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단역의 역습
곽이석은 지금 대회의실 앞에 서 있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에는 그동안 철통 보안을 유지하며 지켜 온 기획서가 들어 있다.
방금 곽이석을 향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간 형제들의 손에는 곽이석이 일부러 유출한 가짜 기획서가 들려 있다.
곽이석의 형제들은 어제오늘 최고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가짜 기획서의 허점을 모두 찾아낸 상태다.
가짜 기획서 유출에 도움을 주고, 진짜 기획서를 지키게 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락이다.
곽이석은 오늘 임원들 앞에서 형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생각이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안쪽에는 태양제과의 사주이자 평소 소원한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양옆으로 장남과 차남이 자신의 지원군에게 둘러싸인 채 곽이석을 오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곽이석은 모두가 자신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 상황 속에서도 왠지 모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형님들. 참으로 더러운 수를 쓰시네요. 그동안 개무시하며 인간으로도 안 보던 동생한테 한번 제대로 털려 보십시오.’
이를 꽉 문 곽이석의 뒤로 오늘 발표할 진짜 기획안이 떴다.
* * *
여우비 촬영장은 지금 A, B팀으로 나뉘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서이렌은 그녀가 장담한 대로 NG 한번 없이 12화, 13화 추가 촬영을 마쳤다.
B팀 감독을 맡은 우영민은 서이렌의 완벽한 연기에 혀를 내둘렀다.
마치 처음부터 이런 연기를 하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서이렌은 찰떡같이 역을 소화해 냈다.
지난 일주일간 피 말리는 추가 촬영을 마치고 좀비가 된 B팀은 쌩쌩하다 못해 날아갈 것 같은 서이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이렌 씨는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죠?”
“인간이 아니에요. 연기하는 기계예요. 쉬지도 않고 바로 옷 갈아입고 나와서 다른 씬 찍는데 그걸 또 하나도 안 틀려.”
스태프들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모두 엄지를 들고 서이렌을 칭찬했다.
함께 연기를 맞춰 준 이진아와 이윤석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서이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스태프들은 쌩쌩한 서이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는 나다.
현장을 내내 지킨 나는 일주일 동안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다.
중간에 약이 떨어져서 집에 들렀던 것을 빼놓고는 일주일 동안 촬영장에서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카니발에 시동을 걸고 뒤를 돌아봤다.
멀쩡한 서이렌이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빈 팀장님 돌아오면 바로 집으로 갈게요.”
“예. 좋아요.”
그때 차 문이 열리더니 빈선예가 뛰어들어 왔다.
지난 일주일 동안 집에도 못 가고 나만큼이나 고생한 빈선예다.
빈선예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외쳤다.
“대표님. 대박 뉴스예요. 천재용 팬파라치에서 잘렸대요.”
빈선예의 말에 내 두 눈이 커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촬영장을 지키며 천재용과 평론가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확인했다.
평론가는 내가 봤던 미래처럼 자수했다.
평론가는 매니저라는 직업적 특성상, 정상참작이 되어 벌금형으로 끝났던 것으로 기억난다.
천재용은 비스티보이스 기획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연예기획사에 고소를 당했다.
그중에는 LOK도 있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천재용은 뇌물수수 사건으로 팬파라치에서 잘리고 대신 팬파라치 모기업이 운영하는 영화 평론 사이트의 편집장으로 갔다.
기레기가 영화 평론 사이트의 편집장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사이즈가 커졌고 고소까지 당했다.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나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곳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없나요?”
“아뇨. 업계 퇴출이라고 방금 기사 났어요.”
업계 퇴출.
완전히 손절당했구나.
“대표님, 잠시만요. 나 커피 좀 사서 올게요.”
빈선예가 콧노래를 부르며 차 문을 닫았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열어 천재용을 검색했다.
[스타기자 천재용, 뇌물수수로 업계 퇴출.]
이걸로 정말 끝인가?
복수한 건가?
이걸로 끝일 리가 없다.
천재용 손에 들린 패가 한두 개가 아닐 거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오겠지.
하지만 복귀한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천재용의 오 년 치 메일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 그의 더럽고 추잡했던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복귀해 볼 테면 해 봐.
내가 다시 바닥으로 끌어내려 줄 테니까.
그때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서이렌이 나를 향해 속삭였다.
“대표님. 빈 팀장님이 커피 사 오면 그거 드시고 조금 릴랙스하세요. 심장 박동 수가 평소보다 올라갔네요.”
서이렌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서이렌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이렌 씨. 혹시 투시 능력 같은 것도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어라? 대표님, 지금 귀까지 빨개지셨는데요?”
“빨리 말해 봐요. 투시 능력 같은 것도 있냐고요.”
“지금 영화 찍으세요?”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대체 내 심장 박동 수는 어떻게 안 건데요?”
“이거 보고요.”
서이렌이 태블릿 PC를 들어서 나에게 보였다.
PC에는 스마트워치와 연동되어 실시간으로 신체 리듬을 체크하는 화면이 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내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와 화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니 그게 왜 거기서 나오는 겁니까?”
“빈 팀장님이 설치하셨어요. 아주 잘 나오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한 세상이네요.”
“허.”
나는 새초롬하게 웃는 서이렌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다행이다. 투시 능력 같은 건 없구나.
참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때 빈선예가 활짝 웃으며 차 문을 열었다.
“자. 커피 들어갑니다.”
* * *
다음 날 밤, 여우비 12화 방송 시간이 다가왔다.
지난 10화, 11화는 기사가 터지고 난 뒤, 방송됐던 회차라서 그 덕을 크게 봤다.
하지만 이번 회차는 다르다.
진지혜를 대신해서 서이렌의 분량이 많아질 거라는 기사까지 뜬 상태다.
이 상황에서 반응이 별로면 애꿎은 서이렌이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때 서울 인근의 모텔에서 한 남자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잠적한 천재용이었다.
천재용은 여우비 시그널을 보자 입술을 비틀었다.
핸드폰을 손에 든 천재용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울리고 누군가 그의 전화를 받았다.
[아. 선배님.]
남자의 목소리에는 싫은 눈치가 역력했다.
“오늘 여우비 끝나면 내가 보낸 대로 기사 올려 줘.”
[기사 봤는데 서이렌 까는 내용이잖아요. 아직 방송도 안 했는데 서이렌이 못할지 어떻게 알고 그걸 올려요?]
“데뷔한 지 고작 두 달 된 신인이야. 잘하겠어? 그리고 고작 일주일 만에 대본 수정하고 재촬영한 거라고. 분명 내용에 구멍이 숭숭 뚫렸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가만히 천재용의 말을 듣고 있던 후배 기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그걸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너 작년에 한류스타 유석 캐스팅 정보 흘려서 드라마 엎어질 뻔한 거 기억 안 나?”
[아니. 그걸 왜 지금 꺼내는 겁니까?]
“잘 생각해봐. 내가 그때 녹취록 들고 있어. 이거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너도 나처럼 되는 거야. 알아?”
[너무 하시네요.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잔말 말고 방송 끝나자마자 기사 올려. 오늘 방송 분명히 반응 안 좋을 거니까 상관없어.”
[그걸 선배님이 어떻게 장담하시는데요?]
“내가 이 바닥 생활이 몇 년이야?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대체 서이렌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시는데요?]
“됐으니까 넌 기사나 올려.”
천재용은 전화를 끊고 텔레비전을 노려봤다.
그의 촉이 말하고 있다.
서이렌이 나타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천재용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텔레비전을 노려보며 속삭였다.
“내가 이대로 혼자 죽지는 않아.”
* * *
12화가 시작하자마자 연홍이 독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동안 진지혜가 찍은 장면과 대역이 새로 찍은 장면을 합성하여 그럴듯한 화면이 나왔다.
천향원에 간자로 숨어 있던 기생 매향이 내려친 단도에 얼굴이 베인 연홍이 숨을 헐떡였다.
그때 윤태원과 단오가 나타나 얼굴의 반을 피 칠갑한 진지혜 대역을 업고 사라졌다.
시작한 지 십 분 만에 벌어진 사건에 시청자들은 깜짝 놀랐다.
- 뭐야? 진지혜 사망엔딩?
- 진지혜는 밉지만, 연홍 캐릭터 아까운데. 우리 윤 악사님이랑 이뤄져야 한다고.
- 주인공이 도망갔는데 방법이 없지. CG로 대신할 것도 아니고.
- 얼굴에 칼 맞은 건 대역 때문에 그런 건가?
└그런 듯. 초반엔 대역인 거 표났는데. 피 칠갑한 다음부터는 표 안 나더라.
종사관 이성윤은 연홍이 다친 지도 모르고 연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송치석이 일부러 판을 깐 중요한 자리이기에 반드시 연홍이 이 자리에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연홍은 보이지 않고 송치석은 이성윤에게 천향원에 숨어든 간자와 내통한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그때 면사를 쓰고 나타난 연홍.
송치석은 연홍이 아닐 거라 의심하고 면사를 벗도록 강요한다.
“기녀로 연회에 왔으면 응당 얼굴을 보여야 하지 않겠소?”
“저는 오늘 예기로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지요.”
“흥.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어젯밤 천향원에 자객이 들어 기생하나가 얼굴에 피 칠갑하고 쓰러졌다 하던데 설마하니 그것이 연홍 너인가?”
“어제 천향원에 들이닥친 자객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온데, 어찌 종사관 나리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저는 그것이 더 신기하옵니다.”
“말을 돌리고 있군. 여봐라. 저년의 얼굴에 가려진 면사를 벗겨 내라.”
송치석의 명령에 관병들이 연홍에게 몰려들었다.
이성윤이 나서서 그녀를 도와주려는데 연홍이 손을 들었다.
“놔라. 내가 스스로 벗겠다.”
연홍은 관병들을 뒤로 물리더니 얼굴을 가린 면사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 한쪽 뺨을 먼저 보였다.
단도에 베어 살점이 떨어져 나간 연홍의 얼굴을 보고 관병들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송치석도 그 모습을 보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되었다. 그 처참한 얼굴을 어서 가려라.”
“벗으시랄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가리라 하시는군요.”
“기생이 얼굴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다시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터. 네가 왜 그리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송치석이 관병들을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연홍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연홍을 데리고 온 윤태원과 단오가 그녀에게 달려갔다.
진지혜의 대역이 대사까지 치며 연기한 장면이라 티가 많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극에 몰입하여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다.
방으로 실려 온 연홍은 다시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단오의 손을 맞잡았다.
“단오야. 이제 내가 윤 악사님을 도와야 한다.”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연홍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단오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저자들이 계속 천향원을 주시할 것이다. 네가 나 대신 연홍이 되어 악사님을 도와 드리렴.”
“아가씨. 제가 어찌 연홍 아가씨가 되란 말씀이십니까?”
“내게 춤을 배운 유일한 사람이 너다. 넌 할 수 있어.”
“아가씨.”
연홍은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부채를 단오의 들려 주며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연홍으로 분장한 단오가 걸어 나오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 오오. 작가님 천재 아님? 일주일 만에 이걸 다 생각해 내신 것임?
- 진짜 연홍은 안 죽은 거지?
└치료하러 절에 갔다고 예고편에 나옴
- 시발. 나 운다. 연홍 분장한 서이렌 봄? 완전 여신이야. ㅠㅠ.
- 예고편 보니까 이진아가 인터뷰에서 말한 장면 나오네. 진지혜 도망가고 에피소드 통으로 날아가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단오가 대신할 줄은 몰랐다. 작가님 진심 대단하신 듯.
수정된 대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대본을 바꾸고 촬영을 다시 한 여우비 제작사에 찬사를 보내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모텔에서 여우비를 시청한 천재용은 리모컨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박수현 작가는 왜 갑자기 글빨이 살아난 거야. 짜증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