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0화 (31/261)
  • #30화. 서이렌의 심장

    서이렌이 맡은 역은 열여덟 살의 엘리자베스.

    사치와 허영 그리고 오만을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그게 바로 엘리자베스일 것이다.

    서이렌은 눈빛과 표정부터 달라져서 눈앞에 있는 삼촌 헨리를 노려봤다.

    헨리 역의 이진혁은 서이렌의 눈빛을 받고 침을 꿀꺽 삼켰다.

    선주인 헨리는 탐욕스러운 자로 엘리자베스의 유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역이다.

    뒤에서 이들의 연기를 보는 나는 심장이 떨려옴을 느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멀리 있는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어젯밤 나는 서이렌의 집으로 ‘그날 밤’의 대본을 가져다줬다.

    대본을 본 서이렌은 엘리자베스 역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서이렌은 대본을 보고 오래된 영화를 찾았다.

    진설이 찍은 ‘광란의 밤’.

    VOD를 재생하자 마침 스물여덟 살이던 진설의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 연기를 모티브로 삼을 건데 어떤가요?”

    영화 속의 진설은 지금 서이렌이 맡은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상속녀로 나온다.

    영화 속의 다가설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 진설의 연기를 레퍼런스로 삼은 서이렌은 대본 연습을 들었다 놨다 했다.

    헨리 이진혁이 들어가고 이제는 허민혜가 나왔다.

    허민혜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엘리자베스의 이모, 샬롯 역이다.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처럼 절망에 빠지길 바라는 여자다.

    허민혜는 냉소적인 톤으로 서이렌과 대사를 주고받았다.

    이진혁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의심쩍은 눈빛으로 지켜보던 마루 식구들도 어느새 관객이 되어 두 배우의 연기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허민혜가 떠나고 이제는 사촌인 루퍼트 역의 강기범이 서이렌의 눈앞에 섰다.

    루퍼트는 명문대생이나 부유하지 않는 집안 때문에 힘들게 살아서 상속녀인 그녀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똘똘 뭉친 역이다.

    루퍼트를 맡은 강기범은 아직 어린 스물다섯 살로 서이렌의 연기를 받아 낼 실력이 안 됐다.

    조금 전의 이진혁과 허민혜에 비해 격돌하는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았다.

    강기범 본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이미 다 외운 대본의 대사를 까먹고 중간에 다시 대사를 치기도 했다.

    강기범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자리로 들어가고 드디어 엘리 역을 맡은 정하연이 들어왔다.

    엘리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엘리자베스의 곁을 지키는 시녀 역이다.

    그녀의 이름도 엘리자베스이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엘리로 불리고 있다.

    굽은 어깨에 주눅이 든 정하연의 연기가 꽤 인상 깊었다.

    극단 마루의 막내라고 들었는데 연기에 감이 있는 것 같았다.

    모든 등장인물이 한 번씩 돌아가며 엘리자베스와의 대면을 끝냈다.

    엘리자베스와 대화를 나눈 모두가 그녀로 인해 모멸감을 느꼈다.

    그때 김영원 단장이 지문을 읽었다.

    “자, 이제 천둥이 치고 엘리자베스가 쓰러집니다.”

    김영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이렌이 맨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마루 식구들은 연습인 만큼 서이렌이 시체 연기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이 상황에 놀라 당황했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서이렌이 제일 좋아하는 신이다.

    시체 역을 제일 하고 싶다고 했지.

    서이렌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사이로 대본 연습은 이어졌고 드디어 ‘그날 밤’의 첫 번째 연습이 끝났다.

    * * *

    마지막까지 남아서 소품을 정리하던 정하연의 곁으로 강기범이 다가왔다.

    강기범은 어깨가 축 늘어져서 정하연에게 말했다.

    “와. 서이렌 씨 연기 너무 잘하더라.”

    “내가 그래서 여우비 보라고 했잖아요. 선배. 얼굴은 여신에 연기도 잘한다니까요.”

    “나만 제일 못해. 어떡하지?”

    강기범은 아까 연습에서 서이렌의 아우라에 짓눌려 대사를 씹었던 것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연습해야죠. 연습만이 살길입니다.”

    그때였다. 지하 연습실을 뒤흔드는 큰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귀를 막은 정하연이 곧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건물을 부수려면 좀 살살 부수지. 진짜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그러게 말이다. 저거 이번 달에 다 철거하는 거지? 다음 달에 공연할 때까지 저러면 안 되는데. 무대에 올랐는데 저런 소리 들리면 어쩔 거야.”

    “철거는 포크레인이 열심히 할 거니까 선배님이랑 나는 연습이나 합시다. 연습만이 살길이라고요.”

    “알았어. 그만 좀 압박해.”

    정하연과 강기범은 ‘그날 밤’에서 사용할 소품을 정리하고 밤이 늦어서야 마루에서 나왔다.

    * * *

    어느덧 공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서이렌은 공연 연습을 하느라 바빴고 나는 스타탄생의 이름으로 영화에 투자하느라 바빴다.

    내가 사라져도 스타탄생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으면 했다.

    사실 내게 시간만 좀 더 있다면 직접 제작까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삼 년 동안 서이렌도 키워 내고 제작까지 하는 건 무리수겠지.

    나는 결국 제작에 대한 열망은 잠시 접고 흥행할 영화에 투자만 하기로 했다.

    공연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이락과 함께 회식을 쏘기 위해 마루에 찾아갔다.

    대학로에 들어서자 여기저기 연극 ‘그날 밤’의 포스터가 보였다.

    그런데 포스터에 서이렌의 이름이 없다.

    김영원은 다 같이 상의해서 서이렌의 출연을 홍보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마지막으로 올리는 작품이고 스타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마루의 기존 팬들이 소외당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결정은 나도 찬성했다.

    어차피 연극이 시작되면 알려질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아무 소란 없이 지나가는 게 좋았다.

    나와 이락이 간식이 가득 찬 박스를 들고 마루로 들어가자 마침 연습을 마치고 쉬고 있던 배우들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와. 이게 뭡니까?”

    “간식에 음료수에 자양강장제까지. 지난번에 보내 주신 것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마루 식구들은 기뻐하며 나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동안 서이렌은 마루 식구들과 친해져 가족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서이렌이 내게 다가오더니, 한마디를 건넸다.

    “맨날 락이만 보내시더니. 언제 오시나 했어요.”

    “미안해요. 오늘은 미안해서 같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서이렌의 얼굴을 보는 거라 그런지 기분이 남달랐다.

    “됐어요. 빈 팀장님께 들어 보니 그동안 저 못지않게 바쁘셨다면서요?”

    “빈 팀장님이 그런 것도 얘기해 주나 보네요.”

    “당연하죠. 난 대표님이 무슨 옷을 입는지, 뭘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궁금하거든요.”

    서이렌에게 저런 말을 들어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옷은 보다시피 회색 정장이고, 밥은 이제 같이 먹을 거고, 머릿속에는 온통 스타탄생 생각밖에 없습니다. 궁금해해도 별거 없어요.”

    나도 점점 뻔뻔해지는 거 같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서이렌의 말을 받아치고 이락에게 갔다.

    “대표님. 김영원 단장님은 우리가 예약한 식당으로 바로 가신대요.”

    나는 극단 마루 식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회식인 거 아시죠?”

    “예? 오늘 회식이라고요?”

    마루 식구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눈이 똥그래졌다.

    “단장님이 바빠서 깜박하셨나 보네요. 오늘 우미린에서 회식합니다. 예약 시간 다가오니까 빨리 챙겨서 나갑시다.”

    “우미린이요? 거기 한우 전문점이잖아요.”

    “대박. 한우 회식이래.”

    마루 식구들은 한우를 먹는다는 말에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누구라고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 식구들은 입고 있던 의상을 정리하고 회식 갈 준비를 마쳤다.

    배우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다.

    서이렌은 오늘 의상과 헤어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상태라서 정리할 게 많았다.

    나는 일찍 옷을 갈아입고 나온 마루 식구들을 이락과 먼저 회식 장소로 보내고 서이렌이 분장을 지울 때까지 기다렸다.

    백 석 남짓의 소극장에는 이미 다음 주에 시작할 ‘그날 밤’의 세트가 완벽히 꾸며져 있었다.

    나는 서이렌을 기다리다가 잠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날 밤’은 엘리자베스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하룻밤의 사건이다.

    그때 내 눈에 바닥의 검은 점이 보였다.

    나는 그 점으로 걸어가 섰다.

    여기가 표식이구나.

    서이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체가 되어 누워 있게 된다.

    시체 연기가 이 연극의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작년에 연극을 봤을 때도 미동도 없이 무대 한복판에 누워 있는 배우를 보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서이렌은 그 누구보다 시체 연기에 자신이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겠지. 당신은 마네킹이니까.

    서이렌의 엘리자베스는 관객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칠 거다.

    나는 확신한다.

    그때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지하 공연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순간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통 때보다 소음과 진동이 커서 몸이 좌우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내가 간신히 자세를 잡고 서 있는데 무대 왼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대표님!”

    놀란 내 시야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서이렌이 보였다.

    “대표님!”

    내가 놀라 고개를 돌리는데 나를 향해 달려드는 서이렌이 보였다.

    “이렌…….”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서이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우리가 바닥을 나뒹구는 사이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무대 조명이 떨어졌다.

    ‘쾅!’

    불 꺼진 조명은 그대로 무대 바닥에 처박혔고 무대에 큰 구멍이 났다.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이렌 씨!”

    나는 황급히 서이렌을 붙잡고 안아 들었다.

    서이렌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일어날 줄 몰랐다.

    “이렌 씨!”

    당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그녀를 무대에 곱게 눕혀 놓고 손가락을 그녀의 코 아래에 가져다 댔다.

    숨을 안 쉰다.

    서이렌의 손은 따뜻했고 그녀의 볼은 빨갰지만 숨을 쉬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의상을 갈아입지 못한 것인지 코르셋이 그녀의 허리를 꽉 조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한 손길로 그녀의 코르셋을 풀기 시작했다.

    코르셋이 풀리자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다시 그녀의 코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네.”

    천천히 굳어 가고 있다는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당장 119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번호를 11까지 찍은 나는 서이렌의 가슴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그대로 얼음이 됐다.

    그녀의 얇은 블라우스 사이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가까이 갔다.

    서이렌의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고 수상한 불빛도 따라서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서이렌의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추가 풀리자 서이렌의 왼쪽 가슴 쪽에 길게 드러난 상처가 보였다.

    아니. 이건 상처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깨부터 가슴 아래까지 갈라진 상처 사이로 서이렌의 몸 안이 들여다보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서이렌의 몸은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상처도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인형의 몸을 칼로 가른 것처럼 길게 갈라져 있었다.

    갈라진 상처의 틈 사이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때 내 핸드폰의 진동이 들렸다.

    서이렌의 심장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 액정 위로 이락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대표님. 우리 자리 잡고 앉았어요.]

    “어. 그래요.”

    [어제 우리가 예상한 대로 마루 식구들이 싼 거만 시키려고 하더라고요. 된장찌개랑 냉면 시키는 거 말리고 미리 주문해 놓은 거 기다리고 있어요. 저 잘했죠?]

    “잘했네요.”

    [대표님 목소리가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때였다. 차갑게 식어 가던 내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눈을 뜬 서이렌과 눈이 마주쳤다.

    “락 군. 나 할 일이 있어서 전화 끊을게요.”

    [예. 빨리 정리하고 오세요.]

    전화를 내팽개친 나는 서이렌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대표님 괜찮아요?”

    “난 멀쩡하잖아요. 이렌 씨나 말해 봐요. 숨 쉴 수 있겠어요? 가슴이 아프지는 않아요?”

    “가슴이요? 어. 어라?”

    서이렌은 그제야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가 풀어진 것을 보고 두 눈이 커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아까 왜 그랬지?

    지금이라도 내 손을 꽁꽁 묶어 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고개를 못 들고 있는데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상처가 더 벌어졌네요. 이제 제 심장이 보일 정도예요.”

    “심장이라고요?”

    나는 뻘게진 얼굴로 서이렌을 돌아봤다.

    서이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 난 가슴을 보이며 내게 말했다.

    “이게 내 심장이에요.”

    벌어진 상처 사이로 투명한 보라색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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