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화 (12/261)
  • #11화. 촬영장의 인어공주

    나는 록 실장을 촬영장 뒤편의 공터로 데리고 갔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 선 나는 록 실장을 돌아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수연은 계획적으로 빼돌린 겁니까?”

    록 실장은 가소롭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온 거니까 속 시원하게 말씀해 주시죠. 어차피 사실을 안다 해도 내가 어쩌지 못한다는 건 실장님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아예 상황을 보는 눈까지 맛이 가진 않았군. 맞아.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원 팀장이 나한테 뭘 할 수 있겠어?”

    록 실장은 그제야 평소 같은 느긋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 그런 겁니까? 대체 신생인 스타탄생이 뭐가 그렇게 미워서 하나밖에 없는 배우를 빼 가려고 하신 거죠?”

    “지금 화를 내야 하는 건 나야. LOK랑 계약하기로 했던 지수연을 가로챈 건 너잖아.”

    “지수연이 제 발로 찾아온 거였습니다. LOK와 정식으로 계약하기 전이었습니다.”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거야.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원 팀장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지수연이 원하지 않는 아역을 강요했다고 들었습니다. 배우가 그렇게 싫어하면 강요하면 안 되죠.”

    “또 그런다. 내가 왜 원 팀장을 싫어하는 줄 알아? 그 착한 척, 자기만 배우를 위하는 척하는 그 꼴이 보기가 싫어.”

    “매니저는 배우를 케어하기 위해 있는 직업입니다. 당연한 걸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죠?”

    “잘난 척하지 말라고. 학벌 좋으면 다야? 내가 이 바닥 경력이 너보다 이 년이나 빠른데, 이자현 인기를 등에 업고 나대고 다녔잖아. 네가 언제까지 승승장구할 줄 알았어?”

    나는 눈이 회까닥 돌아서 가슴에 맺힌 말을 쏟아 내는 록 실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게 쌓인 게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앞으로 너희 하는 꼴을 지켜볼 거야. 스타탄생이라고? 웃기고 있네. 어디서 삼류 영화 제목 같은 이름을 달고 까불어? 내가 조만간 너희 간판 내려가게 해 줄 테니 두고 봐.”

    록 실장은 악담을 퍼붓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걸어가는 록 실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매니저는 배우만 생각해야 한다.

    다른 것들에 우선순위를 빼앗기기 시작하면 온전히 배우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촬영장으로 향하던 록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이 말을 깜박했네. 그렇게 자기 배우만을 위해 살아온 원 팀장이 어떻게 배우한테 버림받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구멍가게만 한 회사라도 소소히 굴리려면 원 팀장 태도부터 바꿔야 할 거라고.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충고해 주는 거니까 새겨들어.”

    “록 실장님.”

    내가 부르든 말든 록 실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록 실장이 내뱉은 마지막 말이 내 가슴을 온통 헤집어 놨다.

    맞다. 내 인생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거다.

    내가 달라졌고,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내 배우가 있다.

    그때 내 핸드폰이 두두 거리며 진동이 울렸다.

    * * *

    빈선예의 전화를 받고 촬영장에 달려간 나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빈 팀장님. 전화로 했던 말이 무슨 말이에요?”

    빈선예가 놀란 얼굴로 뛰어와 내게 콘티를 전달했다.

    간이 스튜디오에서 방금 출력한 따끈따끈한 광고 콘티였다.

    나는 얼떨결에 콘티를 받아 들고 확인했다.

    CF의 앞부분은 같았다.

    엑스트라 모델들이 수영장에서 놀고 있다.

    그때 메인 모델이 수영장에 나타나고 엑스트라 모델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그러다 엑스트라 모델 중 한 명이 미끄러져서 수영장에 빠지는데, 메인 모델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서 물 위로 올라온다.

    마치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인어공주가 구한 것은 엑스트라 모델이 아니라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피치업 음료수다.

    엑스트라 모델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피치업을 건넨다.

    그녀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바라보는 앞에서 음료수를 마신다.

    ‘신비로운 자극. 피치업’이라는 광고 카피가 흐르고 CF가 끝난다.

    강하나가 통통 튀는 컨셉으로 상쾌한 자극이라는 카피를 내세웠다면, 이쪽은 인어공주의 상황을 이용하여 신비로운 자극이다.

    나는 놀란 얼굴로 빈선예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이 인어공주가…….”

    “예. 맞아요, 대표님. 저기 계신 우리의 여신님이 맡으실 겁니다.”

    내 시선이 빈선예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촬영 컨셉에 맞는 옷과 의상으로 바꾼 서이렌이 서 있었다.

    밝은색 비키니를 입었으나 인어공주의 하체 느낌을 내려고 화려한 시폰 랩스커트를 둘러서 전혀 야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마저 났다.

    간단히 세팅만 하고 왔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굵은 웨이브로 바뀌어 있었고 귀 옆에는 커다란 꽃이 꽂혀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로 인어공주 같았다.

    마침 분장을 끝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나 안 되겠어! 이거 사진 찍어서 남겨야 해, 내 역작이야.”

    호들갑을 떠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보며 빈선예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빈선예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LOK랑 강하나가 허락을 했어요? 이렇게 콘티가 확 바뀌었는데도요?”

    “어차피 강하나가 찍는 CF는 바뀌는 거 없어요. 원안대로 갈 건데요, 뭐.”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강하나가 아닐 텐데요.”

    강하나는 악의가 있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만 생각하고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모른다.

    빈선예가 뒤쪽으로 눈짓을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강하나와 록 실장이 타고 온 검은색 밴이 촬영장을 떠나고 있었다.

    “강하나는 갑자기 안 아프던 배가 아픈가 봐요. 오늘은 촬영 못 하겠다고 가던데요.”

    “정말요?”

    “오늘은 이렌 씨만 촬영하고 다시 스케줄 잡아서 강하나 촬영한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촬영장을 떠나는 밴을 보니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눈에 훤했다.

    록 실장이 강하나 성격을 받아 주려면 애 좀 먹겠군.

    당장은 내 힘으로 록 실장을 어쩌지 못한다.

    예전 같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풀어 보려 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다.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엑스트라 모델들이 준비를 마치고 몰려왔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지수연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지수연도 이 CF에 나오는구나.

    아마도 LOK에서 강하나의 끼워 팔기로 넣었겠지.

    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을 몰랐다.

    빈선예도 지수연을 발견하고 눈에 불을 켜고 앞으로 나섰다.

    “저 뻔뻔한 표정 좀 봐요. 내가 이 바닥 뜨는 한이 있어도 지수연 머리털을 다 뽑아 놓고 떠날래요.”

    나는 빈선예의 팔을 잡고 말렸다.

    “빈 팀장님 마음은 다 이해해요. 그런데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CF는 찍어야지요.”

    “아. 진짜. 빈선예 성질 다 죽었네. 알았어요. 내가 이번만 참는 거예요.”

    빈선예는 대기 시간 내내 지수연을 노려봤고 지수연은 그것이 불편한지 시선을 돌렸다.

    * * *

    “지금 장난해요? 나 이 광고 못 해. 안 해!”

    밴 안에서 강하나가 록 실장을 향해 울분을 토해 냈다.

    “어떻게 그런 듣도 보도 못한 무명이랑 내가 투톱으로 광고를 찍을 수 있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그럼 뭐라도 해 봐요. 난 이대로는 촬영 못 해. 당장 태양제과에 연락해서 그 사람 촬영 못 하게 하란 말이에요.”

    “태양제과에 연락해도 소용이 없어. 봤잖아, 내가 방금 이리저리 전화하고 확인해 본 거. 결정권자인 곽 본부장이 현장에서 직접 콘티를 작성한 거라는데 어떻게 하냐.”

    “그게 말이 돼요? 이거 계약 위반이야.”

    “생각해 봐. 우리가 찍을 광고는 바뀐 게 하나도 없어. 그냥 비슷한 컨셉으로 다른 모델로 광고 하나 더 찍는 거뿐이라고.”

    “그럼, 이대로 당하고 있으라고요?”

    “당하긴 뭘 당해? 오늘은 우리 하나가 몸이 아파서 촬영을 못 한 거고 다음에 다시 날 잡아서 촬영하면 되지. 그때는 스타탄생에서 온 걔는 안 올 거야. 그건 내가 확실히 확인했어.”

    강하나의 머릿속에 촬영장에서 본 서이렌이 떠올랐다.

    자신도 뒷걸음질 치게 했던 서이렌의 아우라가 떠오르자 강하나는 치를 떨었다.

    “아. 짜증 나.”

    밴 안에서 강하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날씨가 환상이다.

    쨍한 햇살이 촬영장에 내리쬐며 모델들의 얼굴이 자연광에 반짝거렸다.

    모니터로 보는 풍광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쌀쌀한 바람이 문제였다.

    수영복을 입고 연기해야 하는 엑스트라 모델들은 2월의 찬기를 품은 바람에 떨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사람은 다름 아닌 CF의 메인을 맡은 서이렌이었다.

    서이렌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차가운 수영장 물속에 뛰어드는 컷을 찍고 있었다.

    서이렌이 뛰어들 때마다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탄성을 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다.

    “어이구. 벌써 열 번째네. 추워서 어떻게 한대.”

    “어떻게 찍어도 그림이 되는구먼. 감독님은 그만 좀 하시지.”

    스태프들의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보통의 광고 촬영장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었다.

    “컷! 잠깐 쉽시다. 서이렌 씨도 좀 쉬어요.”

    뒤쪽에서 엑스트라들과 섞여 있던 지수연이 쉬러 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

    “따뜻한 커피 좀 가져올 테니 우리 이렌 씨 담요 좀 덮어 줘요, 대표님.”

    빈선예가 제일 신났다.

    빈선예는 지수연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떠들었다.

    지수연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이 스타탄생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 광고를 자신이 찍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저기 들려오는 ‘서이렌’이라는 이름에 지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방금 물에서 나온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 줬다.

    내가 저기 들어갔다 나오면 물에 빠진 생쥐 같겠지?

    하지만 서이렌은 온몸이 흠뻑 젖어서도 여전히 여신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의 손에 핫팩을 쥐여 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서이렌이 웃으며 나를 향해 답했다.

    “괜찮아요. 나 마네킹이잖아요. 하나도 안 추워요.”

    뻔뻔하게 자신이 마네킹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웃기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멀리 커피를 가져오는 빈선예가 보였다.

    빈선예의 손에는 내가 마실 커피까지 들려 있었다.

    “커피 마시면 몸이 좀 따뜻해질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금방 끝날 거예요.”

    내가 빈선예를 도와주기 위해 일어서려는데 서이렌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서 서이렌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의 스태프들은 다음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가 손을 잡은 걸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서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손이 더 차요.”

    서이렌은 손에 들고 있는 핫팩을 내게 건넸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서이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뭐 하는 겁니까?”

    “대표님 손이 빨개서 만져 본 건데요.”

    서이렌이 입술을 앙다물며 무슨 문제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손이 차갑든 말든 이렌 씨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배우를 챙기는 게 내 일이에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신경이 쓰이는데요?”

    “이렌 씨는 이제 배우예요. 이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오해합니다. 나도 방금 오해할 뻔했어요. 그러니까 다시는 하지 마세요.”

    서이렌이 큰 두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오해하세요.”

    “예?”

    “그냥 오해하시라고요.”

    서이렌의 말을 들은 내 동공이 커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대표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온 거라고. 내가 싫은 사람 소원 들어주기 위해 왔을까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작스러운 서이렌의 고백에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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