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4화 (15/261)
  • #14화. 단오의 춤

    진지혜의 계속되는 NG에 촬영장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컷. 다시 합시다. 진지혜 씨. 자꾸 발음이 꼬이는데 조금 쉬었다 갈까요?”

    우영민 감독의 말에 진지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 분만 쉽시다.”

    휴식을 취한다는 말에 진지혜의 매니저 유정운이 달려왔다.

    “지혜야. 괜찮아? 너무 추워서 대사가 잘 안 나오는 거 아냐?”

    “아냐. 됐어.”

    진지혜는 곁눈질로 서이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서이렌은 키도 자신보다 컸다.

    자신은 다리가 길어 보이기 위해 한복 치마 속에 통굽을 신었는데 납작한 짚신을 신은 서이렌보다 작았다.

    ‘대체 키가 몇이야? 백칠십은 넘겠네.’

    그때 진지혜의 눈에 서이렌을 챙기러 온 매니저의 모습이 보였다.

    키도 크고 분위기 있게 생긴 원세강을 본 진지혜는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무슨 매니저가 저렇게 잘생겼어? 배우야?”

    “내가 말 안 했던가? 서이렌 매니저가 이자현 전 매니저라더라. LOK 나와서 회사 차린 거래.”

    “이자현? 그걸 왜 이제 말해?”

    진지혜가 묘한 눈으로 서이렌과 함께 있는 원세강을 바라봤다.

    눈치 없는 유정운은 원세강을 보며 부러운 감정을 드러냈다.

    “와. 원세강은 진짜 배우 해도 될 거 같아. 왜 저 얼굴로 배우 안 하고 매니저 하는지 모르겠어. 들어 보니 학벌도 되게 좋다던데.”

    진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빠. 저 서이렌이라는 배우 혹시 다른 작품에 출연한 거 있어? 혹시 연극 찍다가 왔대?”

    “그건 모르겠는데? 그런데 이자현 매니저가 원래 이쪽 바닥에서 유명해. 십 년 동안 여배우들만 키워 왔잖아. 그 사람 안목으로 고른 신인이니 잘하겠지.”

    “지금 이게 남의 일이야? 나 좀 짜증 나려고 한다.”

    유정운은 그제야 자신의 눈치 없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후 진행된 촬영에서도 서이렌은 첫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NG 한 번을 내지 않고 완벽하게 연기를 마쳤다.

    오히려 서이렌에게 NG를 내지 말라고 당부했던 진지혜가 여러 번 NG를 내서 촬영이 지체됐다.

    * * *

    여우비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이렌은 지금껏 한 번도 NG를 내지 않았고 스태프들은 서이렌이 언제 NG를 낼지 내기까지 거는 사람도 있었다.

    연기 잘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서이렌은 어느덧 촬영장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착하고 열심히 하는 서이렌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촬영 현장에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데 진지혜의 밴 안은 한겨울처럼 찬 바람이 불었다.

    진지혜는 8화 수정고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진지혜가 대본을 매니저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거 봐봐. 단오 분량이 왜 또 늘어 있는데? 심지어 이 씬은 나한테 되게 중요한 씬 아니야?”

    오늘은 연홍의 독무를 찍는 중요한 촬영 날이다.

    연홍이 사모하는 악공 윤태원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며 달빛 아래 춤을 추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다.

    무용과 출신의 진지혜는 오늘 이 신을 위해 캐스팅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엊그제 8화 수정고가 나왔고 연홍이 춤을 추는 동안 그것을 지켜보던 단오가 연홍의 춤을 따라서 추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어차피 이 씬의 주인공은 너야. 단오는 어설프게 따라 추다가 엉덩방아 찧는 건데 뭘 그렇게 화를 내.”

    유정운 매니저가 단단히 삐진 진지혜를 달래기 시작했다.

    진지혜는 그래도 불만이 많은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거 방송만 되면 백 퍼 터지는 씬이니까 딴생각은 하지 마. 그냥 네가 연습한 대로 하면 돼.”

    “오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네가 캐스팅된 것도 다 이 씬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오늘 제대로 뒤집어 놓고 오자.”

    진지혜는 그제야 얼굴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촬영 준비에 한창인 서이렌의 모습을 보며 빈선예가 나에게 물었다.

    “진지혜 무용과 출신이라던데. 우리 이렌 씨랑 비교되지 않을까요?”

    빈선예의 걱정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노비인 단오가 기생 연홍처럼 춤을 잘 추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런데 우리 이렌 씨도 춤을 잘 추잖아요.”

    내가 본 미래에서도 단오는 오늘 연홍의 춤을 따라 추는 장면을 찍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한 달 전부터 서이렌에게 무용 선생님을 붙여 주고 트레이닝을 시켰다.

    그런데 우습게도 선생님까지도 서이렌은 무용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촬영장 동선을 확인하는 서이렌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당신,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그때 촬영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촬영은 여우비의 메인 감독인 진기오가 직접 촬영한다.

    진기오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졌고 촬영이 시작됐다.

    천향원의 정자에 오른 연홍이 달빛을 바라보고 있다.

    단오가 연홍의 손난로를 챙기러 간 사이 정자에 악공 윤태원이 다가온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연홍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 윤태원이 들고 있던 피리를 입에 가져다 댔다.

    달빛이 쏟아지는 천향원에 구슬픈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홍은 피리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연홍의 모습에 스태프들이 곳곳에서 탄성을 내질렀다.

    “무용과 출신이라더니 춤은 진짜 잘 춘다.”

    “대신 연기가 좀 그렇잖아.”

    “연홍 캐릭터는 춤이 90%야. 연기는 그냥 아련한 표정만 지어 주면 되는 거라고.”

    “NG 자주 낸다고 짜증 낼 땐 언제고.”

    “야. 그래도 춤출 때는 NG 안 내서 너무 좋다.”

    나와 빈선예도 멀리서 진지혜의 촬영 장면을 지켜봤다.

    빈선예가 내 곁에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건네 왔다.

    “내 눈이 이상한가? 우리 이렌 씨가 춤을 더 잘 추는 거 같지 않아요?”

    빈선예는 두 눈을 깜박이며 내 눈을 바라봤다.

    어이없게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춤출 때의 분위기는 서이렌이 압도적이다.

    “이렌 씨, 나중에 무용수 역을 맡아도 좋을 거 같아요.”

    빈선예의 말에 나는 앞으로 삼 년간 흥행할 드라마와 영화를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해외에서 히트한 영화만 떠올랐다.

    드디어 일 차 촬영이 끝나고 진지혜는 자신의 촬영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촬영 컷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지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른 각도에서 몇 장면을 더 따고 드디어 진지혜의 독무 신 촬영이 끝났다.

    바로 이어서 단오의 촬영이 시작된다.

    촬영장에서 대기하던 무용수가 다가와 서이렌 앞에 섰다.

    “영상 보내 드렸는데 연습해 왔죠?”

    “예.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어차피 그냥 따라 하는 정도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알겠습니다.”

    무용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의지를 드러내는 서이렌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랑 같이 리허설 해 봐요. 음악은 없지만 춤을 좀 춰 볼래요? 내가 동작 좀 체크해 줄게요.”

    “예.”

    촬영을 마치고 떠나던 진지혜가 서이렌과 무용수가 리허설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진지혜는 서이렌의 노비 옷차림을 보고 실소를 흘렸다.

    춤을 춰 온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한국무용은 선이 생명이다.

    저렇게 소매도 짧고 치맛단도 짧은 비루한 노비 차림으로는 누가 와도 춤 선을 못 살린다.

    그때 무용수의 박수 소리에 맞춰 서이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이기에 영상으로 배웠던 춤을 먼저 그대로 춰 본다.

    다음 촬영을 준비하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하나둘 서이렌에게 꽂혔다.

    먼지가 휘날리는 촬영장 한가운데서 음악도 없이 춤을 추는데 한눈에도 서이렌이 춤을 잘 춘다는 것이 느껴졌다.

    스태프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야? 서이렌, 왜 저렇게 춤을 잘 춰?”

    “진지혜보다 더 잘 추는 거 같은데? 내 눈이 이상한가?”

    “야. 내 눈도 이상한가 보다. 내가 봐도 서이렌이 진지혜보다 낫다.”

    뒤쪽에서 매니저와 함께 서이렌을 구경하던 진지혜의 인상이 구겨졌다.

    진지혜는 화난 눈으로 옆에 서 있는 매니저를 노려봤다.

    매니저 유정운은 그녀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지혜야. 늦겠다. 우리 가자.”

    “가긴 어딜 가? 지금 저거 안 보여?”

    “서이렌도 무용을 전공했나 보지. 너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가 춤출 때 단오도 같이 추잖아.”

    “괜찮아. 저기 봐 봐. 단오는 우스꽝스럽게 출 거라고.”

    진지혜가 돌아보니 서이렌이 다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단오 버전이었다.

    몸치, 박치인 단오가 연홍을 따라 하느라 몸을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촬영장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이건 귀여움이 도를 지나친 거 같은데.”

    “서이렌 뒤뚱거리는 것 좀 봐. 너무 귀여워.”

    “무용 같은 거 모르는 나는 이게 더 대박인 거 같다.”

    서이렌이 뒤뚱거리며 춤을 따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에서는 스태프들이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진기오 감독도 서이렌의 리허설 영상을 지켜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진지혜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 * *

    드디어 오늘 여우비의 티저 예고편이 뜨는 날이다.

    모처럼 촬영이 없는 날이기에 나와 빈선예는 스타탄생에 모여 예고편을 보기로 했다.

    “그럼, 지금 틀게요.”

    “궁금하니까 빨리요.”

    내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여우비 시그널이 떴다.

    주인공인 이진아가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남부럽지 않은 중인 집안의 고명딸로 천방지축으로 자라다 집안이 역모에 얽혀 도망자 신세가 된 모습까지 다채로운 이진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남자주인공인 김태섭이 종사관으로 분해 이진아를 도와주는 흑기사로 나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춤추는 진지혜와 피리를 불며 나타난 악공 이윤석을 끝으로 여우비의 티저 예고편이 끝났다.

    예고편의 마지막까지 확인한 빈선예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우리 이렌 씨는 코빼기도 안 보이네요.”

    실망하는 빈선예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단역인데 예고편에 나올 리가요? 시청자들에게 인상 깊게 박히려면 인지도가 높은 주연들이 나와야죠.”

    “그건 나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스쳐 지나가는 화면으로라도 나올 줄 알았죠.”

    “티저 예고편이라서 핵심만 뽑았을 거예요. 그래도 대본이 수정되면 될수록 단오 분량이 많아지니까 그건 고무적인 일입니다.”

    “당연하죠. 방송만 되면 저 귀여운 생명체는 뭐냐고 난리 날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엊그제 단오 춤추는 씬 촬영 잊으셨어요? 못 추는 춤인데도 다들 귀엽다고 난리가 났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날의 촬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서이렌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내질렀었다.

    진기오 감독도 엄지를 들어 보이며 서이렌에게 잘했다며 칭찬했었다.

    “그건 그렇고 촬영장에서 우리 이렌 씨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데요? 그동안 NG 한번 안 냈다고 다들 그렇게 칭찬한다면서요.”

    “이렌 씨가 잘해요. 스태프, 선배 할 거 없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니까 뒷말 나올 게 없죠.”

    “우리 이렌 씨는 얼굴도 여신이고 성격까지 여신이네요.”

    빈선예와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빈선예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어. 승준이네요. 얘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빈선예는 한승준 포토그래퍼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피했다.

    “무슨 일이야? 바쁜 척하느라 먼저 연락 안 하잖아.”

    [빈선예 뒤끝 있네. 진짜 바빠서 전화 못 한 거라니까.]

    “잔말 말고 용건이나 말해. 왜 그러는데?”

    [지금 텔레비전 켜 봐. 서이렌 씨 광고 온에어 시작했더라. 인터넷 포털에도 떴어.]

    “어. 그게 정말이야?”

    [식사하러 나왔다가 식당에서 광고 보고 깜짝 놀랐다. 광고 진짜 기가 막히게 뽑혔더라.]

    “야. 나 바쁘니까 다시 전화할게. 끊어.”

    두 눈이 커진 빈선예가 전화를 끊고 달려와 텔레비전을 켰다.

    빈선예가 채널을 마구잡이로 돌리는데 갑자기 화면이 화사해지더니 서이렌의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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