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역대급 대타
나는 서이렌을 보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조감독 앞에 섰다.
내가 서이렌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조감독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서이렌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갑게 굴던 조감독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보며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어제 급하게 대타로 결정돼서 촬영 당일에 얼굴을 보이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그런데 프로필 사진이랑 똑같네요. 난 사진이 너무 신급 미모라서 뽀샵빨인 줄 알았어요.”
조감독은 신기하다는 듯이 서이렌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봤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내가 감독님께 연락 해 볼테니.”
감독에게 전화를 건 조감독이 내게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연락 넣었으니까 곧 오실 겁니다.”
조감독은 촬영 현장을 정리하러 가면서도 계속 서이렌을 쳐다봤다.
자연광을 받고 서 있는 서이렌은 여신 그 자체였다.
기본 화장만 했을 뿐인데도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주위의 스태프들도 지나가다 말고 서이렌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침 촬영장에 도착한 강하나가 록 실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강하나는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록 실장을 노려봤다.
서이렌을 보고 놀란 록 실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하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배경에 깔릴 애가 이상한데요?”
강하나는 서이렌을 보자마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인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군중 속에서 자신이 여신처럼 등장하는 것이 이번 광고의 컨셉이다.
그런데 군중 속에 저런 여자가 끼어 있다면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쏟아질 리가 없다.
록 실장도 문제를 깨달았는지 강하나에게 말했다.
“내가 확인해 보고 올 테니 밴에서 기다려. 하나야.”
“확실하게 잘라요. 난 저 여자 앞에서 런웨이 못 해. 아니, 안 해.”
* * *
광고 감독이 간이 스튜디오에서 나왔다.
그의 곁에는 태양제과의 곽이석 본부장이 함께였다.
“본부장님. 촬영 현장 구경하실 거죠? 여기 콘티랑 CF 컨셉이 있는데 함께 보시면 됩니다.”
감독이 내민 서류철을 곽이석은 한 손으로 가볍게 내쳤다.
“내가 광고 찍는 거 보러 왔나? 저기 예쁜이들 보러 왔지. 됐으니까 감독이나 많이 봐.”
“그래도 총괄 책임자신데 확인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독은 서류철을 다시 곽이석에게 들이밀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감독은 CF나 잘 찍어.”
곽이석이 선글라스를 끼고 사라지자 감독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어휴. 저 새끼. 누가 난봉꾼 아니랄까 봐. 아주 지랄을 해요. 수저빨만 아니면 스태프로도 못 써먹을 놈 주제에.”
그때 감독 앞으로 조감독이 달려왔다.
“감독님. 대박이에요.”
“지금 나 예민하니까 조용히 말해.”
조감독은 감독이 화를 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했다.
“군중 장면에 들어갈 애들 중 하나가 바뀌었잖아요.”
조감독의 말에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촬영 전날 모델이 한 명 빠진다고 해서 짜증이 났는데 급하게 구한 대타가 방금 사라진 곽이석 본부장이 꽂아 넣은 사람이다.
“걔는 동선 조절해서 뒤로 보내. 대충 구색만 맞게. 곽 본부장이 꽂아 넣은 사람이라 못 짜르니까. 그런데 대체 회사가 어디야? 무슨 빽이 그렇게 든든해?”
“스타탄생이라는데요.”
“거긴 또 뭐야? 뭔 듣보잡 회사에서 그런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해?”
“가 보셔야 해요. 완전 여신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본 어느 배우보다 예뻐요.”
“뭐?”
감독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자 조감독이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가서 보세요. 강하나는 옆에 서 있으면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 * *
곽이석이 촬영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입 좀 다물어. 파리 들어가겠다.”
“어? 빈선예.”
빈선예가 곽이석의 옆에 서더니 친하게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난봉꾼 역할은 할 만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바닥에 소문 다 났어. 태양제과 막내아들이 여배우들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닌다고.”
“놀리지 마라.”
“나 다 알고 있어. 너 그거 연기하는 거잖아.”
빈선예의 말에 곽이석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빈선예와 곽이석은 서울의 유명 사립고등학교에서 만났다.
당시 곽이석은 태양제과 가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를 보내고 있었다.
집에서는 배다른 형제들에 치여 힘들게 보내고, 학교에서는 첩의 자식이라는 것이 소문나서 왕따를 당했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빈선예였다.
그때도 지금도 빈선예의 지론은 한결같았다.
‘너 잘생겨서 왕따당하는 거야. 태양제과 형제들 얼굴이 워낙 별로잖아.’
그날 이후 빈선예와 곽이석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빈선예는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난봉꾼 역을 자처하는 친구를 보니 안쓰러웠다.
그때 소품팀에서 빈선예를 찾아왔다.
“가 봐야겠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응. 나 회사 가도 일 없는 거 알잖아.”
“능력 좋은 놈이 그게 뭐 하는 짓이냐. 암튼 난 간다.”
* * *
서이렌은 촬영장 한가운데 혼자 섬처럼 서 있었다.
“아주 군계일학이네.”
스태프들은 서이렌의 주위에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어느 하나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을 만나고 돌아온 내 눈에 서이렌의 곁에 알짱거리는 누군가 보였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곽이석?”
마침 의상을 가져온 빈선예는 내가 곽이석의 이름을 부르자 놀라서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대표님. 조용히.”
“아!”
나는 내가 너무 크게 소리친 것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대표님. 곽 본부장이 소문이 좀 나쁜데요. 그거 다 그냥 소문이에요.”
“그래요? 그걸 빈 팀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곽이석이 여배우 킬러라는 사실은 이 바닥에서 유명하다.
나뿐이겠는가? 신인 배우를 키우는 매니저들에게 경계 대상 일 호가 바로 곽이석이었다.
하지만 난봉꾼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피치업 광고 성공을 시작으로 그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지수연과 계약할 때 그는 무려 태양제과 부사장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곽이석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빈선예는 내게 대충 사정을 설명했다.
그때 내 눈에 멀리서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보였다.
록 실장이었다.
감독과 대화가 잘 안 됐는지 록 실장은 굳은 얼굴로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록 실장의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서이렌을 빼 달라고 했겠지.
나는 록 실장이 어떤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다.
아마도 메인 모델인 강하나를 등에 업고 찍어 누르려고 했을 테지만 사람을 잘못 봤다.
이 광고의 감독은 두들길수록 강성이 되는 특이한 사람이다.
서이렌이 강하나보다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기에 막상 촬영을 시작하면 감독이 되레 빼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도 하기 전에 힘으로 압박했으니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때 내 두 눈이 커졌다.
록 실장이 다짜고짜 서이렌의 팔을 잡아채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새끼가.”
난 욕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 손에 자라면서 호되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록 실장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그때 서이렌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던 곽이석이 나보다 먼저 튀어 나갔고 록 실장의 어깨를 잡았다.
화가 난 록 실장이 곽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밀쳤다.
곽이석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수영장에 빠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스태프들이 물에 빠진 곽이석을 보고 화들짝 놀라 뛰어왔다.
마침 수영장에 도착한 나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다시 한번 풍덩 소리가 들렸다.
서이렌이 수영장에 뛰어든 것이다.
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모르게 구두를 벗고 재킷까지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었다.
내가 뛰어들려는 그때 서이렌이 떠올랐다.
‘쏴.’
물보라가 휘날리며 수면 위로 떠오른 서이렌의 곁에는 곽이석이 함께였다.
나는 분명히 이 장면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켜보는 스태프들 역시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인어공주다.
서이렌은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처럼 물에 빠진 곽이석을 구해 내 수영장 위로 올라왔다.
곽이석은 올라오자마자 물을 토해 내고 고개를 들었다.
물에 젖은 서이렌이 가만히 곽이석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명화 같았다.
그제야 자신이 물속으로 떠민 사람이 곽이석 본부장이란 사실을 안 록 실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나는 멀쩡한 서이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빈선예에게 서이렌을 맡긴 나는 록 실장의 어깨를 쳤다.
“미치셨습니까?”
“뭐?”
당혹감에 물들어 있던 록 실장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너 뭐라고 했어? 지금 나보고 미친 거라고 했어?”
“예. 그랬습니다. 선배라 해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촬영장에서 지금 이게 무슨 추태십니까?”
록 실장은 한 대 칠 기세로 나를 바라봤으나 몰려드는 스태프를 보고 눈치를 살피더니 내게 말했다.
“너, 나 좀 따라와 봐.”
“남의 눈치 살피는 건 여전하시네요. 예. 갑시다.”
록 실장은 내 반응에 꽤 놀란 눈치였다.
사실 나도 놀라웠다.
낯간지럽지만 내 별명이 LOK의 생불, 돌부처였다.
배우와 스태프가 욕먹을 일이 생기면 내가 가서 다 막아 주며 살아왔다.
지금껏 누군가와 큰소리 내며 싸운 적도 없다.
뭐가 달라졌을까?
나는 내 인생의 끝이 확정된 이후로 앞뒤 재지 않고 내달리고 있다.
나는 당황한 록 실장보다 앞서서 걸어갔다.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록 실장은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 * *
간이 스튜디오로 들어온 곽이석에게 감독과 조감독이 달려들었다.
“록 실장 저게 LOK만 믿고 나대더니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어.”
감독은 고개를 돌려 물에 젖은 곽이석을 확인했다.
꼴 보기 싫은 클라이언트지만 사람이 물에 빠졌으니 괜찮은지 확인한 것이다.
“괜찮으세요, 본부장님?”
“감독님. 아까 카메라 설치하고 있던데 찍고 있었어요?”
“예?”
“수영장에 카메라 있던데 테스트 중이었으면 나 물에 빠진 거 찍혔을 거잖아요.”
“아. 예. 그렇죠.”
곽이석의 말을 알아들은 조감독이 쌩하니 밖으로 튀어 나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그가 노트북의 영상을 재생하자 방금 찍었던 테스트 슛 영상이 재생되었다.
“여기네요. 여기서 록 실장이 본부장님을 확 밀었습니다. 다 찍혔으니 증거로 충분할 겁니다.”
조감독의 말에도 곽이석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조용히 빨리 감기를 눌러 서이렌이 물에서 올라오는 장면이 나오자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일시 정지임에도 불구하고 정지 화면 속의 서이렌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우리 CF 콘티 바꿉시다.”
“예?”
갑작스러운 곽이석의 말에 감독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본 원안으로 하나 찍고, 나머지는 전혀 다른 컨셉으로 갑시다. 여기 이거 보이죠. 인어공주 컨셉입니다. 모델은 이분으로 하고요.”
“아. 그게.”
곽이석은 탁자에 있는 태블릿을 가져와서 뭔가 그리기 시작했다.
오 분도 안 되어 곽이석이 감독 앞에 새로운 콘티를 내밀었다.
처음 그린 콘티라고는 믿을 수 없는 퀄리티에 감독과 조감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안으로 가면 지금 준비된 소품과 스태프로 해결 가능할 거 같은데 맞죠?”
감독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곽이석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예. 그렇죠.”
“그럼, 이대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