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구세주를 구하라
다음 날 여우비의 마지막 회 시청률이 떴다.
24.2%.
기존의 JTV 시청률 일 위는 물론 역대 케이블 드라마 시청률 이 위에 빛나는 수치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드는 축하 전화에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어제 종방연이 새벽까지 이어졌기에 잠을 제대로 못 잔 나는 피곤한 얼굴로 축하 전화를 받았다.
“깡기자님. 전화 주셨네요.”
[원 대표님. 그거 알아요? 내가 아침마다 일어나서 여우비 시청률 확인했습니다.]
“깡기자님은 의리가 있으셔서 그럴 줄 알았어요.”
[드라마 끝났으니까 이제 인터뷰해야죠?]
“당연하죠. 소울에서 연락받으셨죠? 배우들 종영 인터뷰는 모두 깡기자님과 하기로 했습니다.”
[어휴. 이거 은혜 갚는 스케일이 너무 큰데요?]
“앞으로도 우리 이렌 씨 잘 봐주십사 하고 아부하는 거니까 꼭 기억해 주세요.”
[알았어요. 나야 이렌 씨같이 예쁘고 연기까지 잘하는 배우는 항상 응원하죠.]
“고맙습니다. 깡기자님.”
[저는 이만 끊을게요. 섭외 전화가 물밀듯이 밀려올 텐데 제가 계속 대표님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죠.]
“예. 들어가세요. 인터뷰 때 봬요.”
전화를 끊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이렌은 포상 휴가를 가지 않고 대신 빈선예와 함께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그들이 쉬고 있는 동안 나는 할 일이 있다.
* * *
오랜만에 대학로에 왔다.
나는 오늘 이곳에 극단 마루의 대표인 김영원을 만나러 왔다.
김영원.
대학교 동아리 선배이자 나를 연예계에 입문시킨 장본인.
당시 군대에서 갓 제대했던 나는 복학하기 전에 잠시 일할 아르바이트를 찾았고, LOK에서 일하던 김영원의 소개로 심하영의 로드 매니저를 하게 됐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로드 매니저가 뭔지도 몰랐고 그저 운전기사 노릇을 하기에 급급했다.
김영원은 한국대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LOK에 입사해 홍보팀에서 꽤 인정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LOK 매니저로 말뚝을 받고 얼마 안 돼 퇴사했다.
퇴사한 그는 재미있게도 극단을 만들었다.
내가 오늘 찾아가는 극단 마루가 김영원이 단장으로 있는 곳이다.
연기에도 조예가 깊고, LOK에서 일하며 인정받은 실력도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의 됨됨이다.
김영원이라면 내가 믿고 서이렌을 맡기고 떠날 수 있다.
김영원을 영입하고 난 다음에는 로드 매니저를 뽑아야 한다.
언제까지 내가 서이렌을 따라다닐 수는 없다.
혹시라도 운전하다가 지난번처럼 가슴에 통증이라도 온다면 큰일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김영원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형님, 접니다. 원세강.”
[세강이구나. 웬일이야? 지금 한창 일할 때 아닌가?]
“저 지금 대학로예요.”
[대학로라고? 혹시 나 찾아온 거야?]
“예. 카페로 찾아갈까 하는데요.”
김영원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만년 적자인 극단 살림을 운영하느라 어쩔 수 없이 투잡을 뛰는 것이다.
카페를 선택한 이유도 그곳에서 마음껏 책을 보고 연극 대본을 쓰기 위해서다.
[어쩌냐. 너 시간 잘못 맞췄다.]
마침 나는 극단 마루가 있는 건물 앞에 섰다.
지하에 극단 마루가 있고 이 층에 김영원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그런데 항상 나를 반겨 주던 카페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형님. 간판이 안 보이는데요?”
[극단 앞이야?]
“예.”
[내가 지금 올라갈게.]
이내 지하에서 김영원이 웃으며 뛰어올라 왔다.
오랜만에 그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막내야 오랜만이다.”
“형님. 저도 이제 서른다섯 살입니다. 막내라는 호칭이 쑥스럽네요.”
“한번 막내는 영원한 막내지.”
“그런데 형님. 이제 카페 안 하세요?”
“응. 그렇게 됐어. 사실 마루도 6월 말까지만 운영해.”
“예?”
그토록 연극을 사랑하던 김영원이 극단을 접는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정말이세요? 왜 닫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
김영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적자 때문인가요?”
김영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응. 적자가 너무 심해. 단원들 월급 못 준 지 일 년째야. 내가 단원들 발목 잡는 거 같아서 더는 못하겠어. 그래서 접기로 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내가 그를 스타탄생으로 영입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그는 극단을 접으려고 한단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극단을 그만두길 원치 않는다.
나는 그저 카페만 접고 극단 마루를 계속하면서 스타탄생 일을 도와 달라고 할 참이었다.
“세강아. 오늘은 내가 바쁜 일이 있는데 다음에 보자. 미안하다. 나 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말도 없이 찾아온 제가 문제죠.”
“그럼, 나 바빠서 먼저 갈게. 미안하다.”
김영원이 웃으며 지하로 사라졌다.
허탈한 마음으로 뒤돌아서는 그때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realrock 확인했습니다.]
문자를 확인한 내 두 눈이 커졌다.
드디어 찾았다.
우리의 구세주 realrock.
나는 천재용의 메일 계정을 해킹해서 보내 준 그를 찾기 위해 흥신소까지 찾아갔었다.
메시지에는 흥신소 직원이 알아낸 주소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락?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 주소는 눈에 익었다.
순간 내 눈이 번뜩 떠졌다.
설마 그때 그곳?
* * *
아침부터 이락은 보스, 최용팔에게 심하게 깨지고 있었다.
말이 보스지, 그는 이락이 사는 라인을 맡은 지부장일 뿐이다.
지난날 원세강과도 대면했던 적이 있는 그는 근래 수하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며 애꿎은 이락을 본보기 삼아 쥐잡듯 잡고 있었다.
이락은 이미 한쪽 눈이 시퍼레지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 장난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잡일 하는 거 같지만, 아니야. 서류 작업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말이야 바른말이지. 우리가 판을 다 세팅해 놔야 윗선에서 그거 가지고 작업을 들어가든 말든 할 거 아니냐! 야, 이락! 듣고 있냐?”
“예, 듣고 있습니다!”
이락이 깜짝 놀라며 큰 소리로 답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으면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최용팔은 잔뜩 주눅이 든 이락을 보며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린치를 가해야 수하들이 도망칠 생각을 못 하고 열심히 일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최용팔은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야. 이락. 너 최근에 운전면허 땄더라. 그거 왜 땄어? 네가 운전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락은 만 십구 세 생일이 지나자마자 운전면허를 땄다.
최용팔은 그걸 듣고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락은 이 라인에서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실력만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락을 가르친 기술자도 이미 이락은 더는 배울 게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저는 그냥 나중에라도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고개를 푹 숙인 이락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아? 너 도망간 엄마 찾으러 다니려고 면허 딴 거잖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락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순하디순한 이락의 눈빛이 돌변한 것을 보고 최용팔은 비웃음을 드러냈다.
최용팔은 들고 있던 각목을 번쩍 들었다.
무시무시한 최용팔의 기세에도 이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눈깔이 빠지게 찾아 나서도 너희 엄마 못 찾아. 알아? 이 더러운 골목에 애를 버리고 갈 정도면 인생 끝까지 갔다는 말이야. 아마 지금 살아 있지도 않을걸?”
“지금 그 말 취소해요.”
“이게 미쳤나? 지금 누구한테 대드는 거야?”
“취소하라고요!”
눈이 뒤집힌 이락이 뛰쳐나오더니 최용팔을 그대로 머리로 받아 버렸다.
평소 같으면 절대 당하지 않았을 최용팔은 처음으로 반항하는 이락을 보며 너무 놀란 나머지 대응할 틈도 없이 뒤로 넘어졌다.
이락은 최용팔을 밀어내고 그대로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나는 서이렌의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던 골방으로 가는 골목 앞에 섰다.
가서 뭐라고 하지?
‘당신이 realrock인가요?’ 이렇게 운을 떼야 하나?
혹시 서이렌을 불법 체류자라고 생각해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함부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다.
그때 좁은 계단으로 누군가 뛰어 내려왔다.
“거기 비켜요.”
도망쳐 나오던 이락이 계단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으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나에게 돌진했다.
“헛.”
나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이락과 섞여 바닥을 굴렀다.
곧이어 이락을 뒤쫓던 이들의 험상궂은 목소리가 계단 위쪽에서 울려 퍼졌다.
“야! 거기서. 너 잡히면 내 손에 죽는다.”
최용팔의 목소리를 들은 이락의 눈빛이 떨려 왔다.
이락은 그 와중에도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워 줬다.
나는 그제야 이락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혹시 realrock이란 메일 계정으로 스타탄생에 해킹 메일 보내신 분이신가요?”
“예?”
도망치려던 이락이 나를 보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누구세요?”
“저는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스타탄생 대표예요.”
“스타탄생이요? 아. 그때 그분!”
그때 계단으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최용팔과 부하들이 뛰어 내려왔다.
나와 이락은 순식간에 뒷세계에 사는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저 새끼는 뭐야?”
최용팔이 나를 보며 으르렁댔다.
누아르 영화를 찍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이락은 체념했는지 나를 뒤로 보낸 채 최용팔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보내 주세요.”
“너는 입 닥치고 있어. 빨리 무릎이나 꿇어.”
최용팔의 말에 이락은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무릎을 꿇고는 다시 한번 사정했다.
“이 사람은 보내 주세요.”
“누가 너한테 말하라고 했어? 입 다물고 있으라니까.”
최용팔이 손에 들고 있던 각목을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내가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박스를 들어 각목을 막았다.
“너 뭐야?”
“지나가는 엑스트라.”
“뭐라고?”
다행히 최용팔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골목이 워낙 후미져서 그런지 주위에 도와달라고 요청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몰래 핸드폰을 들어 119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최용팔이 소리쳤다.
“저 새끼 핸드폰 뺏어.”
뒤따라온 부하들이 나를 향해 일시에 달려들었다.
“이 사람은 아무 잘못 없다니까요.”
무릎 꿇고 있던 이락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일촉즉발의 순간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 든 건지 모두가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신고했어.”
“미친 새끼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최용팔은 내가 약을 파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주춤하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새끼 잡으라고!”
“예. 보스.”
그때였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좁은 골목길 앞으로 경찰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용팔은 나타난 경찰차를 보더니 나와 이락을 노려봤다.
“새끼야. 너 잡히면 내 손에 죽는 거야.”
최용팔은 이 말을 남기고 계단 위로 빠르게 뛰어올라 갔다.
계단으로 가면 건물 뒤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최용팔이 도망치자 부하들도 함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달려와 그들을 뒤쫓으며 사라지자 골목 안에는 나와 이락만이 남았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친 지 모르겠지만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이락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는데 그때 골목 안쪽으로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1호팬 님!”
검은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난 그는 다름 아닌 곽이석이었다.
이락이 곽이석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찐1호팬 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1호팬 님 뒤쫓던 사람들은 누구예요?”
“혹시 찐1호팬 님이 경찰 부르셨어요?”
“예. 제가 그랬습니다.”
곽이석은 이락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가 도망쳐 나오는 이락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1호팬과 찐1호팬?
나는 이락과 곽이석이 서로 얼싸안는 장면을 보고 머릿속에서 뭔가 떠올랐다.
서이렌의 네임드 팬.
‘서이렌 1호팬’과 ‘진짜 서이렌 1호팬’.
설마 이 사람들이 그들이라고?
곽이석? 당신이 뭐? 진짜 찐1호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