서 나를 반겼다.

하경민도 잘생긴 얼굴로 나를 격하게 반겼다.

“투자처가 새로 생길 거 같은데요. 그쪽이랑 상의해서 다시 일정 잡아 보면 어떨까요?”

나는 윤서혁의 앞으로 두 개의 명함을 내밀었다.

하나는 영화판에서 일하는 친한 선배 김주현의 개인 연락처였고, 나머지 하나는 태양제과 본부장 곽이석의 명함이다.

“김주현 씨는 제 선배인데 슬로우 댄스라는 영화사에서 일하세요. 사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287일 대본을 슬쩍 흘렸는데 관심 있어 하더라고요.”

“슬로우 댄스요?”

윤서혁은 놀라서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쪽에서 시나리오를 사고 싶다고 하는데 제가 그건 아닌 거 같다고 윤서혁 감독님이 감독할 거라고 이야기는 해 뒀어요. 프로덕션은 오로지 감독님 영역이고 슬로우 댄스는 제작 지원 형태로 가야 할 거라고 했는데, 자세한 건 윤서혁 감독님이 직접 담판을 지으셔야 할 겁니다.”

윤서혁은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 이건 뭐죠? 태양제과 본부장 명함은 왜요?”

“이건 투자자 명함입니다. 서이렌 씨가 광고하는 피치업을 기획하신 분인데요. 태양제과가 영화 투자에도 관심이 있어 하길래 제가 287일을 추천했더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들은 오늘 캐스팅을 하러 이 자리에 온 것인데 어쩌다 보니 제작을 지원해 줄 영화사에 투자자까지 얻었다.

나는 놀란 그들을 뒤로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좀 있으면 ‘그날 밤’ 마지막 공연이 시작하는데요. 같이 가실래요?”

“어? 뭐요?”

윤서혁과 하경민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저는 이제 ‘그날 밤’ 보러 갈 거라고요. 혹시 같이 보실래요?”

“그거 저희도 보고 싶은데 표를 못 구했어요.”

“괜찮아요. 다행히 저한테 들어온 초대권이 좀 있습니다. 같이 갑시다.”

“정말요? 그래도 됩니까?”

윤서혁은 ‘그날 밤’을 본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하경민도 놀란 얼굴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됐네요. 가서 마지막 공연보고 서이렌 씨랑 제대로 상견례도 합시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인 윤서혁과 담담한 얼굴로 계속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하경민을 데리고 극단 마루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