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9화 (30/261)

#29화. 극단 마루

김영원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너 이게 무슨 뜻이야?”

“우리 이렌 씨가 할게요.”

“대본도 안 보고 이렇게 쉽게 결정한다고?”

“이거 작년에 극단 마루에서 초연한 작품이잖아요.”

김영원의 놀란 눈이 더욱 커졌다.

“너 설마 봤어?”

“예. 그때 자현 배우님 촬영 때문에 형님께 들릴 시간이 없었어요. 대신 문자로 형님께 대단한 작품이라고 감상평 남겼잖아요.”

“난 그거 네가 안 보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제가 언제 빈말하는 사람입니까?”

“하긴 넌 언제나 사람들한테 진심이지.”

김영원은 갑자기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더니 대본을 열어 길게 나열된 캐릭터 중 하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엘리자베스가 서이렌 씨가 할 역할이야.”

“엘리자베스라고요?”

김영원의 말에 내 눈이 커졌다.

‘그날 밤’은 배우들의 분량이 비등비등한 떼주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엘리자베스가 제일 임팩트 있는 역이다.

그날 밤은 억만장자의 상속녀인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엘리자베스는 연극의 초반에 누군가에게 독살당하고 무대 한가운데 쓰러져 있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무대에 누워 있는 상태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특이한 형식의 연극이다.

배우들이 과거 회상을 할 때마다 쓰러져 있던 엘리자베스가 일어나 회상 장면을 연기하고 다시 바닥에 눕는다.

나도 작년에 작품을 보고 ‘참 특이한 발상이구나’ 했던 기억이 있다.

절대적인 분량으로는 엘리자베스의 대사는 많지 않으나 계속 무대 한가운데 누워 있으면서 관객의 시선을 끌어야 해서 제일 중요한 역이라 볼 수 있다.

“왜 고민하셨는지 알겠네요. 아무한테나 함부로 맡길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 맞아. 사실 대사는 많지 않고 배우가 가진 아우라가 중요한 역이거든. 근데 서이렌 씨 연기하는 거 보니까 느낌이 오더라고. 서이렌 씨가 가끔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일 때가 있잖아. 나쁜 뜻이 아니라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 마치 살아 있는 인형이라고 할까?”

김영원은 감이 좋은 사람이다.

벌써 서이렌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김영원이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서이렌이 정말 잘할 수 있는 역이란 뜻이다.

“좋습니다. 내일부터 연습이라고 했죠? 아침부터 가면 되나요?”

“정말로 출연하겠다는 거지?”

“이미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요?”

내가 웃자 김영원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고맙다. 막내야.”

“대신 이거 끝나면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말해 뭐해. 다 들어줄게. 걱정하지 마.”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예요.”

“그런데 개런티는 말이야. 연극이 끝나고 마루 정리되면 그때 줘도 될까?”

“제가 끝나면 소원 하나 말한다고 했잖아요.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뭐냐. 너 진짜 어마무시한 소원 말하려는 거 아니지? 갑자기 무서워진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 대본은 제게 주고 가시고요.”

“그래. 알았어. 정말 고맙다. 막내야.”

김영원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그렇게 떠났다.

보그를 기다리는 반년.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

연극이면 서이렌 에게도 좋은 경험일 거다.

나는 그날 밤의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극단 마루에 이른 아침부터 단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같으면 점심때쯤부터 모일 텐데 한 달 안에 연습을 끝마쳐야 하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에 단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마루의 막내인 정하연이 부단장인 허민혜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허민혜는 대본을 보다 말고 정하연을 쳐다봤다.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지만 배우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막내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며 허민혜가 말했다.

“너 지금 엘리자베스 노리고 있는 거지?”

“그런 거 아니에요.”

정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졌대?”

“부단장님. 진짜 아니라니까요.”

마침 도착한 극단의 최고참 선배인 이진혁이 다가오며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

“진혁이 왔어?”

허민혜가 이진혁을 위해 옆자리를 내줬다.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나도 좀 들읍시다. 요즘 기분이 너무 꿀꿀해서 집에 가면 맨날 미튜브로 개그 영상이나 보고 있다고요.”

“이진혁. 배우가 남는 시간에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그래야지. 개그 영상이나 보고 있냐?”

허민혜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진혁을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나도 좀 웃고 살아야죠. 그건 그렇고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요?”

“그게 아니라 우리 하연이가 엘리자베스를 탐내는 것 같아서 내가 놀리고 있었어.”

“아이고. 우리 욕망 막내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주인공 하고 싶어서 그런 거구나.”

“선배님. 저 욕망 막내라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정하연은 이진혁이 자신의 별명인 욕망 막내를 들먹이자 발끈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그녀의 별명을 좋아했다.

자신의 눈빛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뜻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때 이진혁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하연아 어쩌냐. 단장님이 엘리자베스 할 배우 구했대.”

“예?”

웃고 떠들던 정하연이 놀란 눈으로 이진혁을 쳐다봤다.

허민혜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정말? 단장님 어제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너 어떻게 알았어?”

“어젯밤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전화를 드렸는데 엘리자베스 역 구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어젯밤에 알았어요.”

“대체 누구지? 연습 기간이 짧아서 구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단장님이 초창기 LOK 창업 멤버라고 하셨잖아요. 그 인맥으로 구했다고만 하셨어요. 오늘 상견례 갖자고 하셨으니까 기다려 보면 알겠죠.”

“LOK면 이자현 있는 꽤 큰 회사잖아.”

이자현이라는 말에 정하연의 눈이 커졌다.

이자현은 정하연이 제일 좋아하는 배우다.

정하연이 이진혁을 붙잡고 물었다.

“설마 이자현이 하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이자현같이 대단한 스타가 우리 같은 작은 극단의 작품을 하려고 하겠어?”

“왜 못 해요? 유명 배우들도 연극 많이 하잖아요.”

“그건 유명 작품이니까 그런 거지. 일반 대중도 아는 유명 작품이고 그동안 지나쳐 온 캐스트가 있어서 거기에 자기 이름 올리는 것도 큰 경력이니까. 근데 우리는 다르지.”

“우리도 작년에 초연했을 때 평은 좋았잖아요.”

정하연은 어느새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맞아. 우리가 작품 하나는 끝내주지.”

“그렇죠?”

“관객이 안 들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 작품은 훌륭해.”

“에이. 그 말 들으니까 더 짜증 나네요. 우리도 홍보 같은 거 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막 어그로도 끌어 보고요. 제목도 ‘그날 밤’이 아니라 ‘상속녀의 은밀한 비밀’ 이런 거로 바꾸고요.”

정하연이 폭주하기 시작하자 허민혜와 이진혁이 그녀를 말렸다.

“막내야. 알았어. 내가 이번엔 인터넷에도 글 많이 올리고 홍보 많이 할 테니까 그것만은 하지 말자.”

“역시 욕망 막내야. 기필코 흥행시키고 말겠다는 저 눈빛 봐라.”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마루 식구들이 모두 도착했다.

원래 모이기로 했던 열 시가 되자 문이 열리고 김영원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설마? 저 사람이 엘리자베스?

마루 식구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김영원의 뒤에 선 사람을 확인했다.

나는 마루 식구들의 눈빛을 한눈에 받으며 어색하게 들어와 섰다.

그때 정하연이 나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어? 서이렌 매니저다!”

“누구 매니저?”

“서이렌이랑 스캔들 났었던 서이렌 매니저잖아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마루 식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얼굴이 공개된 건 스포츠 엔터에 실린 촬영장 비하인드 사진이 다인데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당황해 어찌할 줄 모르는데 정하연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서이렌이 하는 거예요?”

그때 지하 계단을 내려온 서이렌이 문을 열고 마루로 걸어 들어왔다.

서이렌은 빈선예가 평상시 입고 다니라고 코디해 준 대로 흰 티에 청바지 그리고 언제나처럼 여신 미모 가림 용도의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나타났다.

최대한 평범하게 꾸미고 나타났지만, 서이렌이 모습을 드러내자 지하 연습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정하연은 서이렌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익룡 소리를 냈다.

“어떡해! 진짜 서이렌이야. 미쳤어. 대박이야.”

서이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허민혜와 이진혁은 미쳐 날뛰는 정하연을 붙잡아 앉혔다.

“막내야, 발성 연습을 그렇게 해라. 복식 호흡 연습할 때는 죽어라 해도 안 되던 게 지금 되는 건 또 뭐냐?”

김영원은 소란이 가라앉자 그제야 나와 서이렌을 소개했다.

“여기 계신 분은 내가 LOK에 다닐 때부터 친했던 대학 후배이자 LOK 후배인 원세강 대표예요.”

“예. 알아요.”

정하연은 흥분한 얼굴로 손뼉까지 치며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저는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잊어 주세요.”

나는 뒤로 물러서서 서이렌을 가운데로 가게 했다.

김영원이 모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엘리자베스 역을 맡을 서이렌 씨예요. 아시는 분은 아시는 거 같은데 올해 데뷔해서 지금 배우로 활동 중입니다.”

서이렌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려는데 이진혁이 끼어들었다.

“드라마 배우 아닙니까? 그것도 올해 데뷔했으면 경력이 오 개월이라는 건데.”

이진혁은 엘리자베스 같은 중요한 역에 고작 경력 오 개월짜리 배우가 들어올 것을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허민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보탰다.

“단장님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저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차라리 하연이를 엘리자베스 시키는 편이 나을 거 같은데요.”

김영원은 마루 식구들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그때 정하연이 마루 식구들 앞에 나섰다.

“무슨 소리예요? 서이렌 몰라요? 요즘 서이렌 모르면 간첩이라고요. 진혁 선배님도 인어공주 광고 좋아하시잖아요.”

“어? 인어공주?”

이진혁은 정하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하연은 갑자기 서이렌 앞으로 달려들더니 그녀의 앞에 서서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팬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이 미소를 짓자 정하연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하연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안경 한 번만 벗어 주세요.”

“그거 좋죠.”

서이렌은 빼지 않고 바로 검정 뿔테 안경을 벗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묶었던 머리까지 풀고 마루 안에서 런웨이를 했다.

이진혁 앞까지 런웨이를 한 서이렌이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음료수병처럼 들고 말했다.

“신비로운 자극. 피치업.”

이진혁은 서이렌의 모습을 보자마자 입이 떡하고 벌어져서 다물어지지 않았다.

“뭐야. 그 인어공주가 이분이시라고?”

이진혁뿐만 아니라 다른 마루 식구들도 그제야 서이렌을 알아보고 웅성거렸다.

여우비는 드라마라서 못 본 사람이 많았지만 피치업은 다르다.

편의점마다 서이렌과 강하나의 부채를 나눠 주는 판촉 행사를 했고 하다못해 미튜브만 봤어도 서이렌의 광고를 못 봤을 리가 없다.

스타는 기본적으로 관종의 기질을 타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이렌은 타고난 스타다.

이 자리에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듣자마자 런웨이를 하며 광고를 따라 할 줄이야.

얼떨결에 상견례가 끝나고 드디어 연극 연습을 위해 마루 식구들이 빙 둘러앉았다.

그런데 뒤에서 보니 마루 단원들의 분위기가 한눈에 느껴졌다.

여전히 서이렌을 향해 불신을 눈빛을 보내는 마루 식구들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들은 정하연의 옆자리에 앉은 서이렌을 보며 자기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서이렌 씨는 어제 대본을 처음 봤을 테니 오늘 연습은 옆에서 구경만 하세요. 연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을 잡으면 좋을 겁니다.”

김영원의 말에 서이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대본은 완벽히 숙지했습니다. 저도 연습에 참여하겠습니다.”

김영원과 극단 마루 식구들이 서이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다 외웠다고요? 대본을 어젯밤에 전달했을 텐데요?”

서이렌은 이미 엘리자베스 역에 몰입한 채로 그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 준비됐으니 시작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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