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화 (18/261)

#17화. 화제의 제작발표회

서이렌이 마이크를 들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지고 있는데도 서이렌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기자들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기자들은 서이렌의 눈빛을 받자 손에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드디어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이렌이라고 합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인 저를 캐스팅해 주신 진기오 감독님. 그리고 박수현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과 함께 작품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이렌이 말을 마치자 다시 제작발표회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기자들은 놀란 얼굴로 서이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꾀꼬리야? 뭐야?’

그때 오늘 대타로 참석했던 스포츠지 기자가 옆자리의 기자를 향해 물었다.

“저 배우는 혹시 다른 쪽에서 일하셨나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니 난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성우인가 했죠.”

“스포츠지 기자라면서요. 아는 게 하나도 없으시네요.”

“하하. 제가 E-스포츠 기자라서.”

짧은 인사를 끝으로 서이렌이 마이크를 내려놨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내 손에 땀이 났다.

인터넷을 확인해 보니 여우비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예상대로 서이렌의 성형 루머는 온데간데없고 서이렌을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현장에서 찍은 기사 사진도 굴욕 사진 하나 없이 서이렌의 아름다운 미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신인들은 이런 첫 공식 석상에서 떨기 마련인데 서이렌은 그런 것 하나 없이 노련하게 표정과 시선을 유지했다.

내 옆에 서 있는 제작사 소울의 직원들만 신이 났다.

“서이렌 화제성 대단하네요.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그 복숭아 음료 광고가 대박 났다잖아요. 최근에 성형 루머가 떠서 더 이슈가 됐고요.”

“서이렌이 성형 루머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겁니다.”

서이렌의 실물을 알고 있는 제작사 직원은 이 소동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예고편이랑 얼굴이 다르다잖아요. 배역에 맞게 하고 나와도 욕을 먹는 세상이네요. 참나.”

“뭐, 우리는 좋죠. 드라마 홍보가 자연스럽게 되니까.”

제작발표회는 감독과 주연 배우 위주로 흘러갔다.

서이렌에게도 몇 번의 인터뷰 기회가 있었지만, 그 시간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오늘 제작발표회의 화제는 서이렌이 모두 가져간 지 오래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때였다.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소감 한마디씩 해 달라고 말하는데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뒷걸음질 쳐서 곧장 벽에 몸을 기댔다.

누군가 내 심장에 시멘트를 쏟아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멘트 안에 갇힌 내 심장도 굳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 * *

“대표님은 어디 가셨어요?”

“빈 팀장님과 같이 계신 것 아니었어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빈선예는 혼자 온 서이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실에라도 가셨나? 그런데 이렌 씨. 오늘 제작발표회 끝내줬어요.”

서이렌은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제작발표회가 실시간으로 인터넷 플랫폼에서 스트리밍됐거든요. 근데 이렌 씨 나오자마자 채팅창이 한바탕 뒤집어졌어요. 여기 보세요.”

빈선예는 채팅창을 스크롤 하며 서이렌에게 보였다.

무섭게 올라가는 댓글은 모두 서이렌의 외모를 보고 깜짝 놀라는 내용이었다.

서이렌은 댓글을 보며 아쉬워했다.

“대표님은 어디 가셨대요? 대표님도 이걸 보셔야 하는데.”

“그러게요.”

그때 빈선예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서이렌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요?”

“예.”

“몇 년 동안 좋아했다고 했죠?”

“이십 년.”

“그게 말이 돼요? 서이렌 씨가 스물한 살인데 날 때부터 좋아했다고요?”

“그러게요. 그런가 봐요.”

빈선예는 수줍게 웃는 서이렌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은 정말로 연애에 관심 없는 거 같은데 괜찮아요? 내가 서이렌 씨라면 더 멋있는 남자 찾을 거라고요.”

“대표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데요.”

“어휴. 진짜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네. 우리 이렌 씨 어떡하냐.”

“진짠데. 대표님 멋지지 않아요?”

서이렌이 진지하게 묻자 빈선예가 팔짱을 끼며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외모는 합격. 키도 크고 얼굴도 깔끔하게 잘생겼죠.”

“성격은 더 좋죠.”

“뭐, 매너 있고 젠틀하긴 하죠. 사실 나도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한 건 아닌데.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내가 LOK에서 일한 첫날에 얼마나 식겁했는데요. 그런 거 보면 우리 대표님이 천연기념물 수준이죠.”

“일도 잘하는 능력자인 건 왜 말씀 안 하세요?”

빈선예는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서이렌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대표님이 따로 말씀하신 게 있어서 당분간 모른 척하는 겁니다. 대표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니까 절대 들키지 말아요.”

“나도 알아요. 대표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 들키면 안 돼요. 내 감정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 내면 곤란한 사람은 대표님이겠죠. 빈 팀장님 앞에서만 이러는 거예요. 나도 내 감정에 솔직할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빈선예는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서이렌을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표님은 대체 어딜 가신 거야? 살아 있는 요정의 사랑을 받으면 그만큼 몸을 불살라도 모자랄 판국에.”

빈선예가 화를 내는데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왔다.

“어. 대표님.”

이제 심장의 통증은 사라진 상태다.

나는 땀범벅인 얼굴을 찬물로 세수를 하고 옷차림도 단정히 정리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

애써 미소를 지은 나는 서이렌과 빈선예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갑시다.”

* * *

여우비 제작발표회는 곧바로 화제로 떠올랐다.

소울에서는 편집한 제작발표회 영상을 공식 SNS 계정에 올렸다.

제작발표회 영상의 조회 수는 처음에는 미비했다.

JTV 공식 계정도 아니고 드라마 제작사 계정을 팔로우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영상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늘었고, 그걸 퍼 나르면서 가파르게 조회 수가 오르고 있었다.

한편 ‘서이렌 1호팬’이라는 이름의 SNS 계정에 수많은 서이렌의 팬들이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이렌 1호팬’은 누구보다 빨리 서이렌의 인터뷰 영상만 편집해서 올렸다.

그 계정에는 지금까지 나온 서이렌의 모든 기사의 링크가 걸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하트 수가 많은 게시글은 다름 아닌 서이렌의 주민등록 사진이었다.

- 주민등록사진도 여신이네.

- 얼굴 미쳤음.

- 성형빨, 화장빨이라니. 개같은 기레기 놈들.

- 매일 세이렌 님의 사진을 봐야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병에 걸렸습니다.

└ㅇㅈ

- 제작발표회 잘 찌어왔다. 받아라.

└여신님을 나노 단위로 핥을 테다.

└움직이는 여신님이야말로 인정.

- 서이렌 실물 보고 까는 사람 있으면 그건 그 사람이 동태눈깔이라는 거다.

- 찬양하라 서이렌.

몰려든 서이렌 덕후들이 계정에 타래를 만들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계정을 운영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이렌의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준 소년, 이락이다.

그는 자신이 서이렌의 첫 번째 팬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때 ‘진짜 서이렌 1호팬’이라는 계정이 보였고, 키보드를 두들기던 이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짜 서이렌 1호팬?”

이락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하고 ‘진짜 서이렌 1호팬’이라는 계정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우스를 움직이던 이락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이거 피치업 광고 촬영 현장 같은데. 날짜가…….”

방금까지만 해도 이락은 키보드 배틀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그럴 의욕이 사라졌다.

“와. 대박 사진만 올려 줬네.”

이락은 ‘진짜 서이렌 1호팬’이 풀어 주는 피치업 촬영장 사진을 둘러보며 어느새 푹 빠져들었다.

“인정. 인정. 이 계정 완전 보물단지네.”

호탕하게 웃은 이락은 ‘진짜 서이렌 1호팬’에 맞팔을 신청했다.

그 시각 ‘진짜 서이렌 1호팬’의 계정을 운영하는 곽이석의 핸드폰으로 알람이 들어왔다.

* * *

미팅을 위해 밖에 나온 록 실장은 자꾸만 뜨는 천재용의 번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씨. 한번 안 받으면 바쁜가 보다 하고 알아서 그만 걸 것이지.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록 실장은 어제오늘 뜬 여우비 제작발표회 기사를 보고 천재용이 한바탕 난리를 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천재용의 전화를 모두 씹고 있다.

‘천재용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데. 나중에 좋은 곳에 데려가서 풀어 줘야지. 이거 원.’

록 실장은 개같이 노는 거로 유명한 천재용을 달래 줄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파져 왔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록 실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비된 신인은 없다.

준비된 신인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신인들 대부분이 캐스팅되기 전부터 그쪽 세계에서는 유망주였거나, 캐스팅되고 난 이후에 연기 선생을 붙여서 기량을 갈고닦은 경우다.

전자가 김이솔이라면 후자는 이자현인 셈이다.

그런데 서이렌은 정말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는 말이 어울렸다.

‘아무리 미국에서 왔다지만 이렇게 정보가 없을 리가 없는데?’

록 실장이 사람을 통해 여우비 촬영장에 대해 알아보니 서이렌은 연기도 잘하고 춤까지 잘 춘다고 했다.

록 실장은 갑자기 나타난 완벽한 신인 배우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세강의 배우라는 사실에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원세강이 이자현을 톱스타로 띄우고 승승장구할 때보다 더 열받고 짜증이 났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라면 상처 입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나무에 다시 오르지 못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원세강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툭툭 털어 내고 이전보다 더 빠르게 내달리고 있다.

‘그때 LOK 못 나가게 하고 그냥 지수연을 맡길 걸 그랬어.’

록 실장은 뒤늦게 후회하며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 * *

첫 방송 날이 되자 여우비 촬영팀은 일찍 촬영을 마치고 서울 외곽의 한 고깃집으로 몰려갔다.

다 같이 회식을 하며 첫 방송을 시청하려는 것이다.

나는 로드 매니저의 자격으로 고깃집으로 들어가 배우 스태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스타탄생의 대표이자 서이렌의 로드 매니저로 따라다니는 것을 촬영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배우 이윤석의 로드 매니저인 서유림이 나를 보며 물었다.

서유림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윤석을 지난 오 년간 케어해 온 베테랑이다.

“서이렌 씨 키우는 보람이 있죠?”

“제가 키우긴요. 제가 무슨 애 아빠도 아니고. 이렌 씨는 자기가 알아서 잘합니다.”

“하긴 저렇게 촬영 현장에 잘 적응하는 신인 배우는 처음 보긴 하네요.”

나는 서유림의 말에 고개를 돌려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배우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맡았던 어느 배우보다 친화력이 높은 게 서이렌이다.

고기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스태프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자, 주목해 주세요. 이제 드라마 시작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