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화 (20/261)
  • #19화. 평론가

    밴에 탄 진지혜가 불만을 터트렸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진지혜는 10화 대본을 유정운 매니저에게 던지며 화를 냈다.

    유정운은 바닥에 떨어진 대본을 주우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에피소드 한 꼭지 주는 거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지금 그게 매니저로서 할 말이야? 아니 내 분량 다 뺏기게 생겼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진지혜는 분을 못 참겠는지 들고 있던 빈 물병을 구기며 바닥에 내던졌다.

    “작가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바뀐 내용이 훨씬 재미있지 않아?”

    “그러니까 그 재미있는 걸 왜 서이렌을 주냐고? 서이렌이 인기가 별로였으면 내가 이 에피소드 주인공이었을 거 아니냐고?”

    진지혜의 화난 음성이 밴의 문틈 사이로 새어 나왔다.

    * * *

    10화 대본을 읽은 빈선예의 입이 딱하고 벌어졌다.

    “이거 원래 진지혜 분량 아니에요?”

    빈선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죠. 연홍이 끌고 갈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오가 노비인 것을 이용해 내용이 흘러가잖아요. 작가님이 스토리를 보완하신 게 맞는 거 같아요. 우리는 수혜자고요.”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암튼 저는 좋아요. 이렌 씨가 이 드라마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지만 분량도 많지 않고 감초 수준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러고 보니 오늘 단오 춤추는 거 방영되는 날이죠?”

    내 말에 빈선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아하. 그렇네요. 이렌 씨 역대급으로 귀엽게 나올 건데. 하하.”

    빈선예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알람까지 등록하고 싱글벙글했다.

    그리고 그날 밤, 빈선예가 고대하던 8화가 방영됐다.

    이성윤과 함께 도망치던 홍리아는 말에서 떨어져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이성윤은 기억을 잃은 홍리아를 천향원이라는 기방에 맡긴다.

    천향원은 보통의 기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왕실의 밀명을 수행하는 비밀결사 조직이 운영하는 곳이다.

    수배 중인 역적의 딸을 이곳에 숨기니 송치석 일당은 홍리아의 행적을 찾지 못한다.

    천향원의 악사이자 정보 담당을 맡은 윤태원은 기억을 잃고 안채에 숨어 있는 홍리아를 보고 놀란다.

    사실 그의 본명은 홍원.

    홍리아의 배다른 오라비다.

    홍리아의 아버지와 천향원 기생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 만난 여동생 홍리아를 돕기로 한다.

    윤태원이 잠시 천향원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연홍이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한밤중에 밖으로 나온다.

    단오는 차가운 밤바람에 연홍이 고뿔이라도 걸릴까 봐 염려되어 손난로를 챙기러 안채로 들어갔다.

    마침 잠이 오지 않아 천향원 정원을 산책하던 윤태원이 연홍과 마주친다.

    서로를 연모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때 윤태원이 항상 허리춤에 차고 있는 피리를 들었다.

    윤태원의 피리 소리가 천향원에 울려 퍼지자 연홍의 붉은 치마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 진지혜. 오늘 진짜 예쁘게 나오네.

    - 난 저 피리 소리 나올 때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너무 애절해.

    - 이윤석 핸드싱크 잘 맞는 거 보소. 연습 많이 했나 보다.

    └그러게. 진짜 피리 부는 거 같이 나오네. 저런 장면 엉성하면 퀄리티 확 떨어지는데.

    - 배우, 연출, OST 삼위일체네. 여우비 명장면 3위안에 들 듯.

    - 이윤석 눈빛 너무 좋아. 연기 너무 잘하잖아.

    숲 엔터에서 8화를 모니터링 중이던 진지혜는 자신의 촬영분이 잘 뽑히자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매니저 유정운은 진지혜의 기분이 풀리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연홍의 춤사위 장면이 끝나고 단오가 등장했다.

    단오가 등장하자마자 웃고 있던 진지혜의 입술이 비틀렸다.

    다음 날 아침 연홍의 세숫물을 가져온 단오는 연홍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리 웃는 것이냐?”

    “아닙니다.”

    단오는 어제 일을 떠올리며 광대를 주체하지 못했고 결국 참지 못한 연홍이 물었다.

    “말해다오. 대체 무엇이 너를 그리 웃게 하는 것이냐?”

    “저. 그것이 다름이 아니오라…….”

    연홍이 추궁하자 단오는 결국 입을 열었다.

    어젯밤의 회상 장면으로 전환됐다.

    연홍을 위해 손난로를 들고 온 단오는 피리 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단오는 연홍과 윤태원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자 마치 제 일처럼 기뻐했다.

    “아가씨. 눈이 부셔서 소인은 쳐다볼 수도 없습니다.”

    단오는 아이 같은 해맑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단오는 들고 있던 손난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연홍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저 멀리 연홍이 실루엣이 보였고 단오가 뒤뚱거리며 연홍의 춤사위를 따라 추는데 그 모습이 마치 태엽을 감으면 돌아가는 인형 같았다.

    급기야 연홍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한 바퀴 도는 걸 따라 하던 단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이쿠.”

    단오의 소심한 비명이 웃음을 자아내며 회상 장면이 끝났다.

    연홍은 엉덩이를 만지는 단오를 보며 말했다.

    “춤을 배우고 싶으냐?”

    단오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쇤네가 무슨 춤입니까? 저는 그저 연홍 아가씨가 춤추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합니다.”

    “아니다. 내 시간을 내 보마.”

    “아가씨. 저 같은 걸 위해서 어찌 아가씨의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연홍은 단오가 당황하자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는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볼에 바람을 넣고 입을 앙다문 단오가 또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 미친. 너무 귀여워.

    - 서이렌 미쳤네. 졸라 귀여워.

    - 단오 인생짤만 여러 개 나왔다. 뒤뚱거리며 춤추던 거랑. 방금 볼 빵빵하게 나온 거.

    - 서이렌은 어쩜 뚝딱거려도 저렇게 귀여울까?

    - 나 서이렌 좋아했네. 어디서 팬질하면 되냐? 요즘도 팬클럽 같은 거 있나?

    └그런 거 없고 SNS 하셈. 거기 다 모여 있어.

    └서이렌 1호팬 계정 팔로우 고고.

    여우비 8화는 호평으로 끝났고 인터넷 커뮤니티는 온통 여우비 이야기로 가득 찼다.

    주인공인 이진아와 김태섭은 물론 오늘 인생 연기를 선보인 이윤석과 진지혜의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 팔 분 출연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서이렌이 제일 대단했다.

    커뮤니티와 SNS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모니터링하던 내 눈에 이상한 글이 보였다.

    [서이렌 발연기]

    [서이렌 굴욕짤 대방출]

    [서이렌 스폰 루머]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이렌 스폰 루머’라는 글을 클릭했다.

    다행히 글은 제목만 거창했을 뿐, 별 내용이 없었다.

    회사도 크지 않고 쌩 초짜인 서이렌이 대작에 캐스팅된 게 분명 스폰이 있어서 그런 거라는 추측성 글이었는데 댓글이 만선이었다.

    - 루머 유포 당당하게 하네.

    - 얘. 여배우 악플러로 유명하잖아. 맨날 이진아 까고 다니더니 이제 서이렌으로 타겟이 바뀌었네.

    - 아직도 이진아 까고 다닌다. 내가 아이돌 시절부터 찡아 팬이라서 알아. 찡아 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이 정병이 계속 따라다님. 죽지도 않아.

    - 사실 서이렌 정도면 지금 역이 너무 작은 거 아님? 당장 주연을 해도 모자란 판에 무슨 스폰이라는거야.

    - 여러분들 이 글 무시하세요. 제가 소속사에 PDF 따서 보냈어요.

    다행히 댓글 대부분은 서이렌을 옹호하고 있었다.

    문제는 서이렌에게 악플러가 붙었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배우는 연기로 승부한다’라는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다.

    루머나 스캔들로 배우의 본업인 연기를 가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배우도 사람이다.

    자신에게 저런 악플이 달리는데 어느 누가 상처받지 않겠는가?

    뿌리부터 싹을 잘라야 한다.

    할 수 있다면 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악플러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곧바로 숲 엔터의 이진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 대표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안 주무셨죠?”

    [방금 여우비 끝났는데 그거 모니터링했죠. 그런데 이 밤에 웬일이세요?]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혹시 평론가라는 인터넷 유저를 아세요?”

    보이지 않았지만, 이진아의 매니저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평론가가 서이렌 씨 악플도 달고 다니나요?]

    “예. 그렇습니다. 상황을 지켜봤는데 최근 들어 부쩍 심해져서요.”

    [하. 그 새끼는 진짜 여배우들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잡으려고 노력은 해 보셨나요?”

    [그렇지 않아도 진아도 그 사람이 남긴 글이랑 댓글을 의식하기 시작해서요. 조만간 경찰에 수사 요청하려고요.]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평론가가 진아 말고 서이렌 씨한테도 붙었다면 수사 진행하면서 서이렌 씨 이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저희는 손도 안 대고 악플러 잡는 건데요. 저희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기엔 악플을 직접 겪은 기간도 짧아서요. 숲 엔터가 앞에 나서 주시면 저희야 고맙지요.”

    [다행이네요. 그럼, 정식으로 수사 요청하면 원 대표님께도 알려 드릴게요.]

    “예. 그럼, 끊겠습니다. 쉬세요.”

    이진아의 매니저와 전화를 끊은 나는 생각했다.

    이제 곧 시작인가.

    * * *

    호평 속에 방송된 여우비 8화의 시청률이 떴다.

    12.4%

    첫 화 시청률이 6.8%인 것을 생각하면 거의 두 배 정도 시청률이 올랐다.

    9화의 시청률은 13.1%

    절대적인 시청률이 오른 것도 좋았지만 추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여우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꾸준히 시청률이 상승했다.

    이 말은 여우비를 보다가 이탈하는 시청자가 없고 유입이 꾸준하다는 것이다.

    이제 악플러를 잡고 단오라는 캐릭터의 분량이 늘어날 때만 기다리면 된다.

    촬영장에 가 보니 태양제과에서 보낸 간식차, 커피차가 도착해 있었다.

    피치업 광고 성공으로 곽이석도 회사에서의 입지가 크게 올라갔다고 들었다.

    바쁠 텐데 이렇게 촬영장까지 챙기다니 곽이석의 꼼꼼함에 놀랐다.

    그때 10화 촬영이 시작된다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촬영은 연홍이 단오와 틀어지는 모습을 찍는다.

    천향원에 숨어 있던 홍리아에게 위기가 닥치고, 그녀가 천향원의 광에 갇히는 벌을 받게 되자 연홍이 일부러 단오도 광에 갇히게 해서 윤태원이 보낸 소식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천향원 마당 한가운데 단오가 무릎 꿇려 있었다.

    회초리를 든 연홍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연홍과 단오는 사전에 이렇게 하기로 합을 맞춘 상태이나 사정을 모르는 동료 기생들은 이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빈선예는 함께 긴장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오늘 이 신에서 서이렌은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

    서이렌이 일어서서 치마를 들치자 그녀의 가녀린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선예가 내 옆에 꼭 붙으며 작게 속삭였다.

    “어휴, 저걸 어떻게 봐요. 이거 연기니까 안 아프게 때리겠죠?”

    “그럼요. 아까 리허설 보셨잖아요. 그냥 시늉만 하고 효과음이랑 연출로 넘어갈 겁니다. 아무리 연기라도 배우 몸에 누가 상처를 내려고 하겠어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촬영장에 무시무시한 회초리의 타격음이 들렸다.

    나는 순간 내 옆에 딱 붙은 빈선예를 옆으로 물리고 앞으로 다가섰다.

    진지혜는 들고 있던 회초리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긴장해서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나 봐요.”

    서이렌의 종아리에는 새빨간 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촬영이 재개되고 다시 한번 촬영장에 회초리의 타격음이 들렸다.

    진지혜는 이번에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떡하지. 나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가네.”

    다시 한번 NG가 나고 세 번째 촬영.

    또다시 진지혜가 있는 힘껏 서이렌의 종아리를 치자,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헤치며 서이렌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가녀린 종아리는 붉게 자욱이 남았고 실핏줄이 터졌는지 피가 보였다.

    나는 이성을 잃고 진지혜에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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