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2화 (33/261)
  • #32화. 그날 밤(1)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시녀 엘리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의 한 손을 잡고 무대로 걸어 나왔다.

    무대 한가운데 선 엘리자베스에게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군림하는 자 앞에서 선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이랄까?

    엘리자베스의 주위로 세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따라왔다.

    배우들이 까만 옷을 입고 고양이 인형을 손에 끼고 연기를 하고 있었다.

    객석에서는 조명으로 인해 고양이를 움직이는 배우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헨리는 고양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거대한 저택에 고작 사람 한 명에 고양이 세 마리밖에 살지 않는다니. 볼 때마다 어이가 없군.”

    헨리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그에게 걸어왔다.

    “삼촌. 내가 주문한 상아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죠?”

    헨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항구에 도착해서도 그걸 다시 이곳으로 실어 나르려면 시간이 걸린단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삼촌이 센스가 있다면 제 생일에 맞춰서 상아를 가져다주셨겠죠. 제가 삼촌께 너무 큰 기대를 했나 보네요.”

    엘리자베스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 헨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헨리는 엘리자베스의 발언에 발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샬롯 앞에 서더니 손수건을 꺼내 들어 코를 막았다.

    “이모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닌가요? 화장도 다 번졌네요.”

    샬롯은 당황하며 들고 있던 미니 백에서 향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엘리자베스가 옆으로 비켜섰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향수를 뿌리시네요. 제가 가면 뿌리세요. 제 몸에 그 촌스러운 향이 남는 건 죽기보다 싫으니까요.”

    작년에 이혼하고 거액의 위자료를 받은 샬롯은 요즘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향수와 진한 화장으로 용케 숨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다.

    샬롯을 지나친 엘리자베스는 사촌인 루퍼트를 보고도 마치 그가 없는 사람처럼 인사도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엘리자베스가 사라지자 무대 위에 흐르던 긴장의 끈이 끊어졌다.

    관객들은 독설을 쏟아 내고 사라진 엘리자베스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년의 엘리자베스가 사치와 허영에 물든 악녀였다면 오늘의 엘리자베스는 소악마 그 자체였다.

    엘리자베스가 나가자마자 무대 위에 남은 사람들의 인상이 바로 구겨졌다.

    “배를 몇 척이나 가지고 계신 분도 엘리자베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시네요.”

    샬롯이 비꼬자 헨리가 되레 샬롯을 공격했다.

    “위자료로 받은 돈을 물 쓰듯이 쓴다고 들었네만. 그러다가 조만간 빈털터리가 될 거네.”

    “글쎄요. 배가 폭풍우에 휘말려 돌아오지 않을까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분께 그런 말을 들으니 웃기네요. 안 그러니, 루퍼트?”

    헨리와 샬롯의 유치한 대화를 듣고 있던 루퍼트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파티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저는 이만 올라가 볼게요.”

    루퍼트가 뒤돌자 헨리가 이죽거렸다.

    “버릇없는 녀석. 명문대를 다닌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엘리자베스가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해 준다는 말에 놀라서 달려온 놈이. 너나 우리나 다 똑같아.”

    “그깟 고양이의 유산이 진짜로 받고 싶으세요?”

    루퍼트는 헨리와 샬롯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깟 고양이라고? 네가 비웃는 그 고양이의 유산이 자그만치 천만 달러야. 받고 싶은 게 당연하지, 왜 숨겨?”

    “놔두세요. 동년배인 엘리자베스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괴로운 걸지도 모르죠.”

    샬롯의 한마디에 들어가던 루퍼트의 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루퍼트는 샬롯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온 암전.

    아까 첫 등장과 마찬가지로 시녀 엘리가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파티장을 꾸미는 엘리는 들고 온 와인을 식탁의 한가운데 올려놓는다.

    “헨리 님께서 선물로 주신 와인이야. 파티에서 이 와인을 제일 먼저 오픈하게 될 거야.”

    그리고 이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와인 잔을 꺼내 들었다.

    손잡이 부분에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와인 잔이었다.

    “이건 샬롯 님께서 선물로 가져오신 와인 잔. 엘리자베스 님께서 고운 손으로 이 와인 잔을 잡으시겠지.”

    마지막으로 엘리는 푸른 장미를 꺼내 들었다.

    루퍼트가 친구들과 함께 만든 푸른빛을 띠는 돌연변이 장미다.

    “이런 비현실적인 색깔이 또 있을까? 너무 아름다워.”

    엘리는 푸른 장미의 향을 맡으려고 얼굴을 가져갔다.

    그때 위층에서 엘리자베스가 엘리를 호출하는 벨 소리가 들렸다.

    엘리는 푸른 장미를 화병에 꽂고 황급히 이 층으로 사라졌다.

    무대는 다시 암전됐고 이내 불이 켜졌다.

    무대 한가운데 엘리자베스가 앉아 있고 그 주위로 헨리, 샬롯, 루퍼트가 벌을 서듯 서 있다.

    엘리자베스는 아까 엘리가 세팅해 놓고 간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제일 먼저 푸른 장미를 본 그녀는 꽃 한 송이를 뽑아 들고 향을 맡았다.

    엘리자베스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푸른 장미를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가짜 꽃이네요. 향이 없어.”

    엘리자베스의 폭언에 루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들과 오랜 시간 고생하며 만든 푸른 장미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역작을 무시하는 엘리자베스의 언사에 루퍼트는 인상을 구겼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옮겼다.

    헨리가 준비한 와인을 딴 그녀는 샬롯이 준 와인 잔을 응시했다.

    그녀는 새하얀 실크 장갑을 벗고 와인 잔을 손에 들었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넣고 음미한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잔을 바닥에 내려놨다.

    샬롯은 엘리자베스가 뭐라 말할지 궁금해하며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잔이 너무 무거워요. 보석은 몸에 있을 때 제일 아름다운 거 같아요. 쓸데없이 왜 와인 잔을 보석으로 장식해 놓은 건지. 천박해요.”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뒤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단차가 있는 의자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여왕 같았고 그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은 여왕의 노예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그때 무대 위에 초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대영 평론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시작이구나.’

    지금부터가 시작이고, 그가 이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다.

    시계 초침 소리가 무대를 잡아먹을 것같이 커지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때 오만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자베스가 일어서더니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차가운 시선으로 모든 걸 대하던 그녀에게서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이 드러났다.

    당황. 분노. 고통.

    “엘, 엘리.”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엘리, 나, 나 좀…….”

    엘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달려갔으나 그뿐이었다.

    순간 엘리자베스의 몸이 허망하게 무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쓰러지며 식탁 위를 쳤고 바닥에 와인 잔이 떨어졌다.

    ‘쨍그랑.’

    헨리와 샬롯 그리고 루퍼트는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지가 뒤틀린 엘리자베스는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내 절명했다.

    루퍼트가 그녀의 맥박을 확인했다.

    “죽었어요. 숨이 끊어졌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지라 쓰러지면서 몸을 사리게 되기 마련인데 서이렌은 정말 통나무가 된 듯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무거운 침묵이 내린 무대 위에 엘리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고양이가 죽었어요! 와인을 마시고 죽었어요.”

    엘리의 말대로 고양이 한 마리가 와인 잔 아래 엎어져 있었다.

    고양이가 와인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헨리를 향했다.

    “왜 이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샬롯이 헨리의 말에 비웃음을 흘렸다.

    “엘리자베스가 죽으면 당신이 그녀의 유산을 받게 되잖아. 고작 고양이의 유산을 탐내지 않아도 된다고.”

    “난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게 따지면 샬롯 자네도 상속인 후보가 아닌가?”

    그때 쓰러진 엘리자베스를 살펴보던 엘리가 놀라 외쳤다.

    “아가씨 손가락에 상처가 났어요.”

    엘리의 말에 놀란 헨리가 달려 나갔다.

    “무슨 상처야?”

    “여기 보세요. 손가락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요.”

    헨리는 엘리자베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보고 잠시 고민하더니 깨진 와인 잔을 주워 들었다.

    “샬롯. 이게 뭘까? 와인 잔 손잡이에 달린 보석이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을 찔렀다고.”

    “무슨 말씀이세요? 엘리는 전혀 모르겠어요.”

    “오. 엘리.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헨리는 주위를 배회하고 있던 고양이를 데려와 와인 잔 손잡이를 핥게 했다.

    와인 잔을 핥은 고양이는 헨리 손에서 도망치더니 이내 힘없이 쓰러졌다.

    헨리가 샬롯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이 손잡이에 독을 발랐어! 잔에 날카로운 보석을 심어서 상처를 내게 하고 독이 더 빨리 스며들도록 했겠지.”

    샬롯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외투를 꺼내 입고는 저택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때 루퍼트가 그녀를 막아섰다.

    “안 됩니다. 아무도 여기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습니다.”

    “네가 뭔데 나를 막는 거야?”

    “경찰이 올 때까지 아무도 나갈 수 없습니다. 엘리. 네가 가서 경찰을 불러와.”

    “너무 어두워요. 들짐승들이 두려워서 못 가요.”

    엘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사정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동이 트면 바로 떠나. 알겠지?”

    “예. 그럴게요.”

    루퍼트는 다시 헨리와 샬롯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모두 아무 데도 못 갑니다. 경찰이 올 때까지 같이 있어요.”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겠다는 건데?”

    “동이 틀 때까지.”

    루퍼트의 말이 끝나자 다시 무대가 암전됐다.

    엘리자베스가 죽고 상황이 급박하게 흐르자 관객들은 긴장하며 극에 몰입했다.

    루퍼트는 그들이 엘리자베스의 시체를 못 건드리도록 막아섰다.

    시체가 무대 한가운데 누워 있는 상황에서 헨리와 샬롯은 자신의 무죄를 말하며 열변을 토했고, 루퍼트는 마치 재판장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의 발언에 하나하나 이유를 들어 기각했다.

    ‘그날 밤’을 처음 보는 이락과 곽이석은 처음에는 무대 위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서이렌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느새 연극에 몰입해 서이렌을 보고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허대영 평론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서이렌만 바라보고 있었다.

    허대영 평론가는 무대 위의 시체가 인형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암전되는 사이에 엘리자베스도 인형으로 바꿔치기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미동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허대영은 갑자기 김이 팍 샜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위에 쓰러져 있는 배우를 지켜보는 것이 ‘그날 밤’의 중요한 매력이라고 생각한 그였기에 연출이 달라진 것이 아쉬웠다.

    그때 샬롯과 실랑이를 벌이던 헨리가 뒷걸음질 치다 엘리자베스의 팔을 밟고 지나갔다.

    ‘설마? 진짜 사람인가? 허. 말도 안 돼. 저렇게 세게 밟혔는데 그걸 참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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