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8화 (29/261)
  • #28화. 전생에 나라를 구한 덕후

    “시간 없어요. 빨리 도망쳐요.”

    곽이석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와 이락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락과 함께 좁은 골목길을 뛰기 시작했다.

    골목 밖으로 나와 대로변 쪽으로 달려가다 보니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곽이석의 커다란 외제 차가 보였다.

    “어서 타세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곽이석이 운전석에 타서 능숙하게 차를 후진했다.

    나는 이락을 뒷자리에 밀어 넣고 앞좌석에 탔다.

    우리가 타자마자 곽이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나는 혼란한 와중에도 뒷자리에 앉아 있는 이락을 살폈다.

    사 개월 전에 처음 봤던 이락은 그새 더 자랐으나 얼굴이 엉망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시퍼으며 입가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떨고 있는 이락의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거지 같은 새끼들.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곽이석도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서도 계속 백미러를 보며 이락을 확인했다.

    “1호팬 님. 괜찮아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락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병원에 안 가도 되겠어요?”

    내 질문에 이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큰일도 아니에요. 병원은 무슨요. 그런데 찐1호팬 님이랑 원 대표님은 대체 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곽이석이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말했다.

    “1호팬 님. 뒷자리에 상자 있죠?”

    “어. 예. 여기 있어요.”

    “저 오늘 1호팬 님께 그거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이게 뭔데요?”

    이락은 이 상자가 대체 뭔데? 하는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굳어 있던 곽이석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떠올랐다.

    “피치업 부채 이벤트가 대박 난 거 아시죠?”

    “그럼요. 저도 부채 받으려고 피치업을 얼마나 많이 사 먹었는데요.”

    이락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에 피를 흘리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번엔 이렌 님과 채팅할 수 있는 이벤트 하잖아요. 피치업 한 개 사면 응모권 한 장 주는 이벤트요.”

    “아!”

    이락이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왜 그래요?”

    “제가 모았던 응모권 못 챙겨 나왔어요.”

    이락은 마치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그 상자 열어 보세요.”

    곽이석은 거의 울기 직전인 이락에게 빨리 상자를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이락은 시무룩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상자 안에 응모권이 수천 장이나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란 이락이 고개를 들어 곽이석을 쳐다봤다.

    곽이석은 백미러 속의 놀란 토끼 눈을 한 이락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비를 털어서 오천 개 샀습니다.”

    “오천 장이라고요?”

    “음료수는 근처 학교에 기증하고 응모권만 챙겨 왔습니다.”

    이락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저한테 이런 걸…….”

    “1호팬 님 덕에 제가 피땀 흘려 쓴 기획서를 지키고, 형님들에게도 한 방 먹였잖아요. 그래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찾아온 게 정말 잘한 거네요. 이렇게 1호팬 님도 구할 수 있고 말입니다.”

    “찐1호팬 님.”

    대체 이분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서로를 1호팬과 찐1호팬이라 부르는 이락과 곽이석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저들은 서이렌 팬덤의 주축이 되는 네임드들이다.

    심지어 이락은 서이렌이 루머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일등 공신이고 곽이석은 서이렌을 서포트해 주는 든든한 투자자가 아닌가?

    그들은 내가 옆자리에 있든 말든 한참 동안 여우비 마지막 회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몇 번이나 소름 돋게 했다.

    덕후는 무섭다.

    아니, 덕후는 대단하다.

    * * *

    곽이석은 회사 일 때문에 우리를 스타탄생에 데려다주고 떠났고 지금 나는 이락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빈선예는 이락의 얼굴에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줬다.

    “네가 realrock이구나. 누나니까 반말해도 되지?”

    “누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짜식 귀엽다. 몇 살이니?”

    “스무 살이요.”

    “생각보다 나이 많네. 난 한 열여덟은 된 줄 알았지.”

    “무슨 말씀이세요. 스무 살 맞아요.”

    이락은 자신을 어리게 보는 빈선예에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빈선예는 그 모습이 귀엽다며 이락의 볼을 잡아 늘였다.

    “이거 놔요. 이상한 누나야.”

    “그래. 나 이상한 누나 맞아.”

    이락이 빈선예에게 놀림을 당하며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어쩌나.

    나도 빈선예와 같은 생각이다.

    멀끔히 씻기고 새 옷을 갈아입힌 이락은 마치 아이돌 가수처럼 귀여웠다.

    이락은 지금 곽이석이 준 상자를 보물처럼 꼭 껴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마저도 귀여웠다.

    “거기 진짜 집 아니죠?”

    이락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집 아니니까 다시 안 돌아가도 되잖아요.”

    “그게…….”

    “운전면허는 있다고 했죠?”

    “생일날 면허 땄어요.”

    “그럼, 됐네요. 우리랑 같이 일합시다.”

    “뭐라고요?”

    이락이 용수철처럼 소파 위로 튀어 올랐다.

    나는 이락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공부는 어디까지 했어요?”

    이락은 공부 이야기가 나오자 내 눈을 피했다.

    하긴 그런 곳에서 자라며 학교를 제대로 나왔을 리가 없다.

    “우선 검정고시 준비부터 합시다. 회사 다니면서 차근차근 준비하면 돼요.”

    “그런데 대표님. 왜 저한테 이러시는 건데요?”

    “이락 씨는 우리한테는 구세주니까요.”

    “제가요?”

    빈선예는 시시각각 변하는 이락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진 서이렌을 위해 나는 이락의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락을 반드시 스타탄생으로 데리고 올 생각을 하고 그곳에 찾아간 것이다.

    “빈 팀장님. 제가 이락 씨랑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만 자리 좀 비켜 주실래요?”

    “너무 무섭게 굴지는 마세요.”

    빈선예가 쿨하게 자리를 비켜 줬고 드디어 이락과 나 단둘만 남았다.

    이락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락 씨는 알 거예요. 서이렌은 주민등록증이 없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죠.”

    이락이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이락도 서이렌의 팬이 된 이후부터 줄곧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이락이기에 서이렌에게도 필시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락의 눈을 쳐다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락 씨가 필요해요. 아니 서이렌이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렌 님이요?”

    “서이렌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락은 보물단지처럼 들고 있던 상자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스타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어느 덕후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어느새 이락의 흔들리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이락은 서이렌을 지키는 기사라도 된 것처럼 진중하게 답했다.

    “제가 할게요. 서이렌 님은 제가 지킵니다.”

    * * *

    급한 회사 일을 정리한 곽이석은 꺼 놨던 핸드폰을 켰다.

    이락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서 회의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락의 핸드폰은 도망쳐 나오다가 부서졌기에 곽이석은 이락이 아니라 원세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떨어지더니 드디어 원세강이 전화를 받았다.

    [곽 본부장님이 전화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셨군요. 혹시 1호팬. 아니. 이락 씨는 잘 있나요?”

    [지금 저와 함께 저녁 먹고 있어요.]

    “혹시 괜찮다면 저 좀 바꿔 주실래요?”

    [예. 그러죠.]

    이내 이락의 밝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곽이석은 이락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호팬 님. 제가 우리 회사 물류 팀에 1호팬 님 자리를 마련해 볼까 하는데요. 그러니까 다시 거기로 돌아가지 마세요. 제가 직원들 쓰는 사택도 알아봐 드릴게요.”

    [찐1호팬 님.]

    이락은 곽이석의 진심 어린 배려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원세강은 저들이 또 시작했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저와 함께 가시죠. 제가 지금 일이 끝났으니까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원세강 대표님 집에서 함께 자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내일 아침 일찍 찾아갈게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곽이석은 자꾸만 사양하는 이락이 걱정스러웠다.

    “혹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요. 돌아가면 전 정말 어디 강바닥에서 시체로 발견될지도 몰라요. 안 돌아가는 게 아니라 못 돌아갑니다.]

    곽이석은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웃으며 말하는 이락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저 앞으로 스타탄생에서 일할 겁니다. 원세강 대표님께서 학교도 보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요? 스타탄생에서 1호팬 님이 뭘 하시는데요?”

    [서이렌 님 로드 매니저 하기로 했습니다.]

    “예?”

    순간 곽이석은 말문이 막혔다.

    핸드폰 너머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락이 전화가 끊어졌나 하고 곽이석을 불렀다.

    [여보세요? 찐1호팬 님? 들리시나요? 이거 갑자기 왜 이러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곽이석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여기 있습니다. 1호팬 님.”

    [아까 제가 한 이야기 들으셨나요? 저 서이렌 님 로드 매니저 하기로 했어요.]

    “예. 들었습니다.”

    [사실 정식 매니저는 아니고 원세강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로드 매니저 일 배우는 거예요.]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곽이석은 계는 둘째고 전생에 나라를 구한 덕후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 * *

    이락이 정식으로 스타탄생 식구가 된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사람이 스타탄생을 찾아왔다.

    “형님.”

    나는 한걸음에 김영원의 앞으로 달려갔다.

    김영원은 손에 ‘축 개업’이라는 리본이 달린 작은 화분을 들고 서 있었다.

    김영원은 압구정 한복판에 멋들어진 이 층 짜리 건물을 보고 꽤 놀란 눈치였다.

    “와. 우리 막내 출세했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김영원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가 사 온 화분은 개업식에 많이 보내는 난 화분이 아니라 보라색 팬지 꽃 화분이었다.

    이 양반이 소녀 감성은 여전하구나.

    나는 웃으며 그가 가져온 화분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제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아냐. 내일부터는 나도 바빠질 거라서 그전에 온 거야.”

    “극단 정리하는 거 때문에요?”

    “아니. 연극 연습 때문에.”

    김영원의 말을 듣고 내가 놀라 물었다.

    “계속하시기로 하신 겁니까?”

    김영원은 씁쓸히 웃으며 답했다.

    “아니. 마지막 작품 올리기로 했어. 극장 계약이 두 달 남아서 한 달 동안 연습 빡시게 하고 나머지 한 달은 무대 올릴 거야.”

    김영원은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스타탄생에서 함께 일하자고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김영원이 들고 온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대본이었다.

    [그날 밤]

    연출: 김영원

    작가: 김영원

    출연: 극단 마루

    대본을 본 나는 김영원이 왜 나를 찾아온 것인지 직감했다.

    김영원은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하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김영원의 입이 열렸다.

    “네가 찾아온 다음에야 알았어. 너 LOK 그만둔 거.”

    “얼마 안 됐어요.”

    “너 이자현이랑 일할 때도 좋은 배우와 일한다고 생각했었어.”

    “좋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번 배우는 더 좋더라. 서이렌이라고 했나?”

    “혹시 이렌 씨 연기하는 거 보셨어요?”

    “응. 작품이 하나밖에 없던데? 딸내미한테 물어보니까 요즘 대세라며 보여 주더라.”

    “어땠어요? 괜찮나요?”

    “너무 좋더라. 눈빛도 좋고, 신인인 거 같은데 아우라도 있고. 사실 이자현보다 더 마음에 들었어.”

    “형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뿌듯하네요.”

    김영원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혹시 이 연극 캐스팅은 다 끝났나요?”

    “원래 다 끝났었는데. 제일 중요한 역이 갑자기 펑크가 났어.”

    “갑자기 왜요?”

    “그거 하려던 단원이 영화 오디션에 붙었어. 사실 문 닫으려는 극단보다는 영화가 중요하잖아. 그래서 대타 있다고 하고 보냈거든.”

    “그런데 사실은 배우가 없는 거죠?”

    “응. 당장 내일부터 연습 들어가야 하는데 배우가 없다. 문 닫을 극단이라 누굴 캐스팅하기도 그렇고.”

    나는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갑자기 일어서자 김영원은 꽤 놀란 듯했다.

    책상으로 걸어간 나는 펜을 하나 꺼내 다시 돌아왔다.

    김영원은 내가 뭘 하려는지 몰라 당황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대본을 내 앞으로 당겨 펜으로 뭔가 쓰고 그걸 김영원에게 돌려줬다.

    대본을 본 김영원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날 밤]

    작가: 김영원

    출연: 극단 마루, 서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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