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3화 (34/261)
  • #33화. 그날 밤(2)

    허대영은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진혁이 당황하는 사이 허민혜가 끼어들었다.

    “시체에 손대지 마요.”

    “어. 어.”

    이진혁은 그제야 얼굴에서 놀란 표정을 지우고 옆으로 섰다.

    허민혜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대형 사고가 날 뻔했다.

    무대는 다시 원래의 흐름을 찾았고 물 흐르듯 진행됐다.

    허대영은 여전히 무대 한가운데 누워 있는 스물한 살의 어린 배우에게 시선을 빼앗긴 상태다.

    오늘 처음 보는 신인 배우는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엘리자베스 역을 잘 소화했다.

    최근 몇 년간 대학로에서 봤던 연극 연기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댔다.

    그때 헨리의 회상 장면이 시작되고 파티 직전 헨리가 엘리자베스의 방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허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살아 있는 시체의 연기.’

    순간 핀 조명이 헨리를 비추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조명이 밝아졌을 때 관객들은 놀라 소리쳤다.

    바닥에 누워 있던 시체 엘리자베스가 살아서 헨리의 옆에 서 있던 것이다.

    허대영 평론가는 두 사람이 내뿜는 분위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장갑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삼촌을 우리 새뮤얼의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해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 봐요.”

    베일 것같이 차가운 말투.

    엘리자베스가 살아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네가 어릴 때를 떠올려 보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니? 네가 원하는 건 바다 건너에 있는 것까지 죄다 구해 주지 않았니?”

    “문제는 삼촌이죠. 내가 원하는 걸 이제 더는 못 가져오잖아요?”

    “뭐라고?”

    “에블린호. 태풍에 휘말렸다면서요? 내 상아도 바다 한가운데 수장됐겠죠.”

    “삼촌은 지금 당장이라도 유산을 상속받을 것처럼 굴잖아요. 안 돼요. 우리 새뮤얼은 앞으로 십 년은 더 살 텐데 상속인이 새뮤얼이 빨리 죽길 바라는 건 싫어요. 가세요. 그 얼굴 보기도 싫어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엘리자베스가 뒤돌자 헨리가 소리쳤다.

    “악랄한 년! 차라리 죽어 버려.”

    관객들은 헨리의 저주를 듣고 그가 엘리자베스를 죽인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헨리를 시작으로 샬롯과의 회상 장면도 펼쳐졌다.

    샬롯 역시 엘리자베스를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그녀는 결혼 생활 동안의 불륜이 들통나 전남편에게 위자료 반환 청구 소송을 당한 상태였다.

    받은 위자료는 압류되어 한 푼도 쓸 수 없었고 당장 변호사의 수임료를 낼 형편도 아니었다.

    샬롯 역시 엘리자베스에게 상처 입고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고 뒤돌아섰다.

    관객들은 이제 헨리와 샬롯 모두를 의심하고 있다.

    루퍼트는 두 사람 모두 엘리자베스를 죽일 이유가 있다며 그들을 심문했다.

    그때 저택에 마지막 남은 고양이.

    오늘의 이 사달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인 새뮤얼이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

    바닥에 떨어진 파란 장미 향을 맡고 절명한 것이다.

    샬롯은 루퍼트의 짐에서 그의 일기장을 발견했고 그가 명문대에서 퇴학당한 사실을 알아냈다.

    순식간에 루퍼트까지 살인 용의자로 오른 상태.

    세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고 있다.

    동이 트면 엘리가 경찰을 부르러 갈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엘리를 못 가게 막는다면?

    엘리자베스의 유산은 누구에게 상속될 것인가?

    새뮤얼의 유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가진 모든 것이 마음만 먹으면 그들의 손에 들어온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문 앞에서 빗자루를 쥐고 졸고 있는 엘리에게 쏟아졌다.

    관객들은 숨죽인 채 그들의 살인 모의를 지켜봤다.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

    앞장서서 걷던 루퍼트가 갑자기 목을 움켜잡았다.

    “으. 윽.”

    “네가, 네가, 독을 썼, 지?”

    바닥에 쓰러진 헨리가 샬롯에게 일갈했다.

    샬롯은 대답을 하지도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절명했다.

    헨리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곧 눈을 감았고 루퍼트만이 마지막까지 살아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때 곤히 자고 있던 엘리가 눈을 떴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머. 왜 다들 여기에 쓰러져 계신 거죠?”

    그때 숨이 남아 있던 루퍼트가 엘리의 치맛자락을 움켜잡았다.

    엘리는 깜짝 놀라서 루퍼트를 발로 찼다.

    루퍼트는 그대로 목이 꺾인 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그러게 왜 사람을 놀라게 해요?”

    엘리는 오히려 루퍼트의 탓을 하며 세 구의 시체를 나란히 옮겨 놨다.

    그때 창문으로 빛이 들어왔다.

    엘리는 그제야 환한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동이 텄으니 이제 경찰서에 가야지.”

    집을 나서려던 엘리는 세 명이 나눠 마시던 샴페인을 보고 탁자로 몸을 옮겼다.

    잔은 깨서 보자기에 담고, 남은 샴페인은 화분에 부어 버린 엘리가 악의 없이 웃으며 말한다.

    “이 샴페인은 아가씨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건데, 이걸 마시다니. 아가씨가 항상 말씀하셨다고. 이건 한번 병을 따면 누가 보지 않도록 깨끗이 치워야 한다고 말이야.”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닫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무대 위에는 네 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다.

    관객들은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 누워 있던 엘리자베스가 조용히 일어난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시체를 보더니 이내 관객들에게 시선을 옮긴다.

    관객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는 엘리자베스.

    허대영 평론가는 이 순간을 제일 좋아한다.

    이곳에 모인 모두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저 눈빛이 좋다.

    조명이 꺼지기 직전, 화분의 꽃이 말라비틀어지며 무대가 완전히 암전된다.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넋을 놓고 어둠에 잠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가 범인인가?

    아냐. 엘리는 아가씨가 시킨 대로 한 거라고. 엘리자베스가 범인이야.

    그럼, 엘리자베스는 누가 죽였는데?

    헨리가 죽였어.

    샬롯은? 샬롯이 범인 아닐까?

    루퍼트는 잊었어?

    셋 다 죽인 거잖아. 합의하지 않는 공모자들이라고.

    관객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무대 위가 밝아졌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 올라온 다섯 명의 배우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짧은 침묵이 몇 초간 흐르고 드디어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허대영 평론가를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단 스무 명의 관객들이 보내는 찬사라고는 믿기 어려운 큰 환호성이었다.

    서이렌이 하는 연극이라서 보러 온 곽이석과 이락은 연극에 심취해 누구보다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대 인사가 끝나고 관객들이 모두 극장 안을 떠났지만, 허대영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극은 초연보다 연출이 더 능수능란해졌고 배우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서이렌이라는 배우의 연기에 감탄했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아우라를 내뿜는 그녀의 연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순간 눈을 번쩍 뜬 허대영이 일어섰다.

    글을 쓰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글로 남기고 싶다.

    허대영은 가방을 챙겨 들고 황급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 * *

    그날 밤,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대학로에서 연극 시작한 서이렌]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수많은 사람이 글을 클릭했다.

    [오늘 대학로에 연극 보러 갔는데 서이렌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유명한 연극도 아닌데 무려 주연급으로 출연하더군요. 약속 시간 남아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들어갔다가 완전 횡재했어요. 연극도 너무 재미있고 서이렌 씨도 연기를 잘하시더라고요. 너무 재미있어서 나오면서 주말 표 한 장 더 샀어요. 이번에는 친구랑 같이 보러 가려고요.]

    내용은 연극에 대한 짧은 후기였고 이내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연극이 뭔지 제목도 말 안 해 주시네요.

    - 깜박했네요. 그날 밤이라는 연극입니다.

    - 이거 루머 아닌가요? 서이렌이 연극 한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 서이렌 닮은 사람 봤겠지.

    - 서이렌 닮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서이렌같이 생긴 사람은 서이렌뿐이라고요.

    - 차기작 소식이 없으니까 별 루머가 다 올라오네요.

    - 인증도 없는 글에 속지 맙시다.

    사람들이 믿지 않자 글을 썼던 유저가 오백 원짜리 팸플릿을 찍어서 게시글에 추가했다.

    - 어라? 이거 진짜 서이렌 맞는데?

    - 진짜 연극 하나 보네.

    - 와. 신인이 겁도 없이 연극판에 뛰어들었네. 거기 연기 잘하는 사람 천지인데.

    - 서이렌도 연기 잘함. 못하는 실력은 아니지.

    - 얼마나 봤다고. 여우비에서도 후반까지는 대사도 없는 단역이었는데. 그나마 진지혜 덕 보고 분량 늘어난 거잖아.

    - 여우비 못 봤어? 마지막에 서이렌이 연기로 하드캐리했어.

    - 그래 봤자 드라마다. 드라마 연기랑 연극 연기랑 같을 거라고 생각해?

    - 지는 배우도 아니면서 연극판 부심이 끝내주네.

    - 여기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동안 팬들은 이미 대학로 달려가고 있겠다.

    - 나도 지금 차 탔다. 표 사고 올게. 너네는 실컷 싸우고 있어라.

    서이렌 팬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학로로 몰려갔다.

    이내 팬들의 인증 사진이 추가로 떴고, 인터넷은 밤새 서이렌의 연극 이야기로 달아올랐다.

    * * *

    집으로 돌아와 쉬던 나는 아까 봤던 서이렌의 연기를 떠올리며 소름이 돋았다.

    이런 말 하는 게 쑥스럽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내 배우지만 서이렌은 정말 잘한다.

    발성이 좋고, 발음이 좋고, 표정 연기가 훌륭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 보니 서이렌의 가장 큰 장점은 그녀의 몰입력과 무대 장악력이다.

    객석에서 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배우의 포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지금쯤이면 인터넷에 서이렌의 연극 이야기가 올라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검색창에 서이렌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주요 커뮤니티에서 모두 서이렌의 연극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늘 연극을 본 사람은 스무 명.

    그중에서 나와 빈선예, 곽이석, 이락을 빼면 진짜 관객은 고작 열여섯 명이다.

    본 사람이 얼마 없기에 사람들은 서이렌이 연극을 한다는 말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연기 경력이 고작 반년밖에 안 된 쌩신인이 겁도 없이 연극을 택했다고 비꼬는 글도 많았다.

    하지만 오늘 서이렌의 연기를 본 나는 확신한다.

    누구라도 서이렌의 연기를 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내 배우는 완벽하다.

    * * *

    다음 날 마루 극장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이렌이 이 연극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팬들부터 영상을 찍으러 온 관종 미튜버까지.

    오늘 표는 일찌감치 매진된 상태다.

    오늘부터는 당일표만 판매한다.

    서이렌 때문에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사전에 내린 결정이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내일 표라도 구해야겠다며 자리를 잡고 줄을 섰다.

    “서이렌 대단하네. 무슨 신인이 이렇게 인기가 많아?”

    “코어가 센 거 같더라. 거의 아이돌 팬덤 수준이잖아.”

    “하긴 서이렌이 아이돌처럼 생기긴 했지. 그런데 연기는 잘해? 연기력 다 뽀록 날 텐데.”

    구경꾼들의 이야기에 줄을 서 있던 서이렌의 팬들이 그들을 노려봤다.

    그때 서이렌의 팬 한 명이 놀라 외쳤다.

    “인터넷에 평론가 글 떴다는데?”

    “엥? 평론가? 걔 감옥 가지 않았냐?”

    “그 평론가 말고. 진짜 연극 평론가. 봐 봐. 되게 유명한 사람이래.”

    “진짜네. 한조일보에 실린 거네.”

    서이렌의 팬들은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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