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눈물의 시나리오
어제와 달리 극장 안은 관객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기사를 넘기고 ‘그날 밤’을 보러 온 허대영은 관객들로 가득 찬 극장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거 서이렌 나오는 연극 맞지?”
“아까 기사 봤잖아. 확실하다고.”
“와. 내가 서이렌을 이렇게 가까이서 봐도 되는 거냐? 떨려 죽겠다.”
관객들의 대부분은 서이렌의 팬인 거 같았다.
“손님. 동영상을 찍으시면 안 됩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무대만 찍을 거라고요.”
“무대도 안 됩니다. 카메라를 꺼 주세요.”
“되게 뭐라 그러네.”
일부 관객들은 극장 안을 찍다가 헬퍼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오롯이 ‘그날 밤’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온 관객들은 극장 안의 분위기에 식겁해서 오늘 공연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걱정했다.
하지만 허대영은 편한 얼굴로 좌석에 기대앉아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무대가 오르면 다 집중하게 되어 있어.’
이윽고 무대가 암전됐다.
갑자기 불이 꺼지자 일부 관객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무대 위로 조명이 떨어지고 드디어 ‘그날 밤’이 시작했다.
* * *
표를 구하지 못해 극장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서이렌의 팬들은 새로 뜨는 기사들을 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참나. 연극 보지도 못한 기레기 새끼들이 뭔 걱정을 이렇게 많이 하냐?”
“신인은 연극 주연 맡으면 안 되냐? 왜 이러는 거야? 한조일보에서는 무대 폭풍이라고 칭찬해 줬는데.”
“한조일보 문화 섹션은 연예인 기사도 잘 안 실리는데. 웃기지도 않아.”
그때 멍한 얼굴의 관객 한 명이 줄 서 있는 팬 무리에게 물었다.
“이거 내일 표 사는 줄인가요?”
“예. 맞아요.”
그는 팬에게 답을 듣자마자 줄의 맨 끝으로 달려가서 섰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관객들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중년 사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나왔다.
모자를 쓴 중년 사내는 다름 아닌 평론가 허대영.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은데. 줄을 서 말아? 초대권은 없나? 아. 정말 고민되네.’
허대영은 결국 결정을 내리고 줄의 맨 끝으로 가서 섰다.
‘한 번만 더 보자.’
* * *
연극 ‘그날 밤’은 연일 매진 행렬 중이다.
처음에는 서이렌의 출연으로 화제에 올랐지만, 연극을 본 많은 사람이 극 자체에 대한 비평을 쏟아 내기 시작했고 이내 ‘그날 밤’뿐만 아니라 극단 마루까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표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상연일은 한 달에, 좌석은 고작 백 석.
표를 사려고 대학로에서 텐트까지 치는 기현상마저 벌어졌다.
‘그날 밤’을 더 보고 싶었던 평론가 허대영은 급기야 최후의 수단을 내놓았다.
자신이 아는 공연계 쪽 인맥을 총동원하여 극장을 빌리고 극단 마루에 접촉해 온 것이다.
김영원은 허대영 평론가의 제의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다른 극장에서 공연을 올리자는 말씀이십니까?”
“고작 한 달 상연하고 접기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하지만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닐 텐데요. 지금 갑자기 대관할 곳을 찾는 것도 그렇고, 예산도 문제고…….”
김영원은 섣불리 하자는 말을 못 했다.
애가 닳은 것은 허대영이었다.
“그럼, 그 공연장에 맞게 동선도 다 바꿔서 연습해야 하고 스태프도 더 필요합니다. 지금 마루 인원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스태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여울 측에서 준비해 준다고 합니다.”
김영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획안을 들이미는 허대영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허대영 평론가께서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팬이니까요.”
“예?”
“제가 열렬한 ‘그날 밤’의 팬입니다. 이대로 접기엔 너무 아까운 극입니다. 생각 같아선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봐 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영원은 마루의 팬 임을 자처하는 허대영을 보며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하실거죠? 그럼, 이거나 빨리 받으세요.”
허대영은 기획안을 김영원의 손에 쥐여 줬다.
김영원은 천천히 기획안을 훑었다.
예정됐던 한 달의 공연이 다음 주에 끝난다.
공연이 끝나면 새로운 엘리자베스를 영입해서 삼 주간 연습하고 한여울 아트센터에 무대를 올리는 일정이다.
조명과 무대 스태프는 극단 마루 쪽이 메인이고 한여울 아트센터의 스태프들이 서브로 붙는단다.
‘어떡하지? 다음 주를 끝으로 마루는 사라질 텐데.’
김영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김영원은 기획안을 내려놓고 허대영을 바라봤다.
허대영은 평론가가 아닌 한 명의 팬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해야죠.”
허대영은 그제야 환히 웃으며 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쏟아지는 러브 콜에 정신이 다 얼얼했다.
여우비가 끝나고 많은 대본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드라마 대본이었고, 영화 대본도 간간이 있었지만 로맨스 장르뿐이었다.
하지만 서이렌이 연극판에서 큰 이슈 몰이를 하며 성공적인 데뷔를 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거 예상치 못한 일이네.
잘하면 보그보다 더 좋은 시나리오를 찾을 수도 있겠어.
나는 대본을 산처럼 쌓아 두고 골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 읽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다행히 절반가량은 이미 알고 있는 극이었다.
나는 대본을 확인하고 곧바로 고려해 볼 작품과 거절할 작품으로 나누어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건 중간에 산타는 작품이니까 거절 쪽으로.
이건 유명한 작품이지만 연달아 연극을 하는 건 안 되니까 거절 쪽으로.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대본을 나누다 보니 고려할 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본 솎아 내기가 거의 끝나고 드디어 마지막 영화 시나리오를 손에 들었다.
[287일]
나는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제목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시나리오 앞장을 확인했다.
[시나리오 윤서혁]
윤서혁이라는 이름도 어디서 들어 본 듯했다.
나는 곧바로 시나리오를 펼치고 287일을 읽기 시작했다.
시나리오의 시작은 주인공 강준성이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287일은 그의 남은 생을 말하는 숫자였다.
아. 그거구나.
나는 그제야 287일이 뭔지 기억이 났다.
287일은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이게 원래 시나리오였다고?
그럼, 영화로 제작하려다가 잘 안되서 소설로 방향을 튼 건가?
아니나 다를까 지인을 통해 감독이 직접 보낸 시나리오였다.
아마도 저예산 영화겠지.
이 시나리오를 쓴 윤서혁도 기억이 났다.
287일이 소설로서 대박이 나고 영화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작가 본인이 직접 감독을 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을 거다.
그때 많은 이들이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며 윤서혁을 믿지 않았다.
모든 것을 떠올린 나는 진지하게 287일을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 강준성은 록 밴드 기타리스트의 꿈을 버리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시한부 선고.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일 년뿐이다.
강준성은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꿈을 찾기로 하고 밴드를 결성한다.
자칫 잘못하면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작품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밝고 경쾌한 초반 스토리는 강준성의 죽음이 다가오는 후반부로 갈수록 진지해진다.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 죽음을 미리 본 기분이랄까?
나도 모르게 왼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나이가 들어서 눈물이 많아진 걸까?
아니면 죽을 때가 돼서 눈물이 많아진 걸까?
나는 287일의 시나리오를 접고 고민했다.
고려할 작품과 거절할 작품의 어디에 287일을 두어야 할지 고민이 든 것이다.
작품성만으로 따지면 287일은 좋은 작품이다.
감독도 믿을 만하고 이야기도 베스트셀러로서 대중성은 이미 검증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걸 선택할 수는 없겠지.
나는 287일의 시나리오를 고려할 작품과 거절할 작품 사이에 두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 * * ‘그날 밤’의 마지막 상연 주가 밝아 왔다.
극장 앞에 도착해 보니 아직 상연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로 인산인해였다.
나는 이락과 함께 곧바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마침 무대 리허설을 끝낸 마루 배우들이 대기실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원 대표님 오셨어요?”
마루의 막내 정하연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뒤를 이어 강기범, 허민혜, 이진혁도 나를 보며 웃었다.
정하연이 내게 인터넷 기사를 보여 주며 말을 걸었다.
“스포츠 엔터랑 인터뷰 뜬 거 대표님도 보셨어요?”
“예. 오는 길에 봤습니다. 기사 사진 잘 나왔더라고요. 하연 씨도 너무 예쁘게 나왔고요.”
나는 깡기자에게 극단 마루 식구들도 함께 인터뷰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고 깡기자는 원래 인터뷰였던 기사를 연극 ‘그날 밤’에 대한 특별 기획 기사로 바꿔서 일주일 동안 나눠서 올렸다.
연극 ‘그날 밤’의 이모저모.
극단 마루와 배우들 각자의 역할과 인터뷰를 정성스럽게 실은 기사는 큰 호평과 함께 조회 수도 대박이 났다고 들었다.
“저는 제가 진짜로 기사에 실릴 줄 몰랐어요. 저기 있는 강기범 선배님이 분명히 이렌이 기사만 날 거라고 했거든요.”
정하연은 말을 하면서 강기범을 째려봤다.
“원래 이런 기사는 스타 위주로 나는 거야.”
“우리도 다 나왔잖아요. 인터뷰도 빠짐없이 다 실리고.”
“그래. 알아. 내가 실수했어.”
“알면 됐어요.”
정하연은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표님. 저 드라마 대본도 들어왔어요.”
“그래요? 뭐 들어왔는데요?”
“흥부네 딸들이요. 제목이 촌스럽죠? 주말극이라서 그래요.”
흥부네 딸들은 히트하는 주말 드라마다.
거기서 제일 수혜를 많이 입은 사람을 떠올려 보면 막내딸 역할이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혹시 무슨 역이에요?”
“큰 역은 아니고 막내딸이라던데요.”
“정말요? 그거 할 거예요?”
“아직 몰라요. 나를 캐스팅한다는 게 아니라 오디션 보러 오라는 거라서요. 작가님이 그날 밤을 보셨나 봐요.”
“그 작품 꼭 해요. 혹시 오디션 볼 때 필요하면 나를 부르고요. 내가 도와줄게요.”
“정말이요?”
정하연은 기뻐하다가 뒤에 있는 배우들 눈치를 살폈다.
“사실은 다른 선배님들도 영화나 드라마 러브 콜이 종종 오나 봐요. 선배님들 작품도 좀 봐 주실래요?”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내가 도울게요.”
귀를 열고 나와 정하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배우들이 내 말을 듣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루가 잘되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김영원은 결국 마루를 접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허대영 평론가의 주선으로 ‘그날 밤’을 한여울 아트센터에서 재상연할 거라고 했다.
서이렌은 빠지겠지만 마루는 이대로 끝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스타탄생을 맡길 적임자가 사라져서 안타까울 뿐이다.
그때 정하연이 소리쳤다.
“어? 이렌아. 너 왜 울어?”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쳐다봤다.
서이렌은 고개를 돌리고 휴지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서이렌이 읽고 있던 시나리오가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시나리오의 앞장을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28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