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늘어나는 분량
여우비의 1화 소제목이 뜨고 여주인공인 홍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1화는 주인공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서이렌이 분한 단오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홍리아는 대대로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의 딸이다.
남동생인 홍윤이 대를 잇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홍리아는 그것을 몰래 따라 배웠다.
명랑한 성격의 홍리아는 남동생과 옆 동네잔치에 놀러 갔다가 지나가는 비를 만난다.
비를 피하며 우연히 만난 사람은 신임 종사관 이성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저자에 나온 이성윤은 암어가 적힌 쪽지를 흘린다.
이성윤이 흘린 쪽지에는 청나라 간자의 암어가 적혀 있었고 홍리아가 그것을 줍는다.
한학에 정통한 홍리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이성윤에게 돌려주기 위해 찾아간다.
쪽지를 잃고 위기에 처한 이성윤의 앞에 홍리아가 나타나며 1화가 끝났다.
1화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어 잠시도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자 2화 예고편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서 예고편이 꽤 길게 나갔다.
주·조연 사인방의 모습이 차례로 나오며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진지혜가 분한 연홍 역이 나올 때 옆에 서 있던 단오도 한 장면이 나왔다.
연홍 옆에서 떡을 먹고 있는 단오가 삼 초 정도 스쳐 지나갔고 드디어 2화 예고편이 끝났다.
“다 같이 박수!”
첫 방송이 꽤 잘 뽑힌 것 같아서 스태프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반응 어때요?”
스태프들이 회식에 참여한 소울의 홍보팀 직원에게 달려가 물었다.
홍보팀 직원들은 낮에 기자들에게 전달했던 홍보 기사를 체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인터넷 댓글도 호의적이네요. 박수현 작가님 칭찬도 많네요. 드디어 잘하는 거로 돌아왔다고 드라마 팬들이 특히 좋아해요.”
“그래요?”
어느새 다가온 진기오 감독이 홍보팀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여기 보세요. 명품 연출이라고 다들 칭찬합니다.”
홍보팀 직원이 보여 주는 댓글을 본 진기오 감독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바닥에서 십오 년을 버틴 고인 물이지만 그에게도 첫 방송은 아직도 떨리는 일이다.
“시청률은 어떤가요?”
“실시간 시청률 안 맞는다고 안 보시잖아요?”
“추이가 궁금해서요.”
진기오 감독은 첫 사극 연출이라 부담이 됐는지 쉽게 홍보팀 옆을 떠나지 못했다.
“추이는 좋아요. 보세요. 계속 상승하는 그래프죠? 아. 시청률도 딱 이것대로 나오면 대박인데.”
실시간 시청률은 인터넷으로 집계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식 시청률보다는 수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추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감독과 홍보팀이 드라마 반응을 살피고 있는 동안 배우들의 매니저들이 모인 우리 자리는 모두가 고개를 처박고 인터넷을 하고 있었다.
각자 맡은 배우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포탈에 ‘서이렌’을 입력하자 관련 기사가 우르르 쏟아졌다.
모두 여우비의 첫 방송에 관한 기사일 뿐 서이렌을 타깃으로 쓴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SNS 계정을 열고 서이렌을 검색했다.
그러자 서이렌의 수많은 짤과 글이 쏟아졌다.
- 다람쥐인 줄. 서이렌 짱 귀여워.
- 개귀여워.
- 서이렌 왜 안 나오는데! 1화부터 나오라고!
- 단오 서 있는 거 봤음? 다리 안으로 모으고 서 있음. 미친 귀여움임.
- 서이렌 인간의 미모가 아니란 사실은 피치업을 보고 이미 알았지만 귀여움마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 어떤 미친놈이 벌써 미튜브에 서이렌 삼 초짜리 영상 한 시간 반복되는 거 올려놨어.
SNS 반응을 살피던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단기간에 양산된 수많은 서이렌 덕후들이 모여 오늘의 짧은 떡밥을 나노 단위로 쪼개서 핥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윤석의 매니저 서유림도 이윤석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서유림은 옆자리에 앉은 진지혜의 매니저 유정운에게 물었다.
유정운은 핸드폰으로 한참 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뭘 그렇게 바쁘게 써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정운은 당황한 얼굴로 핸드폰을 닫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뭐예요. 누가 보면 몰래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네요.”
“무슨 소릴 하십니까? 삼 년이나 애인이 없었다고요.”
“누가 물어봤어요? 별걸 다 말해 주시네.”
서유림은 싫은 얼굴을 하더니 내게 음료수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삼겹살에는 소주가 진리건만 우리는 배우들을 케어하는 입장이라서 오늘 같은 날도 술을 마실 수 없다.
나는 음료 잔을 서유림에게 내밀며 말했다.
“인터넷 반응 좋죠?”
“오늘 우리 배우님은 예고가 다라서 큰 반응은 없어요. 여우비 이야기가 훨씬 많더라고요.”
“극이 살아야 배우도 살죠.”
“그래도 서이렌 씨는 좋은 이야기가 많은 거 같던데요?”
“아. 그런가요?”
“에이. 방금 나랑 같은 거 본 거 맞잖아요. 인터넷에 벌써 서이렌 씨 오늘 나온 짤이 엄청 돌아다니던데요. 저도 너무 귀여워서 보다가 소리 지를 뻔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배우의 칭찬을 눈앞에서 들으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음료수를 한입에 털어 넣고 서이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서이렌과 내 두 눈이 마주쳤다.
서이렌은 고기를 굽다 말고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여자랑 무슨 대화를 하길래 얼굴이 빨개졌죠?’
죄를 지은 것도 아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렸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일곱 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회식이 열두 시가 넘어서 끝났고 오늘 촬영은 오후에나 있어서 좀 더 자도 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매만지며 시청률이 뜨기를 기다렸다.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아침마다 시청률을 확인해야 하는 피를 말리는 장기 레이스다.
이자현이 내 배우가 된 뒤로는 한 번도 시청률로 고배를 마셔 본 적이 없지만, 그전에는 허다했다.
시청률을 확인하기 전에 우황청심환도 먹고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던 초짜 매니저 시절의 나를 떠올리자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여우비와 서이렌의 반응이나 살피기로 했다.
자칭 드라마 덕후라 불리는 팬들이 밤새 여우비에 대해 드라마 커뮤니티에서 이야기한 흔적이 보였다.
내가 본 미래에서도 여우비는 성공한 드라마였다.
오랜만에 그녀의 장기인 로맨스 사극으로 돌아온 박수현 작가와 사극 연출이 처음이라곤 믿기진 않는 진기오 감독의 찰떡같은 연출까지.
이미 알고 있는 미래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안 됐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이렌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 올라온 이상한 글이 내 눈에 띄었다.
[서이렌 굴욕 짤 대방출]
발끈한 나는 재빨리 글을 클릭했다.
어젯밤 서이렌이 나온 삼 초짜리 영상의 순간 캡처가 올라와 있었다.
떡을 먹으며 눈을 깜박이는 찰나에 캡처된 장면은 누가 봐도 악의적이었다.
다행히 댓글에 팬들이 항의하면서 서이렌의 여신 미모가 담긴 제작발표회 짤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신고 버튼을 누르고 게시글을 지워 달라는 요청 글을 썼다.
신고를 한 지 삼십 분이 지나고 드디어 게시글이 사라졌고 때마침 시청률 표가 떴다.
JTV 여우비 6.8%
실시간 시청률과 유사하게 시청률이 뜨자 나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동 시간대 일 위는 아니었지만, 첫 방송치고는 괜찮은 수치였다.
JTV 월화 드라마 중 첫 방으로는 최고 시청률이었다.
* * *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여우비 촬영장은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두 주연은 오늘 밤새 촬영해야 하지만 조연인 서이렌의 촬영은 일찍 끝났다. 우리는 일찍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내가 차에 시동을 건 순간 뒷자리에서 손이 쑥하고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렌이 단오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내게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단 거요.”
“단 거?”
“사탕이요.”
나는 얼떨결에 서이렌이 주는 사탕을 두 손으로 받았다.
“오늘이 화이트데이라고 하던데요.”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군요.”
나는 긴장한 얼굴로 백미러를 통해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꽁꽁 땋은 머리를 풀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를 다 풀고 어깨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딸꾹.”
“대표님. 딸꾹질하시네요.”
“아. 그러게요. 딸꾹.”
얼굴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물이 없네. 지금 나가서 사 올까요?”
“아니에요. 사탕 먹을게요.”
나는 서이렌이 준 사탕의 껍질을 벗겨 냈다.
화려한 포장지로 겹겹이 싸여 있는 사탕이었다.
사탕 껍질을 벗겨 내던 내 손이 순간 멈칫했다.
포장지 안에 고이 접은 쪽지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티 내지 말라고 했더니 이런 거로 대시하는 건가?
나는 서이렌에게 들리지 않게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쪽지를 펼쳤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처음 보는 필체가 보였다.
[이렌 씨는 화이트데이와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대화도 잘 통하는 거 같은데 친구 하지 않을래요? 이게 내 번호예요. 언제든지 전화해요. 010-0XXX-1XXX]
나는 똥그래진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머리를 빗고 있던 서이렌이 두 눈을 깜박이며 내 눈을 응시했다.
“왜요?”
“이 사탕 누가 준 거예요?”
“태섭 오빠가 줬어요.”
“오빠라고요?”
“선배님이 그냥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셨는데요.”
순간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거 혼자 받은 겁니까?”
“아뇨. 촬영장에 있는 여자들한테는 다 돌리시던데요. 대신 내 껀 포장지가 다르긴 했어요.”
선수다. 이렇게 사람을 꼬시는구나.
내가 여자라도 나만 특별 대우를 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김태섭 연기 잘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아니지.
생각해 보면 김태섭은 항상 열애설을 몰고 다니긴 했었다.
“어. 그런데 대표님, 딸꾹질이 멈췄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멈췄다.
“사탕 때문인가 보다. 내가 안 먹고 대표님 주길 잘했네요.”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 삼십오 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유치한 말이 튀어나왔다.
“김태섭이랑 나랑 비교하면 누가 더 좋아요?”
나는 말을 하고도 놀라서 내 입을 굳게 닫았다.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병원에 가야겠어.
분명 다른 병도 있을 거야.
내가 말실수를 탓하며 괴로워하는데 뒷자리에서 서이렌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준 사탕은 다른 사람한테 안 주겠죠?”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서이렌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놈.
나는 입을 굳게 닫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 * *
네 명의 주·조연이 모두 등장하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여우비의 시청률은 상승세를 탔다.
5화까지는 홍리아와 종사관 이성윤이 엮이는 좌충우돌 로맨스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됐으나 6화 마지막부터 이야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홍리아의 집이 역적으로 몰린 탓이다.
이성윤의 동료인 송치석이 이성윤을 음해하려고 서신을 보냈는데 그것이 잘못하여 홍리아의 집으로 갔다. 그 탓에 그녀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린 것이다.
송치석은 자신의 잘못이 밝혀질까 두려워 홍리아의 아버지를 문초하다가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린다.
홍리아의 집안은 초토화되고 그녀 역시 노비로 끌려간다.
복면하고 나타난 이성윤이 끌려가는 홍리아를 구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오면서 여우비 6화가 끝났다.
극의 분위기가 반전되며 시청자들은 열광했고 시청률이 그 반응을 증명했다.
8.9%
최고 시청률을 돌파한 그날 아침 10화 대본이 나왔다.
촬영장에서 대본을 받은 나는 이진아와 수다를 떨고 있는 서이렌을 쳐다봤다.
다행히 김태섭은 주위에 얼쩡거리지 않았다.
요즘 촬영장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김태섭이 서이렌 주위에 얼씬도 못 하게 하는 일이다.
김태섭이 보이지 않자 나는 편한 마음으로 대본을 확인했다.
내가 먼저 단오의 대사를 체크하고 그걸 표시한 뒤 서이렌에게 가져다준다.
포스트잇을 들고 대본에 표시하던 내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어라. 이거 이상한데.
평소에는 대사 열 마디 정도에 분량도 고작 오 분이 다였다.
그런데 오늘 다르다.
에피소드가 전체가 주연인 홍리아와 단오가 이끌어 가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