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1화 (32/261)

#31화. 진짜 평론가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이것 때문에요?”

서이렌은 자신의 심장을 두 손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내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들킬 텐데요.”

“하지만 가슴에 그렇게 상처가 났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뚫어지게 보시는 거 아닌가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우선 블라우스 단추나 잠그세요.”

아까는 서이렌이 깨지 않아 놀라서 심장이 뛰더니 지금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나는 터질 것 같은 내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했다.

“나랑 사귀어요.”

“예?”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이야긴 이제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생명의 은인인데 그것도 못 들어줘요?”

“지금 그런 뜻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목숨 바쳐 구해 줬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김영원이 객석으로 걸어 들어왔다.

바로 회식 장소로 간다던 그가 극단에 서류를 두고 가려고 잠시 들른 것이다.

김영원을 보니 지금, 이 순간 구세주를 만난 것 같다.

김영원은 무대 한복판에 떨어진 조명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세강아, 대체 무슨 일이야? 서이렌 씨, 다친 곳은 없어요?”

김영원은 서이렌이 무사한지 먼저 확인했다.

서이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전 괜찮은데 무대가 걱정이네요. 이거 다음 주 공연 전까지 고칠 수 있을까요?”

“고쳐야죠. 그런데 조명이 왜 갑자기 떨어진 거지? 설마 옆의 철거 현장 때문인가?”

김영원은 지난 몇 주 동안 극단 마루 옆 건물의 철거 때문에 가끔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흔들리던 것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이렌과 김영원의 옆으로 갔다.

서이렌은 아까 심장이 멈췄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렌 씨, 정말 다친 곳은 없죠? 놀라진 않았어요?”

“전 괜찮아요. 우리 대표님이 조금 놀라셨을 겁니다.”

서이렌의 말에 김영원의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돌아봤다.

“야, 세강아. 너 다쳤어?”

“아닙니다. 보다시피 전 괜찮아요. 서이렌 씨가 구해 줬거든요.”

“이렌 씨가 구해 줘?”

“제가 딱 저기 조명이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거든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김영원은 대경실색해서 내 몸을 훑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고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서이렌 씨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 아래 깔려 있을 겁니다.”

“야. 매니저인데 네가 배우를 지켜야지. 배우가 너를 지키게 하니? 이게 대표가 됐다고 막 나가네.”

“그런 거 아닌 거 아시잖아요. 우선 이거나 먼저 해결해요. 당장 내일부터 무대 리허설 할 텐데 이거 어쩔 겁니까?”

“사람 불러야지. 별수 있나? 그나저나 조명이 큰일이네.”

“조명은 제가 아는 분이 있으니까 어쩌면 좋을지 상의해 볼게요. 보니까 고치면 쓸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옆의 건물은 대체 철거를 얼마나 오래 하는 거야? 저 흉측한 비계도 빨리 치워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때 김영원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들어왔다.

“응. 진혁이니? 나 지금 극단이야. ……알았어. 먼저 먹고들 있어. 난 여기서 뭐 좀 처리하고 갈게.”

전화를 끊은 김영원은 나와 서이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너희는 빨리 회식이나 가.”

“저도 남아서 도울게요.”

내가 나서자 김영원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세강아, 너 매니저라고. 배우 혼자 회식 장소에 보낼래? 이게 아주 대표 됐다고 사람이 변했어.”

“그런 거 아닙니다.”

“빨리 서이렌 씨 데리고 가.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나와 서이렌은 김영원에게 쫓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김영원의 말대로 철거 중인 건물을 가리고 있는 흉측하게 생긴 비계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병원에 가 봅시다.”

“안 될 텐데요.”

“그래도 한번 가 봐요.”

“그럼, ‘그날 밤’ 끝나면 생각해 봐요. 조용히 있으면 벌어졌던 상처도 깨끗해지거든요.”

“그거 정말이죠?”

“그럼요.”

“나중에 확인해 볼 겁니다.”

“또 제 가슴을 보시려고요?”

순간 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밤이라 다행이지 누가 볼까 두렵다.

“미안해요. 난 정말 서이렌 씨가 걱정돼서 나도 모르게 그런 겁니다. 진심으로 사죄할게요.”

나는 차마 그녀를 쳐다볼 용기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진지해서 놀려 먹지도 못하겠네.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요.”

* * *

드디어 연극 ‘그날 밤’의 공연 날이 밝아 왔다.

빈선예는 자신에게 할당된 초대권 한 장을 친구에게 보냈고 지금 대학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정장을 차려입은 곽이석이 나타났다.

“넌 무슨 선 보러 가니? 왜 이렇게 힘주고 왔어?”

“이게 평상시 내 모습인데?”

“웃기지 마. 네가 입는 정장이랑 와이셔츠도 다 내가 골라 준 거잖아. 심지어 이거는 내가 진짜 예쁘니까 꼭 사야 한다고 집어 준 건데.”

“하하. 이게 그거였구나. 어쩐지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더라고.”

“누가 덕후 아니랄까 봐. 최애 만나러 간다고 꽃단장하고 나타나셨어.”

빈선예가 놀리자 곽이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극장에 가 보니 근처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마루의 기존 팬 몇 명과 대학로 거리를 거닐다 포스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찾아온 관객이 열 명 남짓이다.

곽이석은 빈선예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오늘 이후로 서이렌 씨가 출연한다는 거 소문 다 나겠지?”

“당연하지. 바로 난리가 날걸.”

“나 너무 떨린다. 내가 이렌 님의 첫 연극을 그것도 첫날 관람하다니.”

“이 연극 이제 표 구하기 어려울 거야. 넌 진짜 친구 잘 만난 거다.”

“고맙게 생각한다. 빈선예 너는 내 인생의 구세주라고.”

“알면 됐어.”

곽이석이 팬심을 표출하며 흥분하는데, 검정 모자를 깊게 눌러쓴 중년 사내가 곽이석의 어깨를 톡톡 쳤다.

“거기 좀 비켜 줍시다.”

“아. 죄송합니다.”

곽이석이 자리를 비키자 중년 사내가 매표소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한 장이요.”

매표소 직원이 표를 건네자 중년 사내는 조용히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들어가자. 락이도 우리 옆자리야.”

“1호팬 님이 옆자리구나. 좋다 좋아.”

“어이구. 이 덕후들아.”

빈선예는 촐랑대는 곽이석을 데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문화지 객원 기자이자 연극 평론가인 허대영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허대영은 핸드폰 전원을 끄려다 말고 매표소 앞에서 떠들고 있던 빈선예와 곽이석의 대화를 떠올렸다.

허대영은 인터넷에 접속해서 서이렌의 이름을 쳤다.

그러자 역대급 신인 배우, 인어공주, 미의 화신 등의 낯간지러운 기사가 줄줄이 떴다.

허대영은 기사 사진 퀄리티라고는 믿기 어려운 서이렌의 사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밤에 이렇게 대단한 미인이 나올 역이 있던가?’

놀란 허대영은 표를 살 때 함께 구매했던 팸플릿을 펼쳐 들었다.

코팅이 안 된 종이로 컬러 인쇄한 단돈 오백 원짜리 팸플릿이었다.

허대영은 그 안에서 서이렌이라는 이름을 바로 찾아냈다.

‘데뷔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신인한테 엘리자베스 역을 줬다고?’

허대영은 작년에 우연히 이 연극을 본 뒤로 단숨에 극단 마루의 팬이 됐다.

그날 이후로 마루의 모든 연극을 찾아봤고 그가 사비로 운영하는 인터넷 웹진에 종종 마루의 기사도 실었다.

하지만 마이너한 연극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의 노력이 무심하게도 마루는 이 연극을 끝으로 없어진다고 했다.

‘아무리 마지막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둔다고? 스타까지 영입해서?’

마침 극장 안으로 들어온 관객들도 팸플릿을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야? 여기에 서이렌 나와?”

“서이렌? 그게 누군데?”

“피치업. 인어공주 몰라?”

“뭐라고? 인어공주가 나온다고? 어디에?”

“여기 봐 봐. 엘리자베스 역이 서이렌이래.”

“동명이인 아닐까? 엘리자베스면 제일 중요한 역이잖아. 주인공이라고.”

“서이렌 같은 이름이 흔하니? 서이렌 맞는 거 같아.”

“대박. 팬들은 모르나? 왜 표가 이렇게 안 팔렸지?”

관객들이 웅성대는 와중 드디어 불이 꺼졌다.

허대영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아끼는 연극이 인기를 얻고자 세태와 야합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론에 알리지 않고 무대에 선 것도 이슈 몰이 하려고 판을 짠 것이겠지. 신인 배우의 무대 도전. 이 얼마나 언론과 대중이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겠어.’

허대영은 개인적으로 공연 웹진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한조일보 문화 섹션의 객원 기자를 역임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바닥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다.

언론 플레이로 배우의 연기력도 만들어 내고 인기도 만들어 내는 곳이 연예계다.

허대영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그날 밤’에 대한 기대를 놓은 그때, 무대 뒤에서는 마루 식구들이 모여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서이렌의 양옆에 이진혁, 허민혜, 강기범 그리고 정하연이 서 있다.

지난 십 년간 쉬지 않고 무대를 올렸으나 오늘만큼은 기분이 남달랐다.

지난 십 년간의 여정을 끝으로 마루는 사라진다.

씁쓸하고 슬프지만, 뭔가 보여 주고 퇴장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김영원의 눈빛을 읽은 마루 식구들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지난 십 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결과를 보여 주러 갑시다.”

* * *

객석으로 온 나는 내 자리를 찾았다.

내 옆자리에는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는 암전이 되자 곧바로 핸드폰 전원을 끄고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고이 올려 뒀다.

뭔가 오랫동안 연극을 보고 다닌 베테랑 관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잊지 않고 핸드폰 전원을 끄고 무대 위를 바라봤다.

암전된 극장 안에 빛이 비치는 곳은 이제 무대뿐이다.

무대 위로 은은한 노란빛의 조명이 비추는 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눈을 뜨자 김영원이 보였다.

김영원은 객석을 채운 관객들을 보며 관람 예절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보통 극단의 막내가 하기 마련인데 김영원은 이번엔 자기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관람 예절에 대한 설명을 마친 김영원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희는 이 작품으로 떠나지만, 그동안 마루에서 꽃피운 열정은 계속 무대 위에 남아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원이 말을 마치자 마루의 오랜 팬이던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나도 박수를 치며 김영원과 극단 마루의 마지막을 응원했다.

김영원이 내려가고 드디어 ‘그날 밤’이 시작됐다.

* * *

시녀 엘리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그녀는 어딘가 약간 모자란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바쁘다. 너무 바빠. 오늘 아가씨 생일이야. 손님이 많이 오실 거야. 엘리는 너무 바빠.”

엘리는 무대 위 여기저기 비질을 하고 가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 댔다.

그때 벨이 울렸다.

엘리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무대 안쪽에 내던지고 문으로 달려 나갔다.

엘리자베스의 삼촌인 헨리가 그의 무거운 가죽 외투를 엘리에게 던지고 무대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뒤이어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이모 샬롯이 두꺼운 모피를 엘리에게 건네며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루퍼트가 들어와 엘리에게 그의 긴 모자를 건넸다.

한 손으로 모피와 모자, 외투를 든 엘리는 당황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그것을 빗자루를 버렸던 무대 안쪽으로 내던져 버리고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엘리의 행동에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이 층 계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나무 바닥을 걸어오는 구두 소리에 관객들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자로 잰 듯한 앞머리.

까맣고 긴 머리카락.

그녀의 편집증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새하얀 드레스에 집 안에서도 끼고 있는 실크 장갑까지.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친척들을 무시하고 조용히 관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저 아우라.

역시 서이렌이다.

내가 서이렌의 연기에 감탄하고 있는 그때, 좌석에 허물어져 있던 허대영 평론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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