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화 (13/261)

#12화. 원수는 촬영장에서

“두 분이 뭐 하고 계셨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커피 박스를 든 빈선예가 나와 서이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당황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고 커피를 받아 들었다.

“오면서 보니까 진지한 이야기 하시는 거 같던데요.”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요.”

나는 커피를 서이렌에게 내밀며 눈짓을 보냈다.

서이렌은 내 눈짓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커피를 받아 들었다.

빈선예도 커피를 마시며 내게 속삭였다.

“대표님, 이렌 씨 추우니까 촬영 좀 빨리 끝내 달라고 하세요.”

“촬영은 감독 권한인데 제가 그런 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죠.”

“김선우는 제 맘대로 촬영 시간 조정하던데요?”

“그건 김선우가 잘못한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렌 씨가 잘하고 있으니 금방 끝날 겁니다.”

서이렌이 빈선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빈 팀장님.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잘해서 금방 끝낼게요.”

* * *

드디어 서이렌의 단독 촬영이 끝나고 엑스트라와 함께하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서이렌은 엑스트라 모델들에 둘러싸여 피치업 음료수병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 시간은 오후 두 시였고 오후의 태양 빛이 수영장을 비추고 있다.

자연광 속에 서 있는 서이렌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모델들이 입은 비치웨어와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자연스럽게 날리며 광고 자체에는 플러스가 되고 있었다.

문제는 모델들이 지금 얇은 비치웨어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모델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한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서이렌이 제일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방금 물에서 나온 그대로를 표현해야 했기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컷이 늘어날수록 스태프들이 감탄사와 함께 안쓰러움을 드러냈다.

“이렌 씨 어떡해요. 혼자 저렇게 젖어 있으니 추울 텐데.”

“감독님이 오늘따라 예술 병이 도지신 건지 끝내지를 않으시네요.”

스태프들이 쑤군거리며 감독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감독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살짝 보이는 그의 광대를 보면 지금 그가 어떤 상태인지 눈에 훤히 보였다.

“오 분만 쉴게요. 바로 촬영할 거니까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셔 주세요.”

조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태프들이 각자 맡은 모델에게 달려가 담요를 덮어 줬다.

빈선예가 제일 먼저 달려가 서이렌을 챙겼다.

그때 지수연이 불만을 터트렸다.

“짜증 나요. 우리는 똑같은 화면을 강하나랑 다시 찍어야 하는 거잖아요.”

LOK에서 지수연에게 붙여 준 초짜 로드 매니저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오늘 바람도 쌀쌀한데 배우님 힘드시겠어요.”

“오빠가 한번 물어봐요. 요즘 기술도 발달했는데 우리는 지금 찍은 거로 합성하면 안 되는 거예요? 추워서 입이 얼어붙었어요. 더는 못 웃겠다고요.”

지수연의 말에 LOK의 신입 로드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그런 의견을 감독에게 내도 되는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다.

옆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빈선예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수연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촬영 현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스태프들에게 특별 취급을 받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잘못 인지하고 있었다.

지수연을 맡은 초짜 매니저도 마찬가지다.

빈선예는 조감독도 아니고 무려 감독에게 다가가는 LOK 초짜 매니저를 보며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셌다.

그녀가 속으로 셋을 외치자마자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미쳤어? 당신 누구야? 어디 소속인데 촬영에 이래라저래라야?”

감독이 화를 내자 촬영장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꽂혔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요. 제 말을 곡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모델분들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LOK 매니저가 얼굴이 빨개져서 지수연을 힐끔 돌아봤다.

“그러니까 누가 그래? 누가 힘들어서 못 찍겠다고 하는데? 누구 담당이냐고?”

LOK 매니저가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수연…….”

지수연이라는 말에 감독의 동공이 커졌다.

지수연이라면 강하나 빽으로 들어온 모델이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달려 나가 LOK 매니저를 밀어내고 감독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분이 현장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몰랐나 봅니다. 제가 LOK 선배였으니 잘 타이르겠습니다.”

내가 나서자 감독의 미간에 패인 주름이 사라졌다.

나는 당황하는 LOK 매니저의 어깨를 잡고 그를 감독의 시야 밖으로 잡아끌었다.

감독은 서이렌과 지수연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그렇게 추워요?”

지수연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말했다.

“사실 좀…….”

그때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면 되죠. NG 없이 빨리 끝내 볼게요.”

서이렌의 목소리가 촬영장에 퍼지자 스태프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디서 저런 걸 배워 왔을까?

서이렌은 어떻게 하면 촬영장 분위기가 사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렌 씨는 참 성격도 좋아.”

“감독님, 지체하지 말고 빨리 찍읍시다. 우리 이렌 씨 추워요.”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물에 젖은 메인 모델이 괜찮다고 하는데 스무 명 중의 하나인 엑스트라 모델의 불만을 사람들이 들어줄 리 없다.

사실 이 정도 환경이면 촬영 현장 중에서도 상급에 속했다.

오늘 아침에 실내 수영장에서 야외로 바뀌면서 감독도 촬영 날짜를 변경해야 하나 고심이 많았다.

하지만 얽힌 것이 많아 그대로 강행한 것이다.

감독은 모델들이 추워할까 봐 지속해서 짧게나마 쉬는 시간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와 별개로 스태프들은 지수연이 강하나의 빽으로 들어온 LOK의 끼워 팔기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탐탁지 않아 했다.

감독과 조감독이 상의하더니 이내 조감독이 걸어왔다.

“LOK 지수연 씨는 오늘 빠지는 게 어떨까요?”

“뭐라고요?”

“찍은 화면을 돌려 보니까 지수연 씨 표정이 유독 경직되어 있더라고요. 추위를 잘 타서 그러신 거 같은데 이만 돌아가서 따뜻한 방에서 쉬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수연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LOK 초짜 매니저가 그녀의 앞에 나서서 그녀를 말렸다.

초짜 매니저는 내가 해 준 충고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거 같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연아, 너도 잘못했다고 사과드려.”

LOK 매니저의 거듭된 사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촬영된 것을 돌려 보니 정말로 지수연의 표정이 너무 경직되어 있던 터라 빼는 게 맞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지수연과 그녀의 초짜 매니저가 촬영장에서 끌려 나갔다.

“이제 촬영 재개합니다. 방금 소란은 잊어 주세요.”

빈선예가 그녀의 담요를 들고 화면 밖으로 나가려는데 서이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작게 속삭였다.

“복수 성공.”

“어?”

빈선예가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돌아봤다.

“거기, 빠지세요. 촬영 들어갑니다.”

스태프가 멍한 얼굴로 서 있는 빈선예에게 말했다.

빈선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화면 바깥으로 물러나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언제 그랬다는 듯이 다시 여신의 자태로 돌아와 있었다.

‘와. 우리 배우님이 은근 성격 있네. 마음에 들어.’

빈선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대표님. 이렌 씨랑 계약서 썼다고 했죠?”

“예.”

“이번에는 확실한 거죠? 그거 금고에 넣어 놨어요?”

“이번에는 실수 안 합니다. 회사 금고에 잘 넣어 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빈선예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렌 씨는 외모도 마음에 드는데, 성격은 더 마음에 들어요. 딱 내 스타일이야. 이렌 씨 같은 배우만 있으면 천년만년 일할 수 있겠어요.”

* * *

회사로 돌아온 곽이석 본부장이 이번 피치업 CF 관련 담당자들을 소집했다.

회사에 골프 치러 온다는 소문이 무성한 곽이석의 호출을 받은 기획2실 팀원들은 긴장했다.

저 망나니 또라이가 왜 우리를 불렀을까?

본부장실에 들어오니 또라이가 끼고 산다는 실내용 골프 퍼팅 매트가 깔려 있었다.

“앉으세요.”

“예. 본부장님.”

기획2실 박 팀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 곽이석의 앞자리에 앉았다.

곽이석은 현장에서 복사해 온 새로운 콘티와 이곳으로 오면서 간단하게 작성한 광고 기획안을 그에게 내밀었다.

“본부장님. 이게 뭡니까?”

“지금 촬영장에서 오는 길인데 CF 컨셉이 조금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프로모션도 다르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여기 오면서 기획안을 작성했으니 이걸 토대로 다시 안을 만들어 봅시다.”

“아니. 그게 무슨…….”

박 팀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CF 촬영 현장에서 프로모션을 바꿔야 할 만큼 광고 컨셉이 달라지다니 처음 듣는 일이었다.

박 팀장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콘티와 기획안을 살폈다.

그런데 오늘 급하게 만들어진 것치고는 퀄리티가 상당했다.

“실례하지만 이거 누가 작성한 겁니까?”

“누가 썼는지 그게 중요합니까? 내용이 더 중요하지 않아요?”

“그게 아니라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박 팀장이 당황하자 곽이석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나 봅시다. 감독님이 촬영 현장 짧게 편집해서 보내 준 건데 이분이 오늘 캐스팅된 모델입니다.”

곽이석의 손이 태블릿 화면을 클릭했다.

화면 속에는 오전 중에 찍은 서이렌의 촬영 슛이 짧게 편집되어 흐르고 있었다.

영상이 끝났지만, 본부장실의 누구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곽이석은 박 팀장과 기획2실 팀원들의 눈을 보며 알았다.

모두의 눈에 대박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 *

드디어 여우비의 첫 촬영 날이 밝았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에게 돌릴 음료와 핫팩을 챙겨 온 내가 스타탄생으로 들어섰다.

음료는 일부러 태양제과의 비타민 음료로 골랐다.

서이렌이 광고를 찍은 제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당분간은 태양제과의 음료만 마실 예정이다.

나는 주차장에 서 있는 스타탄생의 카니발에 음료 박스와 핫팩을 넣어 두고 차 문을 닫았다.

스타탄생으로 들어가 보니 서이렌과 빈선예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빈 팀장님도 일찍 준비를 마치셨네요.”

내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빈선예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빈선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빈선예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내게 말했다.

“대표님. 혹시 이렌 씨랑 사귀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놀라서 서이렌과 빈선예를 번갈아 쳐다봤다.

소파에 앉은 서이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빈선예는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방금 이렌 씨랑 이야기하면서 들은 게 있어서 그래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대표님. 이렌 씨랑 사귀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난 내 배우랑 절대 안 사귑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누구랑 만나고 그럴 처지가 아니에요.”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다.

고작 삼 년밖에 못 사는 내가 무슨 연애란 말인가?

나는 그 전에 내 배우를 키우는 것이 우선인 사람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의 원흉인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빈선예가 따지듯이 서이렌에게 물었다.

“이렌 씨가 말해 봐요.”

서이렌은 그제야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내게 걸어오는 서이렌을 보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내 눈앞에 가깝게 선 서이렌이 내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대표님 좋아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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