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촬영장 난입
내가 소리치자 진지혜가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스태프들이 다가와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원 대표, 실수라잖아요. 참아요.”
“이게 실수라고요? 종사관 역인 김태섭도 이렇게 매섭게 칼을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진지혜를 노려봤다.
진지혜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다.
오늘 촬영은 이 일을 계기로 단오가 메인이 되어 진행된다.
진지혜는 지금 유치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진지혜는 내 기세가 누그러질 것 같지 않자 뒤에 있던 진기오 감독에게 달려갔다.
“감독님. 저 정말 실수로 그런 거예요. 아시잖아요. 저 연기할 때 한번 몰입하면 다른 건 신경 못 쓰는 거.”
웃기시네. 그렇게 몰입력이 좋은 사람이 발연기 타이틀을 달고 사나?
진기오 감독도 진지혜를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촬영은 진행해야 했기에 나와 진지혜 사이에 서서 중재했다.
“촬영 중에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겁니다. 진지혜 씨가 실수했다고 하니까 원 대표도 좀 참으세요.”
나는 진기오 감독의 뒤에 숨은 진지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이렌 씨께 직접 사과하세요.”
내가 사과를 요구하자 진지혜의 눈빛이 번뜩였다.
서이렌은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불쌍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감독님, 선배님. 저는 괜찮아요.”
물기가 똑똑 떨어지는 서이렌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이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지혜만 ‘요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서이렌을 노려봤다.
나는 다시 한번 진지혜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아무리 조연이라도 여배우예요. 피가 보일 만큼 때린 건 진지혜 씨 잘못이지 않습니까? 사과하고 다시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참으라는 말인가?
진지혜는 스태프들의 분위기도 그렇고 주변에서 압박하자 결국 손을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어요.”
“아닙니다. 선배님. 저도 연기할 때 몰입하면 주변이 잘 안 보여요.”
서이렌이 진지혜의 사과를 웃으면서 받아 주자 진지혜는 뒷맛이 씁쓸했다.
촬영이 끝나고 밴으로 돌아온 진지혜는 매니저 유정운을 무섭게 노려봤다.
“나 매니저 바꿔야겠어.”
유정운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야. 무슨 소리야?”
“방금 원세강 못 봤어? 갑자기 달려 나와서 자기 배우 챙기는 원세강 못 봤냐고?”
“그러니까 내가 살살하라고 했잖아. 그걸 진짜로 때린 네가 잘못했어.”
“오빠 나 못 믿어? 나 실수한 거야.”
“처음 한 번은 나도 그러려니 했는데 세 번은 진짜 아니다.”
“봐봐. 무슨 일이 있어도 배우 편에 서야 하는 게 매니저의 본분 아니야? 나 진짜 매니저 바꿔야겠어.”
“야. 내가 얼마나 너를 위하는지 잘 알잖아.”
“뭘 위하는데?”
“너도 잘 알잖아.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유정운의 말에 진지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됐어. 빨리 집으로 가. 나 한시도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
진지혜는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지 안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어휴.”
유정운은 길게 한숨을 내뱉은 후에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 * *
진지혜가 간 뒤로도 서이렌의 촬영은 계속되었고 밤이 늦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스타탄생에 도착한 나는 상비약 상자를 꺼내왔다.
“빈 팀장님이 해 주세요.”
“예. 알았어요.”
빈선예가 서이렌의 종아리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급하게 약을 바르긴 했지만, 서이렌의 종아리는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빈선예는 걱정이 되는지 서이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안 아파요?”
“아파요.”
서이렌의 아프다는 말에 놀란 내가 고개를 돌렸다.
빈선예가 다급하게 서이렌에게 물었다.
“정말요? 어디가 아파요? 병원에 가야 할까요?”
서이렌은 두 손을 심장에 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슴이 아파요.”
“예?”
“아까 대표님이 저 때문에 촬영장에 난입하셨잖아요. 그때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거든요. 그때부터 가슴이 아픈 거 같아요.”
“뭐에요. 나는 진짜 아픈 줄 알고 놀랐잖아요.”
빈선예는 웃으며 서이렌의 종아리에 밴드를 붙였다.
놀랐던 나는 아까 일이 떠올라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촬영장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내 본 건 매니저 인생 십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아니 삼십오 년 내 인생에서도 없는 일이다.
어색해진 나는 모른 척하고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봤다.
촬영장에 간 동안 메일이 쌓여 있었다.
모니터링도 해야 하고 업무도 봐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빈선예와 서이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난리가 났다.
“이렌 씨. 사실 나도 오늘 대표님 행동 보고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이라뇨? 완전 멋있었는데.”
“우리 대표님 별명이 돌부처, 생불인 거 아세요? 나도 LOK 다녔을 때 선배님한테 들은 건데. 대표님이 성격이 착하다고 다들 대표님이랑 같이 일하고 싶어 했대요.”
“대표님 인기 많아요?”
“그럼요. 저길 봐요.”
빈선예와 서이렌이 업무에 열중하는 나를 바라봤다.
“잘생겼잖아요. 사실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대표님 얼굴이면 인기 많을 텐데 성격까지 좋으니 당연한 결과죠.”
“아. 우리 대표님. 너무 인기가 많으면 안 되는데.”
서이렌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 사실 ‘이렌 씨 같은 여신이 왜 평범한 대표님을 좋아하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대표님이 보면 볼수록 사람이 진국이긴 한 것 같아요.”
“혹시 빈 팀장님도 대표님 좋아해요?”
서이렌이 놀라 빈선예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예요. 사람이 좋다고 했지, 남자로 좋아한다는 건 아니라고요. 나도 이상형이 있다고요.”
“빈 팀장님 이상형은 뭔데요?”
잠시 고민한 빈선예가 입을 열었다.
“불쌍해 보이는 사람.”
“제가 방금 잘못 들은 걸까요?”
“맞게 들었을걸요. 난 내가 챙겨 주고 싶고 안아 주고 싶은 사람이 좋아요. 대표님은 그런 면에선 꽝이죠. 다 잘하니까. 내가 챙겨 줄 게 없어.”
“오호.”
서이렌은 뭔가 크게 감동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메일을 다 확인한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갑시다.”
* * *
이틀 뒤, 인터넷이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
평론가라는 유저가 올린 글에는 본문이 없이 짧은 영상만 올려져 있었는데 영상의 내용이 무려 여우비 촬영 현장이었다.
몰래 찍은 것 같은 구도에 십 초밖에 안 되는 짧은 영상에는 누군가 촬영장에 난입해 진지혜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영상이 뜨자마자 인터넷은 달아올랐다.
- 이거 여우비 촬영 현장 아닌가?
- 진지혜 연홍 분장하고 있잖아. 여우비 촬영장 맞아.
- 저 사람은 누구지? 저런 사람이 여우비에 출연하나?
└저 사람 옷을 봐라. 현대인이 사극에 출연하겠니? 그냥 스태프잖아.
- 진지혜 한 대 맞을 분위기네. 대체 저 사람이 누구야? 진지혜 남자친구인가?
- 저 사람이 서이렌 매니저라는데.
- 무슨 매니저가 저렇게 잘생겼냐? 저화질에서도 잘 생김 뿜뿜이네.
- 서이렌 매니저가 진지혜한테 왜 저럼?
- 진지혜랑 서이렌 매니저랑 사귀나? 혹시 삼각관계?
그때 누군가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 내가 여우비 보조 출연해서 아는데 서이렌 매니저가 화나서 진지혜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서이렌 매니저랑 사귀는 거 같음. 둘이 한시도 안 떨어지고 촬영장에서도 꼭 붙어 있더라.
보조 출연자라는 사람이 남긴 댓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영상은 곧바로 지워졌지만 그새 그걸 저장한 수많은 사람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고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팬파라치에서 이니셜 기사를 내놓았다.
[대표와 열애 중인 역대급 신인 배우는 누구?]
누가 봐도 요즘 역대급 신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사람은 서이렌뿐이다.
나는 싸늘한 얼굴로 기사를 클릭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는 팬파라치 천재용의 작품이었다.
기사에서는 역대급 신인 배우의 근황을 상세히 적어 놨다.
촬영 내내 로드 매니저도 아닌 대표가 배우를 지키고 있고, 집에도 대표가 데려다주는 등 배우와 대표가 이십사 시간 내내 붙어 다닌다고 쓰여 있었다.
또한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이 그 증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어이없어하는 와중에 내 핸드폰과 회사 전화로 쉴 새 없이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빈선예는 내 눈치를 보고 곧바로 전화선을 뽑고 돌아왔다.
인터넷을 확인하고 있던 나는 영상을 처음 올린 사람이 평론가라는 사실을 알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본 미래에서 평론가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며 진지혜가 극에서 하차하게 되고 지수연이 어부지리로 분량이 많아졌다.
이제 곧 정체가 밝혀질 텐데.
엉뚱하게도 서이렌의 등장으로 미래가 틀어졌다.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온 빈선예가 조용히 물었다.
“대표님. 어떻게 해요? 이니셜 기사지만 댓글을 보니 다들 우리 이렌 씨 거론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이니셜 기사가 제일 대응하기 어렵다.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반박 기사를 내면 괜히 불을 지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윤조와 함께 스캔들을 겪지 않았던가?
나는 그 스캔들로 윤조를 잃었다.
이런 추잡한 루머로 다시 내 배우를 잃을 순 없다.
“대표님. 안 되겠어요. 우리 그냥 반박 기사 내죠.”
“안 됩니다.”
“왜요? 이렇게 당하고 있으라고요? 다들 우리 이렌 씨 이름 거론하면서 욕하고 있다고요.”
“천재용 레퍼토리야 뻔합니다. 우리가 반박 기사를 내면 아마 꼬투리를 잡고 물어질 겁니다.”
“대표님은 무슨 좋은 생각이 있는 거죠? 그렇죠?”
나는 천재용이 미래에 어떻게 무너지는지 이유를 알고 있다.
문제는 내게 그 증거가 없다는 거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나는 걱정하는 빈선예를 뒤로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지루한 통화음 끝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세강아. 무슨 일이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선배님. 바쁘세요?”
[방금 강의 마치고 나오는 길이야. 왜 그래?]
“동아리 때 같이 만든 프로그램 있잖아요. 데프콘쓰리요. 기억하세요?”
[와 추억이네. 그 이름 오랜만에 들어 본다.]
“자료실에 들어가면 있을까요?”
[언제 적 자료실이냐? 이제는 학교 레포지토리에서 관리할 거야.]
“그런데 제가 계정이 없어요.”
[내 아이디랑 비번 알지? 동아리 때 사용하던 거 그대로야. 그걸로 들어가.]
“이런 거 막 알려 주셔도 되나요?”
[내 아이디, 비번은 이미 공공재다. 그냥 써라.]
“고마워요, 선배.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일이 있는데 데프콘쓰리 좀 써도 되겠죠?”
[데프콘쓰리 만든 놈이 그게 무슨 말이야? 뭘 고민해. 그냥 써.]
“다음에 술 한잔 살게요.”
[그래. 얼굴 좀 보자. 네 얼굴 잊어버리겠다.]
전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내가 노트북을 붙잡고 뭘 하자 빈선예가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대표님.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데프콘 3 레포지토리를 확인해 보니 내가 개발에 참여했을 때보다 바뀐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참여했을 때 버전이 v0.1.0이었는데 가장 최신 버전은 v6.1.3이었다.
빈선예는 내가 아무 말도 없이 키보드만 두드려 대자 궁금함을 못 참고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표님. 이게 뭡니까? 지금 일하고 계신 거예요?”
나는 빈선예를 돌아보며 말했다.
“빈 팀장님. 제가 한국대 나온 건 아시죠?”
“또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알아요. 대표님 공부 잘하신 거 잘 알고 있다고요.”
“제가 무슨 과 나왔는지도 기억하시나요?”
“무슨 과인지는 나도…….”
어물거리던 빈선예의 두 눈이 커졌다.
“컴공? 컴퓨터 공학과?”
“맞습니다. 제가 한국대 해킹동아리 데블스 17기거든요.”
나는 데프콘 3의 최신 버전 소스를 체크아웃 받고 심호흡을 했다.
데프콘 3은 해킹 프로그램이다.
메일 계정 정도는 쉽게 해킹할 수 있을 거다.
천재용. 대단하네.
돌부처, 생불이라 불리던 나를 데블스로 돌아오게 만들다니.
비장한 결심을 한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