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4화 (25/261)
  • #24화. 덕후들의 정모

    어느새 옆자리로 다가온 빈선예가 놀라 외쳤다.

    “뭐예요? 이게?”

    빈선예는 두 눈을 비비더니 내게 물었다.

    “혹시 대본이 바뀌었어요?”

    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을 확인한 스태프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나는 바뀐 내용을 천천히 확인했다.

    분량이 늘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대본 두 개를 날려 버렸는데 개연성과 재미가 살아남았을까?

    빈선예는 내 곁에 콕 붙어서 함께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점점 커졌다.

    연홍이 얼굴을 다치는구나.

    연홍이 얼굴을 다쳐 면사를 쓰고 다니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진지혜는 도망갔지만, 연홍 캐릭터는 살린 것이다.

    독에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 연홍 대신에 단오가 얼굴을 가리고 연홍 역을 대신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기존의 스토리는 그대로 유지하되 더 흥미로워졌다.

    단오의 정체가 발각될 위기가 새롭게 추가되면서 다소 밋밋하게 곁가지로 나오던 천향원 이야기가 활기를 띠었다.

    역시 박수현 작가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정비하다니.

    그때 내 곁으로 서이렌과 진기오 감독이 다가왔다.

    진기오 감독은 눈에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제작사인 소울은 오늘 아침까지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했다고 들었다.

    “대본 보셨죠?”

    “예. 봤습니다.”

    “서이렌 씨한테는 내가 설명했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진행될 추가 촬영은 B팀이 전담하게 될 겁니다.”

    “당장 다음 주가 방영인데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요?”

    “맞춰야죠.”

    진기오 감독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서이렌 씨가 도와줘야 합니다. 갑자기 분량이 늘어나서 놀랐겠지만 사실 신인에겐 이런 기회가 흔치 않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오 분 분량이던 조연이 단숨에 서브로 올라섰다.

    이건 황금 같은 기회다.

    진기오 감독이 서이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주일간 미친 듯이 달려야 할 겁니다. 할 수 있겠어요?”

    서이렌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감독님. 제가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요?”

    “뭘 말입니까?”

    “제가 사실은 강철 체력입니다. 일주일 동안 한숨도 안 자고,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

    서이렌이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겠지.

    그녀는 마네킹이니까.

    하지만 진기오 감독은 서이렌의 말을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알아듣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서이렌 씨만 믿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NG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처리해 볼게요.”

    * * *

    토요일 오후, 사람들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이락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이락이 사는 곳도 사람들로 넘치지만 강남과는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다.

    이락은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화려한 세상 속에 자신이 툭 하고 홀로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방인.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락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집에 가고 싶다.’

    이락은 ‘진짜 서이렌 1호팬’과의 너무 쉽게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닌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이락의 등 뒤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서이렌 1호팬’ 님?”

    이락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곽이석이 뒤에서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곽이석은 평소에 명품 정장과 수천만 원이 호가하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한눈에 봐도 재벌 2세였으나 오늘만은 수수하게 청바지에 셔츠를 차려입고 나왔다.

    평범한 옷차림이라도 사람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락은 자신과는 천지 차이인 곽이석을 보며 한없이 자신이 작아짐을 느꼈다.

    그때 곽이석이 다가와 이락 바로 앞에 서서 말했다.

    “이렇게 나이가 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하시네요. 그 어린 나이에 해킹도 하시고요.”

    “아. 그거는 훈련받은 거라서…….”

    이락은 차마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닙니다. 1호팬 님이 기레기 메일을 해킹해 주시지 않으셨으면 우리 이렌 님께서 이렇게 빨리 루머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겠어요? 정말 존경합니다.”

    “어휴. 그런 말씀 마세요.”

    이락은 곽이석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곽이석은 귀까지 빨개지는 이락을 보며 웃었다.

    “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예.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어요. 예약은 제가 미리 해 놨습니다.”

    곽이석은 이락을 데리고 강남 모처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토요일 대낮인데도 식당 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여기 맛집 맞는 건가요?”

    “확실한 맛집입니다. 드셔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곽이석은 오늘 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누군가 프러포즈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두 남자가 들어오자 깜짝 놀랐다.

    곽이석과 이락은 직원들이 깜짝 놀란 것도 모르고 자리에 앉자마자 서이렌 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 그럼 저랑 같이 싸워 주셨던 realrock이 1호팬 님이셨어요?”

    곽이석은 지난번 서이렌의 성형 기사가 떴을 때 가장 악질적인 댓글을 달았던 악플러와 싸운 적이 있는데 자신이 밀리고 있을 때마다 나타나서 함께 싸워 준 realrock이라는 유저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야말로 놀랍네요. tworock이 찐1호팬 님이라니 놀랍습니다.”

    “이락 씨라고 했죠?”

    “예. 외자로 이락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랑 이름이 비슷하네요. 저는 이석, 그쪽은 이락.”

    “어. 그렇네요.”

    “하하. 이거 정말 신기합니다. 인터넷상에서 이락님은 ‘서이렌 1호팬’이고 저는 ‘진짜 서이렌 1호팬’이잖아요.”

    “정말 그렇네요. 세상에 진짜 별일이 다 있네요.”

    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락이 평소에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정찬이 눈 앞에 펼쳐지자 이락의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락이 뭘 어떻게 먹어야 할지 당황하자 곽이석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예의 갖추고 그런 곳 아니니까 그냥 드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이죠.”

    곽이석이 접시의 음식을 한 움큼 집어서 입에 밀어 넣었다.

    어머니와 홀로 살다가 중학생이 돼서야 처음으로 아버지란 사람의 집에 들어갔던 곽이석은 이런 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곽이석의 배려에 이락도 긴장감을 풀고 포크를 손에 들었다.

    그때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리는 레스토랑에 유치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황한 이락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액정에 뜬 보스 최용팔의 이름을 본 이락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예. 그렇게 해요.”

    곽이석은 안절부절못하는 이락을 보며 괜스레 걱정되기 시작했다.

    레스토랑 구석에 가서 전화를 받는 이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온 이락이 곽이석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지금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이락은 죽기 싫으면 당장 돌아오라던 최용팔의 말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오늘의 메뉴인 스테이크가 나왔다.

    이락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지켜본 곽이석은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집이 어디예요?”

    “대연동이요. 역에서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아마 찐1호팬 님은 모르실 거예요.”

    이락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를 한 입도 못 먹고 일어서며 아쉬운 마음에 계속 음식을 쳐다봤다.

    그들이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검은색 외제 차가 보였다.

    그런데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차 열쇠를 곽이석에게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이락이 당황하는데 곽이석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태워다 줄게요. 그리고 저것도 가지고 가요.”

    놀란 이락이 뒤돌아보니 어느새 다가온 레스토랑 직원이 남은 음식을 모두 싼 포장을 건넸다.

    “받아 주십시오.”

    “어. 예.”

    이락은 당황하며 직원이 건넨 음식을 받아 들었다.

    포장이 잘되어 있어서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진짜로 가져가도 돼요?”

    “어휴. 그럼 아깝게 버립니까? 제 것도 이렇게 싸 가서 집에서 먹을 겁니다.”

    곽이석도 직원에게 포장된 음식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이락은 그제야 편한 마음이 들었다.

    “뭐 해요. 빨리 타요.”

    “예. 알겠습니다.”

    이락은 생전 처음 외제 차에 타자 기분이 이상했다.

    “제 침대보다 푹신해요.”

    “하하. 정말요? 칭찬 고마운데요.”

    곽이석의 차가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대연동으로 향했다.

    이락은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가는 내내 곽이석과 서이렌 이야기를 하면서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계속 뒤를 돌아보던 이락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불편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락은 백미러에 시선이 가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저기 뒤에 누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는데요.”

    “네?”

    곽이석이 놀라서 백미러로 확인하는데 도로에 차가 꽉 차 있어서 어떤 차를 말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저기 뒤에 3167 번호판 달고 있는 차 말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고 있어요. 제가 여기 적어 드릴게요.”

    이락은 차에 마련된 메모지에 차량 번호를 적어 줬다.

    곽이석은 뭔가 알겠다는 듯 생각에 빠졌다.

    “뭐 이상한 일 하시는 거 아니죠? 저 사람들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락은 특유의 감으로 뒤따라오는 차가 예사 차가 아님을 알아챘다.

    곽이석은 저들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겠죠.”

    “혹시 뒤쪽 세계에서 일하세요?”

    “그건 아니고 형님들이 보낸 차일 거예요.”

    “형님들이요? 중간 보스?”

    “아니요. 친형님이요.”

    “예? 왜 친형이 저렇게 사람까지 써서 미행하는 겁니까?”

    이락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피를 나눈 형제가 남보다 못할 때가 있더라고요. 제가 안타깝게도 딱 그런 집에서 자랐습니다. 1호팬 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서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별말씀을요. 저는 저쪽에서 내려 주세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따라 잡힐 테니까 저 앞에서 내려 주시고 신호 바뀌면 바로 건너세요.”

    “미안해요. 오늘 내가 만나서 밥 먹자고 해 놓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렇게 헤어지네요.”

    “저는 가서 이거 먹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1호팬 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곽이석의 차가 사거리 앞에 서자 이락이 차에서 내렸다.

    마침 사거리는 파란불이었고 다른 차량들은 쌩쌩 앞으로 내달렸다.

    이락이 내려서도 차는 떠나지 않고, 이락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미행하던 차는 거리를 유지하며 뒤에 서 있었다.

    그때 신호가 주황색으로 바뀌고 기다렸다는 듯이 곽이석의 차량이 앞으로 질주했다.

    뒤늦게 미행하던 차가 뒤쫓아 왔지만 이미 신호는 바뀌었고 곽이석의 차는 저 멀리 떠난 뒤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곽이석은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음식을 대충 냉장고에 넣어 놓고 방 안을 확인했다.

    곽이석은 내년 신사업기획서를 집에서 작성하고 있다.

    형님들이 자꾸만 직원을 이용해서 기획서를 훔쳐 가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작성하는 길이다.

    그때 곽이석의 핸드폰으로 알람이 들어왔다.

    곽이석은 굳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메시지를 확인하는 곽이석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뭐야?”

    곽이석에게 온 메시지는 이락이 보낸 것이다.

    이락의 메시지에는 곽이석을 뒤쫓던 차량의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3167 확인해 보니 막가파가 최근에 사용하는 번호판이더라고요. 막가파 놈들은 돈만 주면 이런 거 저런 거 안 가리고 다하는 질 나쁜 놈들입니다. 조심하세요.]

    이윽고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가 찐1호팬 님 음식 안에 몰래 뭘 좀 넣어 놨는데요.]

    “어?”

    메시지를 받고 놀란 곽이석이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처박아 둔 음식을 꺼냈다.

    비닐을 벗겨 내자 USB보다 작은 기계가 떨어져 나왔다.

    그때 다시 이락에게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거 한번 눌러 보세요. 그게…….]

    곽이석은 메시지를 읽다 말고 아무 생각 없이 작은 기계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작은 기계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곽이석이 기계를 놓치고 뒷걸음질 쳤다.

    대경실색한 곽이석은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았고 읽다 말은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거 한번 눌러 보세요. 그게 소형탐지기인데요. 주위에 도청기나 몰카가 설치되어 있으면 소리가 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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