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화 (17/261)

#16화. 정면승부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골방에서 이락은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컵라면이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모니터에는 미튜브 화면이 보였고, 서이렌의 피치업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락은 젓가락을 반으로 가르다 말고 홀린 사람처럼 모니터를 쳐다봤다.

이내 이락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이렌?”

눈앞에서 3D로 움직이는 서이렌을 본 이락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다가 책상 앞에 놓인 컵라면이 엎어졌다.

“아, 망했다.”

이락이 깜짝 놀라서 상황을 수습해 봤지만, 책상 위는 이미 라면 국물로 흥건했다.

“보스가 보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이락의 보스인 최용팔이 마침 골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야. 새끼야. 그 장비가 얼만 줄 알아?”

최용팔이 이락의 뺨을 내려쳤다.

마르고 볼품없는 이락의 몸이 골방 구석으로 날아갔다.

“부모도 없는 고아를 거둬 줬더니 문제만 일으켜요. 당장 꺼져.”

쭈뼛쭈뼛 일어선 이락은 최용팔의 눈치를 살피더니 골방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골목길이 나왔다.

이락은 한 사람 앉기도 벅찬 골목에 주저앉았다.

“오늘 한 끼도 못 먹는 거 아냐? 망했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이락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쇠로 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락은 상자 안에서 초콜릿 사탕을 꺼내서 입에 물었다.

상자를 닫으려던 이락은 상자 속의 빛바랜 사진을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

갓난아이였던 이락이 강보에 싸여 버려질 때 함께 있던 사진이다.

흐리고 빛바랜 사진이었으나 사진 속의 여인은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락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상자를 닫고 주머니에서 다른 사진을 꺼냈다.

서이렌의 증명사진이었다.

지난날 원세강에게 서이렌의 주민등록증과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만들어 준 소년이 바로 이락이다.

이락은 그때 원세강이 여분으로 가져온 증명사진을 하나 슬쩍하고 이렇게 보관 중이었다.

“분명 서이렌이야. 확실해.”

이락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서이렌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본 이락은 상자에 다시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포탈을 켜자 메인 화면에 올라온 기사 하나가 이락의 눈에 들어왔다.

[탐구] 역대급 신인으로 등장한 서이렌의 외모는 가짜?

“뭐야? 이 기사는?”

이락이 깜짝 놀라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를 정독한 이락은 말도 안 된다며 혀를 찼다.

이락은 재빨리 커뮤니티에 들어가 인터넷 여론을 확인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기사를 물어뜯고 있었다.

- 누가 기자 안경 좀 사줘라. 눈이 안 보이나 봐.

- 팬파라치 천재용이 쓴 거잖아. 이 기자 유명하지 않음?

└유명하긴 하지. 기레기로.

댓글은 기자를 비방하는 글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몇몇 댓글들은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 그런데 맞는 말 아닌가? 너무 현실감 없던데. CG 같다고 해야 하나?

└장난함? 그게 여신이란 거다.

- 여우비 예고편에 나온 배우랑 얼굴이 다르긴 하잖아.

└나도 이 생각함. 달라도 너무 달라.

└노비역인데 풀메로 나오냐?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인어공주랑 여우비는 완전 다른 사람이잖아.

- 우리 삼촌이 여우비 촬영 스태프인데 서이렌 진짜 예쁘다고 함.

└인증해봐.

└내 얼굴은 원빈이다.

└너나 인증해라.

며칠 사이에 양산된 수많은 서이렌 팬들이 게시글에 몰려들어 개싸움이 났고 곧 기사는 가장 많이 본 기사 일 위로 올라섰다.

* * *

스타탄생에서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내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천재용. 이렇게 나오시겠다?

윤조 때는 내가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정답은 하나뿐이다.

정면 승부.

서이렌의 본 모습을 대중에게 드러낸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루머는 당장 사그라들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제작발표회란 카드가 있다는 거다.

제작발표회는 주·조연 네 명만 참여하도록 결정됐다.

서이렌의 주가가 갑자기 치솟으면서 소울에서는 서이렌도 제작발표회에 출연시키고 싶어 했지만 숲 엔터에서 반대했다고 들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 * *

숲 엔터의 윤동진 대표는 처음 보는 전화번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기자한테도 안 알려 준 내 개인 번호인데. 누구지?”

윤 대표는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탄생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원세강?]

나는 윤동진 대표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이자현 배우님 매니저라고 하면 기억이 나실까요?”

[…….]

핸드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윤 대표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 내가 상기시켜 줘야겠지.

“작년 초에 계약 기간이 한참이나 남은 이자현 배우님께 이 번호로 직접 연락하셨었죠? 이제 기억나시나요?”

[무슨 일이죠? 용건이 있어서 전화했을 거잖습니까?]

윤 대표는 같은 바닥에서 일하는 선배답게 내가 용건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우비 제작발표회에 서이렌 씨도 출연하고 싶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죠? 제작사인 소울에 문의하세요.]

“소울도 그렇게 하고 싶답니다.”

[소울에서 정말 그러라고 했습니까?]

“숲 엔터에서 허락하면 그러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지난번에 무리하게 이자현 배우님께 접촉했었던 거 LOK 내부에선 모르는 거 아시죠? 그때 제가 보여 드렸던 호의를 지금 돌려받아도 될까요?”

[헛.]

윤동진은 고작 십 년 차 매니저의 패기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윤 대표가 생각할 시간을 줬다.

잠시 후, 드디어 윤 대표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 합시다. 대신 내가 과하게 돌려주는 거니 원 대표가 그만큼 빚진 걸로 하죠.]

능구렁이 같은 양반.

끝까지 하나라도 챙기려고 한다.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갚을 일이 있겠죠.”

* * *

여우비의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날 아침.

서울호텔에 이른 아침부터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진아와 진지혜는 먼저 도착해서 대기실에서 몰려든 기자들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이진아가 놀란 얼굴로 진지혜에게 물었다.

“지혜야. 오늘 왜 이렇게 기자들이 많이 왔어? 평소보다 많이 온 거 같은데.”

“아. 그거.”

진지혜는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서이렌 때문이잖아. 우리 드라마 단역으로 나오는 애.”

“이렌이가 왜?”

“넌 인터넷도 안 하니? 서이렌 성형 루머 기사로 뜨고 난리잖아.”

“난 악플 때문에 인터넷 안 봐.”

“웃기지 않아? 고작 단역이 어떻게 제작발표회에 오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어. 제작사도 이렇게 된 김에 어그로 좀 끌어 보려는 거겠지. 걔 때문에 시선 분산되는 건 싫지만 어쩌겠어. 여우비 이슈되면 나야 좋지.”

“근데 이상하다. 이렌이가 무슨 성형이야. 말도 안 되네.”

이진아가 서이렌을 두둔하자 진지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너 서이렌이랑 친해? 왜 이렌이라고 불러?”

“촬영장에서 이렌이랑 안 친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하다못해 내 코디랑도 친하잖아.”

이진아의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코디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다. 이렌이 완전 여신 미모인데. 왜 그런 기사가 났지? CF랑 똑같이 생겼는데.”

“무슨 여신 미모야? 얼굴도 까무잡잡하고 눈썹도 흐리멍덩하잖아. 눈이 똥그래서 귀엽게 생긴 건 알겠는데 여신은 아니지.”

진지혜는 자신이 본 단오 분장을 한 서이렌만 기억하고 있기에 이진아의 말을 믿지 못했다.

“지혜야. 대본 리딩 때 못 봤어? 이렌이 진짜 미인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미인?”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서이렌이 들어왔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칵테일 드레스.

드레스와 상반되는 새까만 킬힐.

굵은 웨이브 머리를 묶어서 어깨 한쪽으로 흘러내리게 한 헤어스타일.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화장.

서이렌이 나타나자 이진아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이렌아, 왔어? 오늘 드레스 너무 예쁘다.”

서이렌도 웃으며 이진아에게 달려갔다.

서이렌이 미소 짓자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진아 언니, 저 언니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쩐지. 이제 곧 제작발표회 하는데, 너 언제 오나 하고 기다렸어.”

서이렌과 이진아는 밥차에서 함께 식사하며 친해진 사이다.

두 여신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이 진지혜가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뜯어 봤다.

평소에 시커멓게 분장한 것과 다르게 서이렌의 얼굴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 위로 드러난 팔과 어깨를 보면 원래 피부가 하얀 것 같았다.

그렇게 진하게 화장한 것도 아니었다.

눈썹만 그려 주고 입술에 생기만 불어넣었을 뿐인데도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뭐야. 같은 사람 맞아?’

그때 스태프가 들어와서 제작발표회가 시작됨을 알렸다.

* * *

제작발표회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한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진아 인기가 이렇게 많았었나? 무슨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왔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가 핸드폰을 들어 서이렌에 대한 기사를 넌지시 보여 줬다.

“얘 때문이잖아요. 오늘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몰려온 거죠.”

“서이렌? 아. 그 인어공주인지 뭔지 하는 광고 모델이요?”

“서이렌 여우비에 나오잖아요. 혹시 그것도 모르고 오셨어요?”

“제가 원래 오기로 했던 기자 대타라서요. 연예부 기자가 아닙니다. 스포츠 담당입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기자들은 수군대며 서이렌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했다.

드디어 콘퍼런스 룸의 조명이 꺼지고 제작발표회가 시작됐다.

문이 열리고 감독과 주·조연 배우가 먼저 걸어 나왔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가 터졌다.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진기오 감독이 시린 눈을 깜박이며 단상 위로 먼저 올라와 앉았다.

뒤이어 여우비의 주인공인 이진아, 김태섭이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걸어왔고, 조연인 진지혜와 이윤석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상으로 걸어가던 진지혜가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기자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생각도 못 하고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혜는 기자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응시했다.

마침 문에서 나온 서이렌이 조명을 받고 서 있었다.

진지혜는 인상을 구긴 채로 재빨리 단상 위로 올라왔다.

잘못해서 같이 사진이라도 찍히면 망하는 거다.

단상 위에는 진기오, 김태섭, 이진아, 이윤석, 진지혜 그리고 서이렌의 순으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진지혜는 서이렌이 자신의 옆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이렌이 단상 앞에 서자 그제야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서이렌은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도 한 번도 눈을 깜박하지 않고 시종일관 우아한 미소를 유지했다.

자신의 이름표가 쓰여 있는 제일 끝자리에 앉은 서이렌은 차분한 미소로 기자들을 바라봤다.

“자. 이제 여우비 제작발표회를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노련하게 분위기를 정리했고 기자들은 카메라를 내려놨다.

“와, 저게 무슨 뽀샵에 성형빨이야. 광고랑 똑같은데?”

“광고랑 똑같기는. 실물이 더 빛나는데.”

“예고편에 나온 그 사람 맞아?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인데.”

기자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배우들에게도 들렸다.

기자들도 여우비 촬영장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서이렌이 성형발이 아니라 미인이라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예인 중에 미인, 미남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기자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기준을 넘어서는 서이렌의 아우라에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서이렌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고개를 처박고 기사를 써 내려가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몇몇은 데스크에 전화를 걸며 현장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유일하게 팬파라치에서 파견된 기자만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천재용은 자신이 직접 오고 싶었으나 원세강과 부딪치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후배 기자를 대신 보냈다.

후배 기자는 천재용에게 톡을 보내며 제작발표회 상황을 설명했다.

[어때 성형빨 맞아?]

[아뇨. 너무 예뻐요. 광고보다 훨씬 예쁘던데요?]

[그게 말이 돼?]

[정말입니다. 여기 계신 다른 기자분들도 다 같은 의견입니다. 헉 소리 나는 미인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선배님이 여기 와 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세요. 제작발표회 인터넷으로 볼 수 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암튼 저는 제 생각대로 초고 써서 보낼게요.]

팬파라치 후배 기자는 [신인 배우 서이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현신]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기사의 초고를 작성해 천재용에게 보냈다.

* * *

데스크에서 후배의 기사를 받은 천재용은 제목을 읽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무슨 미의 여신까지나.”

천재용은 함께 전달된 실시간 제작발표회 스트리밍 링크를 클릭했다.

모니터에 제작발표회 현장이 나왔고, 마침 서이렌이 자기소개를 위해 마이크를 드는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서이렌의 얼굴을 확인한 천재용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재용은 곧 험악한 얼굴로 바뀌더니 화를 냈다.

“시발. 록 실장, 감히 나한테 약을 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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