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6화 (27/261)
  • #26화. 유종의 미

    여우비 12화가 끝나자 호평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천재용은 찬양 일색인 기사를 모니터링하며 얼굴을 굳혔다.

    그때 서이렌과 여우비를 까는 기사를 올려 달라고 부탁했던 후배 기자에게 톡이 왔다.

    [윗선에서 컷 당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기사는 못 올릴 거 같습니다.]

    후배 기자는 감 떨어졌냐는 보도국장의 첨언까지 꼼꼼하게 캡처해서 천재용에게 보냈다.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은 천재용은 속이 탔는지 모텔에서 나와 근처의 편의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것은 놀랍게도 환하게 웃는 서이렌의 얼굴이 박힌 부채였다.

    편의점에서 하는 태양제과 판촉 행사에서 나눠 준 부채를 들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천재용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편의점에서 나오며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왜 나는 강하나 거야. 짜증 나게.”

    “그러니까 하나 더 뽑아 보라니까.”

    “무슨 부채 받겠다고 음료수를 하나 더 사냐. 됐어.”

    “내가 장담하는데 조만간 이거 못 구해서 난리 날걸.”

    “진짜 그럴까?”

    강하나의 부채를 받고 고민하던 대학생은 결국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서이렌의 부채를 들고 편의점에서 나왔다.

    대학생은 먼저 받은 강하나 부채는 편의점 앞의 박스에 대충 집어 던지고 친구와 함께 사라졌다.

    편의점 앞 박스에는 쓰레기와 함께 강하나의 부채가 대여섯 개는 들어 있었다.

    천재용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건든 사람이 일 년에도 몇 명씩 나왔다가 사라진다는 라이징 스타가 아니라 진설 같은 국민 스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궁지에 몰리니까 별생각을 다 하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천재용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 * *

    여우비 촬영장은 이른 아침부터 분위기가 좋았다.

    고생고생하며 찍은 12, 13화가 호평 속에 방영되고 시청률까지 높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때 JTV로부터 희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종방하면 태국 보내 준대요.”

    “진짜요? 대박!”

    “방금 JTV에서 연락 왔어요. 진짭니다.”

    스태프들은 포상 휴가를 간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갑작스러운 진지혜의 하차로 촬영장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그녀의 하차가 신의 한 수 같았다.

    그때 이진아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그가 내게 캔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유정운 매니저 건은 제가 숲 엔터를 대표해서 사과드릴게요.”

    “그게 어디 숲 엔터 잘못인가요? 유정운 매니저도 아마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런 건 아니었을 겁니다. 내 배우를 위하는 방식이 잘못된 거였겠지요.”

    이진아의 매니저가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겁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이진아의 매니저는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원세강 대표님이 원래 여배우 매니저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잖아요.”

    “이자현 배우님 때문에요?”

    “뭐 그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요. 암튼, 저는 소문이 진짜일 거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대표님을 실제로 겪으니까 알 것 같아요. 소문이 과장된 게 아니라 오히려 모자랐었구나.”

    나는 이진아 매니저의 말에 놀라 마시던 캔 커피를 뿜을 뻔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 소문이 뭔데요?”

    “대표님이 키우면 반드시 뜬다.”

    “아. 그런 얘기였습니까? 그럼, 소문이 틀린 거네요. 제가 십 년간 매니저를 해 왔지만, 톱스타는 이자현 배우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서이렌 씨가 그 뒤를 잇겠죠. 같이 일해 보니까 정말 세심하게 케어해 주시더군요. 제가 대표님 하는 거 보고 한 수 배웠다니까요.”

    “좋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요즘 우리 회사 대표님께서 원 대표님 말씀을 자주 하시거든요.”

    “윤동진 대표님께서요?”

    나는 순간 제작발표회 때문에 그에게 전화했던 일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혹시 윤동진 대표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셨나요? 나쁜 이야기인가요?”

    “윤 대표님이 성격이 있는 분이지만 뒤에서 험담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냥 원세강처럼 일해야 서이렌 같은 스타도 키우는 거라고 아주 만날 때마다 잔소리십니다.”

    “윤동진 대표님이 그러셨다고요?”

    나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서이렌이 제작발표회에 출연할 수 있도록 너무 쉽게 허락한다 했더니 스타탄생을 잘 본 건가?

    “암튼, 이제 2화 남았으니까 마지막까지 잘해 봅시다.”

    “예. 그럽시다.”

    나는 들고 있던 캔 커피로 이진아의 매니저와 건배를 했다.

    * * *

    그날 밤, 편집실에선 15화 편집이 한창이었다.

    편집을 진행하던 진기오 감독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한참 동안 모니터를 노려봤다.

    옆에 있던 조감독이 진기오 감독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봐 봐.”

    정지 화면 속에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서이렌이 보였다.

    “눈빛이 참 좋아.”

    진기오 감독은 서이렌의 연기 장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긴 하네요. 얼굴을 죄다 가리고 눈 밖에 나온 게 없는데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아요.”

    “그동안 단오가 감초 역이라 연기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스토리를 이끌어 가니까 확실히 알겠어.”

    “뭘 아시겠다는 건가요?”

    “아우라가 있어.”

    “아우라요?”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는 기준이 아니라 존재감을 발산해 내는 아우라가 보여.”

    “오. 그거 극찬 아닌가요? 서이렌 씨 이번에 연기가 처음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 놀라운 거지.”

    진기오 감독이 편집하며 감탄한 장면이 방송되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 서이렌 연기 잘하지 않냐?

    - 그걸 지금 알았냐? 신인치고는 진짜 잘하는 거지.

    - 신인 딱지 떼고 봐도 잘하는데? 서이렌이 송치석 죽이려고 달려들 때 그 눈빛 못 봤냐? 나 그거 보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잖아.

    - 그 씬은 나도 인정. 송치석 보자마자 단오 눈빛 돌변하는데 어휴.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음.

    - 난 김태섭이랑 같이 붙을 때. 그때 느꼈어. 김태섭이 연기경력이 훨씬 많은데도 밀리는 게 느껴졌음.

    - 큭큭. 그건 나도 느꼈다. 송치석 정도 돼야 안 밀리는 건가? 근데 송치석도 연기파로 이름났잖아.

    - 아. 아깝다. 여우비가 JTV만 아니면 서이렌이 신인 연기상 탈 텐데.

    - JTV는 연기대상 안 해?

    - JTV 케이블이잖아. 연기대상 같은 거 없음.

    - 아. 안 되는데. 우리 이렌 님 신인상 받아야 하는데.

    - 서이렌 연기대상 받을 수 있음. 바로 차기작 찍으면 된다고. 서이렌 쉬지 말고 열일해라. 열일만이 살길이다.

    15화가 호평 속에서 끝나고 드디어 최종화만 남겨 두고 있다.

    그날 늦은 오후가 되자 배우와 스태프들이 강남의 호텔에 모여들었다.

    몇 달간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한 작품답게 수많은 기자가 드라마의 종방연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오늘 서이렌은 꾸미지 않고 편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청바지에 흰 티, 대충 말아 올린 머리. 검은 뿔테 안경.

    꾸민 듯 안 꾸민 것 같도록 빈선예가 특별히 코디해 준 옷과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때 나타난 이진아가 서이렌의 옆에 섰다.

    이진아는 악플 사건을 겪으며 한층 성장했으며, 여우비까지 성공해 커리어에 날개를 달았다.

    대기 중인 차기작만 두 개다.

    이진아가 서이렌의 차림을 힐끔 보더니 웃으며 귓속말을 건넸다.

    “코디 잘했다. 예쁘다.”

    서이렌도 웃으며 이진아의 말을 맞받아쳤다.

    “언니야말로 예뻐요.”

    “입에 발린 소리인 거 다 아는데도 기분은 좋다. 그런데 넌 그 뿔테 안경 좀 그만 쓰고 다녀라. 지난번 대본 리딩 때도 쓰고 나오더니. 예쁜 얼굴 다 가린다. 라식이라도 하든가.”

    검정 뿔테는 사실 서이렌의 눈부신 미모를 가리기 위해 생각한 아이템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이렌이 안경을 쓴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라식은 무서워요. 근데 이거 예쁘지 않나요? 나름 신경 써서 새로 구매한 건데요?”

    “검정 뿔테가 거기서 거기지. 예쁘긴.”

    이진아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서이렌의 검정 뿔테 안경을 벗겨 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며 안경을 벗은 서이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어휴. 언니. 안 보여요.”

    “나만 따라와.”

    안경을 잃고 찡찡대는 서이렌의 모습과 그런 서이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이진아의 다정한 모습이 사진으로 박제되어 실시간으로 기사에 실렸다.

    * * *

    첫 화를 서울 근교의 고깃집에 모여서 본 걸 생각하면 강남 호텔을 통으로 빌려 종방연을 여는 것이 감개무량했다.

    서이렌이 주연 배우들과 함께 자리에 앉자 나는 빈선예와 함께 배우 스태프들에게 배정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참 식사하며 웃고 떠드는데 갑자기 홀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벽면 한쪽에 흰 천이 드리워졌고 그곳에 프로젝터 불빛이 쏘아졌다.

    여우비의 오프닝이 시작되자 홀에 모인 배우와 스태프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나는 누구보다 감격한 얼굴을 하고 여우비의 마지막 회를 시청했다.

    홍리아는 송치석을 무너뜨리기 위해 계략을 짠다.

    지난날 이성윤을 처음 만난 계기가 된 청나라 간자가 사용한 암어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송치석은 그것도 모르고 암어가 적힌 서신을 가지고 있다가 궁지에 몰린다.

    도망친 송치석은 마지막 발악으로 천향원 기녀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하나 천향원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한 윤태원이 단오와 함께 천향원 기녀들을 빼돌린 것이다.

    천향원에 이성윤과 함께 관병들이 몰려들고 송치석은 관병으로 분하고 찾아온 홍리아와 마주한다.

    그때 기녀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치는 단오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도선사라는 작은 사찰이다.

    단오는 그곳에서 중독당해 깊은 잠을 빠진 연홍과 재회한다.

    이 장면이 서이렌이 출연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저 멀리 주연 배우들과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는 서이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이렌을 처음 만난 게 지난 1월의 일이다.

    지금이 5월 초니까 어느덧 오 개월이 지난 것이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나는 그동안 서이렌의 차기작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내가 본 미래의 작품을 모두 기억해 냈고, 그것을 표로 만들어 서이렌이 출연해야 할 작품과 걸러야 할 작품을 골라냈다.

    내가 본 미래와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때의 지수연과 지금의 서이렌은 입지부터가 다르다.

    지수연은 삼 년째 되는 해에야 주연급으로 올라섰지만, 서이렌은 지금 당장이라도 주연을 할 수 있다.

    나는 먼저 지수연이 조연으로 들어갔던 흥행한 영화를 찾아 투자를 시작했다.

    서이렌이 배우로 그 작품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투자자로 이름을 올려서 스타탄생이라도 키우기로 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서이렌의 다음 작품은 올해 연말에 시작할 드라마 ‘보그’다.

    보그는 패션지의 인턴 작가로 취업한 주인공이 냉혹한 패션업계에서 살아남는 내용을 그린 수작이다.

    로맨스에 치중한 스토리가 아닌 자신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청춘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었다.

    지수연은 이 작품의 조연으로 들어갔지만 서이렌이라면 주연도 가능할 거다.

    문제는 시간이다.

    반년은 더 기다려야 그 작품이 온다.

    배우로서 육 개월은 작품 텀이 길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그렇다면 뭘 할 수 있을까?

    보그를 기다리는 반년 동안 뭐를 할 수 있을까?

    그때 내 뇌리에 한 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그렇구나.

    서이렌의 차기작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찾는 것이 먼저다.

    내가 사라져도 스타탄생을 이끌어 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선예가 있지만, 대표로서 스타탄생을 이끌고 가기엔 역부족이다.

    그녀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일하는 스타일과 대표라는 직책이 맞지 않을 뿐이다.

    다행히 나는 적임자를 알고 있다.

    그때 여우비 최종화가 끝나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서이렌도 그들과 섞여 기뻐하고 있었다.

    해맑게 웃는 서이렌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당장 내일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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