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2화 (23/261)
  • #22화. 쇼타임

    다음 날 여우비 촬영장에 카니발 한 대가 도착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 주변을 살폈다.

    서이렌은 원래도 주위의 시선을 끄는 타입이지만 지금 스태프들이 힐끔힐끔 서이렌을 쳐다보는 것은 다른 이유다.

    역대급 신인 배우의 열애설.

    서이렌뿐만 아니라 함께 걷고 있는 내게도 시선이 몰렸다.

    나는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이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서서 말했다.

    “가요. 대표님.”

    저 깡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열애설 따위는 전혀 타격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서이렌이 놀라운 것보다는 든든했다.

    멘탈이 약했던 윤조는 스캔들 기사가 뜨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그때 윤조는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마음의 병으로 아파하는 내 배우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하지만 서이렌은 다르다.

    서이렌이 내 옆에 바짝 붙더니 나만 들을 수 있는 말로 속삭였다.

    “대표님. 저는 열애설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왜냐면 저는…….”

    “마네킹이라서요?”

    내가 서이렌이 하려는 말을 냉큼 빼앗아서 선수를 쳤다.

    “아뇨. 내가 대표님을 좋아하니까요. 그 기사가 사실이면 얼마나 좋아요.”

    서이렌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휘날리며 당당히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 * *

    팬파라치는 쏟아지는 항의 전화와 메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서이렌의 열성 팬들이 팬파라치에 총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이를 주도하는 것은 서이렌의 네임드 팬인 ‘서이렌 1호팬’, 이락이다.

    이락은 서이렌 데뷔 때부터 온갖 루머를 양산해 냈던 팬파라치 기사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SNS에 올렸고 팬들이 몰려들어 그것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팬들은 곧 팬파라치에 항의성 전화와 메일을 보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항의 전화와 메일을 보낸 증거를 SNS에 올리는 릴레이가 이어졌다.

    “무슨 아이돌 가수 화력이야.”

    “그러게요. 한류스타 유석 스캔들 터트렸을 때보다 반향이 큰 거 같죠?”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어차피 오는 메일 과반수가 외국에서 온 거라서 봐도 타격도 없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순수 국내 화력이에요. 서이렌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팬덤 화력이 넘사라고요.”

    얼떨결에 전화 응대를 담당하게 된 인턴 기자들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때 회의를 마치고 천재용과 기자들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인턴 기자들은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천재용은 팬파라치 업무가 마비되든 말든 자신이 터트린 기사가 역대급 조회 수를 기록한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천 기자. 후속 기사 준비할 거지?”

    부장의 말에 천재용이 뱀 같은 미소를 날리며 답했다.

    “당연하죠. 이번에는 이니셜이 아니라 본명을 공개할 겁니다.”

    “그 말은 스캔들을 입증할 증거도 같이 싣겠다는 말이겠지?”

    “이미 여우비 촬영장에 대기조 보내 놨으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이거 천 기자가 보유한 일 위 기사 타이틀을 천 기자 본인이 넘기겠는걸. 하하하.”

    부장이 너털웃음을 짓고 사라졌다.

    천재용은 촬영장에 보낸 대기조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다.

    [아무거나 다 찍어서 보내. 어차피 편집해서 내면 되니까.]

    천재용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대기조가 카메라를 들었다.

    흔히 대포라고 불리는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다.

    마침 오전 촬영을 마친 배우와 스태프들이 점심을 먹으러 밥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서이렌을 찾기는 수월했다.

    대기조는 서이렌의 곁에 딱 붙어 있는 원세강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대놓고 붙어 다니는군. 나야 찍을 사진이 많으니까 좋지만 말이야.”

    대기조는 서이렌과 원세강이 밥차로 이동하는 모습을 쉴 새 없이 카메라에 담았다.

    그때였다.

    자갈밭을 걸어가던 원세강이 비틀거리며 휘청거렸다.

    교통사고로 다친 다리가 갑자기 뻐근했던 것이다.

    원세강의 몸이 넘어가자 서이렌이 재빠르게 다가와 넘어지는 그를 낚아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넘어지는 여주인공을 구하는 백마 탄 기사님 포즈가 반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백팔십이 넘는 장신의 원세강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호리호리한 여성인 서이렌이 가뿐히 받아 내는 것을 보고 대기조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철저한 직업 정신 탓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오케이. 제대로 된 거 하나 건졌어.”

    대기조는 방금 자신이 찍은 사진의 가치가 대단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더 찍을 것도 없다.

    방금 찍은 사진으로 이미 게임 끝이다.

    대기조는 황급히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메모리를 꺼내 들었다.

    이런 건 시간이 생명이다.

    빨리 사진을 천재용에게 전달해야 한다.

    대기조는 앞에 찍은 사진은 모두 날리고 방금 찍은 것만 확인했다.

    연사로 찍힌 사진에는 서이렌이 넘어지는 원세강을 구해 내는 모습이 모두 찍혀 있었다.

    수많은 사진 중 하나는 마치 서이렌이 원세강을 뒤에서 껴안는 것처럼 찍혔다.

    사진을 확인하고 미소 지은 대기조가 그 사진들을 압축하여 천재용에게 보냈다.

    [대박 사진 입수.]

    * * *

    오늘 서이렌의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사무실로 돌아가 보니 빈선예가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왔습니다. 회사는 어땠어요?”

    빈선예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말도 마세요.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전화선 다 뽑아 놨어요.”

    “오늘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기로 했으니 잘하셨습니다.”

    빈선예는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뽑아 와 빈선예의 앞에 올려놨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긴장 푸세요. 이제 곧 상황이 역전될 겁니다.”

    빈선예는 자신의 앞에 놓인 물잔을 바라보며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대표님은 진짜. 이럴 때 보면 참 대범하단 말이야.”

    “그래서 나 따라온 거 아닌가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요.”

    빈선예는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그때 나와 빈선예의 핸드폰에 동시다발적으로 톡 알람이 도착했다.

    빈선예는 굳은 얼굴로 탁상 위에 올려진 태블릿 PC를 켰다.

    포탈에 접속하자마자 천재용이 갓 올린 따끈따끈한 기사가 메인 화면에 보였다.

    [단독 입수] 역대급 신인 서이렌 대표님과 다정한 백 허그.

    기사 제목을 읽은 빈선예가 화를 냈다.

    “이젠 날조까지 하네?”

    기사를 열어보니 낮에 있던 촬영장 사진이 묘한 구도로 편집되어 올려져 있었다.

    기사 제목처럼 마치 서이렌이 원세강을 백 허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기사를 보고 헛웃음을 한번 짓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깡기자님. 팬파라치 기사 뜬 거 보셨죠?”

    [뭡니까? 대표님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영화의 한 장면같이 나와서 보고 깜짝 놀랐다고요.]

    “그건 그렇고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을 먼저 풀 수 있을까요?”

    [알았어요. 그거 먼저 풀고 준비한 기사 풀게요.]

    “예. 그래 주세요.”

    [그런데 대표님은 오늘 이 사진이 찍힐 줄 미리 알고 있던 거예요? 어떻게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촬영장에 있던 거예요?]

    “천재용 레퍼토리야 뻔하잖습니까. 기사 먼저 쓰고, 나중에 오해 살 만한 사진 찍어서 올리는 거.”

    [그럼, 다 예상하고 준비한 거네요. 대표님도 대단하시네요. 지금 당장 기사 올릴 테니까 기다려요.]

    “깡기자님. 지금 말고 한 시간 후에 올려 주세요.”

    핸드폰 너머로 침묵이 흘렀으나 이내 깡기자가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요. 끓을 대로 끓게 나눴다가 찬물 끼얹으려는 거죠?]

    “그래야 임팩트가 있을 거 같아서요.”

    [원 대표님. 원래 별명이 생불 아니었나요? 왜 이렇게 무서워지셨대.]

    “부처님도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내실 겁니다. 호구처럼 당하기만 할 수는 없죠.”

    [그런 생각 아주 맘에 들어요. 오케이. 그럼, 한 시간 뒤에 기사 올릴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빈선예를 쳐다봤다.

    “이제 인터넷 창 닫아요. 한 시간 동안은 시끄러울 거니까.”

    “알았어요.”

    빈선예가 노트북 모니터를 닫았다.

    “그냥 지금 집에 갈래요? 서이렌 씨는 먼저 집에 갔어요.”

    서이렌은 지금 빈선예와 함께 산다.

    서이렌을 혼자 지내게 하는 것이 걱정됐는데 빈선예가 선뜻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겠다고 해 줘서 참으로 고마웠다.

    빈선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지금 운전하다가 사고 나요. 여론이 반전되는 거 보고 갈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평론가가 유출한 영상 건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것도 한꺼번에 터질 겁니다.”

    “그래요?”

    “깡기자가 동료 기자님께 부탁해 놨대요. 동시에 몽땅 터트릴 거예요.”

    “아. 그럼, 이제 편하게 기다릴 수 있겠네요.”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각종 루머와 의혹이 판을 칠 거다.

    그러나 딱 한 시간만이다.

    그 이후에는 우리가 흐름을 주도할 테니까.

    * * *

    원세강의 예상대로 인터넷은 초토화됐다.

    서이렌과 원세강의 가짜 백 허그 사진이 뜨자 사람들은 서이렌을 물어뜯기에 바빴다.

    - 이제 데뷔한 지 두 달이잖아. 벌써 연애질이냐?

    - 와. 진짜 연예인은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라더니 진짜네. 순수하게 생겨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회사 대표랑 연애. 큭큭. 세상 쉽게 산다.

    - 이름도 모르는 신인이 방송에 막 나올 때부터 알아봤음.

    - 서이렌 진짜 팬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신하냐.

    - 그때 뜬 촬영장 영상은 뭐야? 서이렌 매니저가 진지혜 때리려고 했잖아.

    - 아주 촬영장에서 둘이 연애를 한다고 광고를 하고 다녔구나.

    - 연애가 죄인가요? 왜 우리 이렌 님께 막말해요?

    - 연예인은 사람도 아니냐? 너희는 연애도 안 해 봤지?

    서이렌의 진짜 팬과 가짜 팬 그리고 이 상황이 재미있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인터넷은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기사가 올라온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미 천재용이 올린 기사는 가장 많이 본 기사 일 위로 올라섰다.

    약속했던 한 시간이 흐르고 깡기자는 첫 번째 기사를 인터넷에 올렸다.

    [단독 입수] 여우비 촬영장 비하인드.

    기사를 클릭하자 포토그래퍼 한승준이 찍은 고퀄리티의 파파라치 컨셉의 촬영장 사진이 촤라락 펼쳐졌다.

    파파라치처럼 숨어서 찍은 것도 아니었다.

    감독과 스태프들의 허락하에 찍은 사진이었다.

    한승준이 찍은 사진에는 서이렌이 넘어지는 원세강을 잡아 주는 사진이 연사로 모두 찍혀 있었다.

    팬파라치가 억지로 끼워 맞춘 사진의 원본인 셈이다.

    기사에는 여우비 제작사인 소울에서 팬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아니다.

    이건 내가 천재용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다.

    백 허그 사진이 찍힐 때를 떠올려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속절없이 허공을 배회하며 넘어지는데 서이렌이 달려와 나를 뒤에서 안았다.

    나는 그때 서이렌이 내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지금 찍힙니다. 웃어요.”

    서이렌 당신은 정말.

    팬파라치에서 찍은 사진에는 내 얼굴에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찍은 사진은 제작사의 협조로 이뤄졌기에 내 얼굴이 온전하게 실렸다.

    넘어지며 놀라는 내 적나라한 얼굴과 서이렌이 뒤에서 받아 줘서 안도하는 표정까지 모두 생생히 찍혔다.

    촬영장 사진이 풀리자 인터넷 여론이 돌변했다.

    - 백 허그 아니었네. 저게 무슨 백 허그냐.

    - 그래도 남자인데 조금 그렇지 않음?

    └이 새끼는 사람이 넘어지는데도 가만히 구경이나 할 사이코패스인가?

    - 인제 보니 스타탄생 대표라는 사람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는데?

    └스타탄생 대표가 원래 이자현 매니저였음. 올해 초에 교통사고 크게 났었잖아.

    - 여신님이 여신님 하셨다. 경배해라. 서이렌 덕후들아.

    - 서이렌 진짜 팬파라치한테 돈이라도 떼였나? 왜 저러지?

    └팬파라치가 원래 한번 물면 집요하게 이상한 기사 쓰잖아. 그냥 서이렌이 잘못 걸린 거야.

    - 촬영장 비하인드 안 찍고 있었으면 서이렌만 된통 당할 뻔.

    - 대표랑 서이렌이랑 닮지 않음? 분위기가 좀 비슷하지 않음?

    └미쳤어? 어디 여신님과 일반인 나부랭이를 비교해.

    └누가 얼굴이 닮았대? 분위기 말하잖아.

    └분위기 감별사 나셨네.

    인터넷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을 보자니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연예계는 환상을 파는 곳이다.

    말 그대로 환상이기에 작은 악의만으로도 그걸 깨 버릴 수 있다.

    이 유리구슬 같은 깨지기 쉬운 곳에서 나는 그동안 내 배우들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이렌은 그동안 내가 함께한 배우들과 달리 스스로 유리구슬 안에서 걸어 나와 함께 싸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때 내 핸드폰으로 톡이 들어왔다.

    깡기자가 보낸 톡이었다.

    [천재용 기사랑 평론가 기사 이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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