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3화 (14/261)
  • #13화. 첫 촬영

    “이거 봐요. 이래도 발뺌하실 거예요?”

    빈선예가 화난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그때 서이렌이 빈선예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빈 팀장님, 오해예요. 나만 좋아하는 거예요.”

    “뭐라고요?”

    “나는 대표님이 좋아요. 그런데 대표님은 그런 말은 하지도 말라고 하시네요.”

    서이렌의 난데없는 짝사랑 고백에 빈선예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 제일 황당한 사람은 나다.

    지난번부터 서이렌이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난 윤조와 아픈 사랑을 한 뒤 두 번 다시는 내 배우와 사귀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다.

    심지어 병까지 걸린 내가 무슨 연애란 말인가?

    나는 서이렌과 빈선예를 양옆에 세워 두고 말했다.

    “지금은 촬영장에 가야 하니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아니, 나중에도 할 필요 없겠네요. 나한테 서이렌 씨는 그저 내 배우일 뿐입니다. 아무런 감정도 사심도 없어요.”

    “하지만 이렌 씨가 좋아한다잖아요.”

    빈선예는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서이렌도 곁에서 함께 팔짱을 끼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가 좋아한다고요. 대표님을요.”

    이 여자들이 대체 쌍으로 왜 이럴까?

    그때 내 눈에 사무실 시계가 보였다.

    촬영장에 늦지 않게 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

    나는 빈선예가 챙겨 놓은 메이크업 박스와 의상을 챙겨 들고 말했다.

    “우선 갑시다. 늦겠어요.”

    “말 돌리시는 것 좀 봐.”

    나는 불만이 가득한 빈선예와 서이렌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 * *

    오늘 촬영은 양주에서 진행된다.

    아역과 주연 배우의 촬영은 이미 보름 전에 시작됐다.

    촬영장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뒷자리의 여자들이 신경 쓰였다.

    서이렌과 빈선예는 계속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백미러로 서이렌과 빈선예를 힐끔힐끔 쳐다볼 때마다 그녀들은 언제 그랬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신인 배우에게 스캔들은 치명적이다.

    심지어 배우와 매니저의 스캔들은 더욱 그렇다.

    오늘 촬영이 끝나면 서이렌과 따로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전에는 황당한 말을 해도 그냥 웃어넘겼지만, 오늘 일은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다.

    양주 촬영장에 도착하자 서로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서이렌과 빈선예가 언제 그랬냐는 듯 좌우로 떨어졌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촬영장 확인해 보고 올게요.”

    “저도 같이 가요.”

    내가 차에서 내리자 빈선예가 따라 내렸다.

    빈선예는 내 곁을 쭐레쭐레 따라오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빈 팀장님 왜 그러세요?”

    내가 놀란 얼굴로 빈선예를 쳐다보자 그녀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이랑 이렌 씨랑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면서요?”

    “예?”

    “오면서 다 들었어요.”

    “아. 뭐. 그런 셈이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건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어쩐지 지수연 도망가고 어디서 저런 인재를 데려왔나 했더니 원래부터 인연이 깊었나 보네요.”

    “그런 셈이죠.”

    “그나저나 대표님도 참 죄 많은 남자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이렌 씨한테 다 들었어요. 어릴 때 대표님이 이렌 씨를 구해 준 적이 있다면서요?”

    “제가요?”

    내가 놀라자 빈선예가 되레 당황해했다.

    “뭡니까? 당사자는 기억도 못 하는 거예요? 이렌 씨는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오로지 대표님 한 분만 짝사랑하고 있다던데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내가 언제 서이렌을 구해 줬었지?

    과거를 떠올려 봤으나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너무하네요. 이렇게 무심한 남자를 대체 이렌 씨는 뭐를 보고 좋아하는 거예요?”

    빈선예는 마치 자신이 서이렌이라도 되는 듯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이렌은 그 당시 마네킹이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쳤지만, 그녀를 구한 기억은 없다.

    내가 당황하는데 여우비 감독인 진기오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스태프들과 있던 진기오 감독이 원세강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원 대표 오랜만이에요. 대표님이 직접 촬영장에 왔네요?”

    “아직 로드 매니저가 없어서 제가 이렌 씨를 직접 케어하고 있습니다.”

    “고생하시네요. 오늘 이렌 씨는 B팀이랑 촬영이니까 저랑은 나중에 찍겠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고작 단역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진기오 감독이 웃으면서 스태프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일합시다. 오늘 첫 촬영이잖아요.”

    “말 돌리시기는. 알았어요. 나도 일하러 온 거 알아요.”

    * * *

    밴 안에서 4화 대본을 확인하던 진지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진지혜가 그녀의 매니저인 유정운을 불렀다.

    “오빠. 갑자기 단오라는 애 분량이 왜 이렇게 늘었어?”

    진지혜는 형광펜으로 색칠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젯밤에 4화 수정고가 나왔다.

    그전에는 단 두 마디밖에 없었던 단오의 대사가 열 줄이나 늘어난 것이다.

    유정운 매니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늘어 봤자 단역이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내 뒤에서 맞장구나 쳐 주는 캐릭터가 왜 분량이 늘어난 거냐고? 단오라는 애 어느 기획사야? 큰 데야?”

    “잠깐만.”

    유정운은 핸드폰을 들어 뭔가를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생 회사야. 스타탄생이라는데. 배우는 서이렌.”

    “예뻐?”

    “난 모르지. 우린 갑자기 촬영이 생겨서 대본 리딩에 못 갔잖아. 근데 진아 누님 매니저 말 들어 보면 예쁘다고 하더라.”

    “매니저들끼리 배우 얼굴 품평회도 하나 보지?”

    “야. 네가 물어봐 놓고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 있냐?”

    “됐고, 신생 회사면 빽이 든든한 것도 아닌데. 대체 뭐야? 왜 대사가 늘어난 거야?”

    유정운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지혜야. 가자. 이제 우리 촬영할 시간이야. 내가 나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게.”

    진지혜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섰다.

    여우비의 주인공인 이진아와 김태섭은 A팀과 함께 다른 곳에서 촬영하고, 지금 이곳 천향원이라는 기방 앞에 B팀이 모여 있다.

    조감독 우영민 앞으로 나와 서이렌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원세강입니다.”

    “안녕하세요. 단오 역을 맡은 서이렌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와 서이렌이 인사를 하자 우영민 감독의 눈이 커졌다.

    서이렌의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놀란 것이다.

    “일찍 오셨네요.”

    “첫 촬영이라서요. 촬영장 스태프분들께 인사도 드릴 겸 일찍 왔습니다.”

    서이렌이 싹싹하게 답하자 우영민 감독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런데 준비를 많이 했나 보네요. 서이렌 씨인 줄 몰라봤어요.”

    우영민 감독의 칭찬에 내가 말을 보탰다.

    “그때 의상 회의 때 시안 보내 드린 것과 똑같습니다. 실물로 보니까 달라 보이는 걸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추우니까 저기서 쉬고 있으세요. 조금 있으면 촬영 들어갑니다.”

    “예. 감독님.”

    나는 서이렌을 데리고 배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서이렌을 인사시켰다.

    삼십 분 정도가 흐르고 드디어 진지혜와 이윤석이 나타났다.

    진지혜는 기생 연홍 역을 맡았고, 이윤석은 기방의 악공인 윤태원 역이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빨리 촬영합시다. 해 떨어지면 안 돼요.”

    “죄송해요. 감독님.”

    진지혜는 지각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입고 있던 패딩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섰다.

    나는 촬영을 위해 준비하는 서이렌을 바라봤다.

    얇은 노비 옷을 입은 서이렌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준비한 대로 하면 돼요. 걱정 안 해도 되죠? 서이렌 씨는 준비된 사람이잖아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이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게 미소를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눈까지 동그랗게 뜨니 전혀 다른 사람 같다.

    제대로 꾸미면 여신 같은 사람이 분장과 표정을 달리하니 딱 극 중 배역인 열여덟 살의 단오로 보였다.

    남배우들은 분장에도 한계가 있는데 여배우들은 다르다.

    화장과 의상, 액세서리, 표정에 따라 천의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다.

    “추우면 말해요. 옷에 붙이는 핫팩도 챙겨 왔어요.”

    “그럼, 지금 주세요.”

    서이렌이 손을 내밀자 나는 들고 있던 핫팩을 서이렌의 손에 들려 줬다.

    “내가 붙일 수는 없으니까 빈 팀장님 오면 붙여 달라고 하세요.”

    서이렌은 핫팩을 받아 들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촬영 시작합시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내 가슴이 따뜻해졌다.

    서이렌이 방금 뜯은 핫팩을 내 가슴에 붙이고 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난 괜찮아요. 알잖아요. 난 마네킹이니까요.”

    * * *

    기생으로서 한껏 차려입은 진지혜의 뒤에 서이렌이 쪼르르 달려가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오 역을 맡은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은 원세강에게 교육받은 대로 진지혜를 보자마자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고 인사부터 건넸다.

    진지혜는 눈앞에 선 서이렌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진지혜는 서이렌이 쌩얼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서이렌은 노비라는 역에 걸맞게 화장을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톤 다운된 베이스를 발라서 얼굴색을 평소보다 어둡게 했다.

    눈썹은 일부러 흐리게 만든 상태.

    누가봐도 여신 서이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지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화장을 점검하며 서이렌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둘이 계속 붙어서 촬영해야 하니까 잘해 봐요. NG는 되도록 안 내도록 조심하고요. 난 초짜들이 NG 내서 내 몰입 깨트리는 거 제일 싫어해요.”

    서이렌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성실하게 답했다.

    “예, 선배님. 명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내 옆에 너무 가까이 붙지 말고 조금 뒤로 물러나 서 있어요.”

    “대본에는 연홍과 단오가 딱 붙어 다닌다고 쓰여 있던데요?”

    “지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거예요?”

    진지혜가 차가운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뭐가 문제냐는 듯 동그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선배가 말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우리 둘이 사이에 거리가 좀 있어야 하니까 물러서요.”

    서이렌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이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될까요?”

    “한 걸음 더요.”

    “예. 선배님.”

    “더 뒤로.”

    “너무 멀어지는 거 아닐까요?”

    “잔말 말고 한 발짝만 더 뒤로 가요.”

    “예.”

    서이렌이 한 발짝 더 물러서자 진지혜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요. 기억해요. 앞으로 항상 이 정도 거리에서 쫓아다녀야 해요.”

    서이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진지혜의 요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조감독 우영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촬영 시작합니다.”

    진지혜는 보고 있던 거울을 스태프에게 맡기고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뒤따르는 서이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은 앙다물고 단오 역에 몰입했다.

    그때 카메라 앵글을 확인하던 우영민 조감독이 소리쳤다.

    “거기 두 사람. 너무 멀어졌네요. 세 발짝만 붙어 봐요.”

    “예. 감독님.”

    서이렌은 우영민 감독의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지혜에게 세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서이렌이 바로 뒤에 붙자 진지혜의 입술이 비틀렸다.

    “레디. 액션!”

    우영민 조감독의 큐사인이 떨어지자 진지혜와 서이렌의 연기가 시작됐다.

    기생 연홍과 그녀의 노비인 단오가 천향원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구슬픈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악공 윤태원의 피리 소리를 들은 연홍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때 쫓아오던 단오가 얼굴이 새빨개진 연홍을 보며 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연홍 아씨. 윤 악사께서 벌써 오셨나 봅니다. 악사님의 피리 소리가 들립니다.”

    서이렌의 대사를 듣자마자 진지혜는 그대로 얼음이 됐다.

    ‘뭐야? 말할 때랑 대사 칠 때가 완전 다른데?’

    서이렌의 안정적인 사극 톤 발성에 놀란 진지혜는 순간 자신의 대사를 잊었다.

    “컷! 진지혜 씨 왜 대사를 안 하는 겁니까?”

    우영민 감독의 컷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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