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9화 (10/261)

#9화. 여신의 등장

미로 같은 골목에 들어서자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눈앞에는 누아르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위에는 한눈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스쳐 지나갔다.

어제 아침 제작사 소울로부터 캐스팅 확정 소식이 들려왔다.

배역은 내가 본 미래와 마찬가지로 단오 역이다.

소울과 정식으로 계약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나는 영화판에서 일하는 친한 형님이 소개해 준 그곳을 찾아들어 갔다.

어른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니 녹슨 철문이 나왔다.

철문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줄을 당기자 작은 문이 열렸다.

“어떻게 왔어?”

작은 창을 사이로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나를 향해 물었다.

“신분증을 만들러 왔습니다. 김주현 씨 아시죠? 그분이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내는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이내 문을 열어 줬다.

“김 씨 소개로 왔다고? 그 양반은 술 한잔 사러 온다고 한 지가 언젠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야?”

“형님이 지금 영화 촬영 막바지라서 바쁘십니다. 끝나면 바로 찾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거 참, 사람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눈앞의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두 눈으로 나를 살폈다.

“김 씨네 영화는 잘될 거 같아?”

“그건 저도 모르고 무당도 모르죠. 영화의 흥행은 신이 좌우하는 거니까요.”

“내가 이래 봬도 운이 좋아. 김 씨한테 전하라고. 그 영화 잘될 테니 나중에 한턱 사라고 말이야.”

사내는 이 뒷골목을 관할하는 뒷세계의 인물이다.

선배는 이 거리에서 실재했던 사건으로 영화를 만들기에 앞서 자료 조사를 하다가 이 사내와 알게 됐다고 했다.

안쪽의 쪽방 문이 열리더니 머리가 덥수룩한 소년이 커피잔을 들고나왔다.

소년이 타 온 커피 믹스의 진한 향기가 빛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을 가득 채웠다.

“마셔.”

나는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소년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미성년자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게 수상했다.

불법체류자인가?

사내는 소년이 가져온 커피를 단번에 마시더니 밖으로 나갔다.

“락아. 잘 처리해 드려.”

“예.”

사내가 나가고 쪽방에 나와 소년만이 남았다.

소년은 어려 보이는 나이처럼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신분증이랑 서류 만들러 오셨다고 했죠? 사진 가져오셨어요?”

“가져왔습니다.”

“따라오세요.”

소년은 쪽방의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책상 위에는 지저분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컴퓨터와 각종 장비가 놓여 있었다.

“나이가 몇 살이에요?”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왜요?”

“너무 어려 보여서요.”

“다음 달이면 만으로 열아홉 됩니다.”

역시 미성년자구나.

나는 소년이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이 바닥에 일하는 것치곤 순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였다.

“사진 주세요.”

나는 양복 안에 손을 넣어 서이렌의 사진을 꺼냈다.

어젯밤에 급하게 찍어 온 증명사진이었다.

사진을 받아 든 소년의 손이 멈칫했다.

“뭐예요? 이거 진짜 사람 맞아요?”

소년은 내 손에서 증명사진을 빼앗더니 뚫어지게 바라봤다.

“완전 여신이네. 설마 이거 포토샵이에요?”

“뭐. 그렇죠.”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어휴. 너무 하셨네. 증명사진은 여신인데 본판은 다를 거잖아요. 제가 인간답게 수정해 드려요?”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 만들어 주세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소년은 증명사진을 바라보며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드디어 작업을 시작했다.

소년의 작고 흰 손에서 순식간에 주민등록증이 만들어졌다.

소년이 나에게 물었다.

“나이랑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스물한 살입니다. 생일은 12월 24일이요.”

12월 24일은 내 첫 번째 배우였던 심하영의 생일이다.

“이름은요?”

“서이렌입니다. 여기 이름이요.”

내가 서이렌이라는 이름이 쓰인 쪽지를 건네자 소년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이름이랑 얼굴이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나도 모르게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스타탄생에서는 서이렌의 프로필 촬영 작업이 한창이었다.

빈선예의 친구인 포토그래퍼 한승준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휴. 좋습니다. 너무 좋아요. 예술이네요. 지금 그 표정 환상적입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아요.”

쉴 새 없이 떠들며 작업하는 한승준을 보며 빈선예가 결국 한마디를 했다.

“야! 정신 사나워. 그만 좀 떠들어.”

“원래 이렇게 찍는 거야. 내가 이렇게 해 줘야 모델도 긴장을 풀고 더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한승준은 빈선예를 향해 변명을 늘어놨지만, 그가 생각해도 지금 너무 오버하고 있기는 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한승준은 촬영한 사진을 확인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빈선예는 만족스러운 결과에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아. 더 안 찍어도 되겠다. 이 정도면 너무 훌륭한데?”

“그렇네. 버릴 사진이 없네. 아. 더 찍고 싶은데.”

“뭔 소리야? 네가 바빠서 두 시간밖에 시간 못 내준다며? 기억 안 나세요? 요즘 잘나가기 시작한 포토그래퍼 한승준 님.”

한승준은 프로필 사진을 찍어 달라는 빈선예의 부탁을 받고 오늘 힘들게 시간을 낸 것이다.

그만큼 요즘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배우를 예쁘게 찍어 준다고 여기저기 소문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암튼 난 두 시간 채울 거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한승준이 카메라를 들고 일어서자 이 층에서 옷을 갈아입고 서이렌이 나타났다.

한승준은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 * *

여우비 촬영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주연배우의 촬영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단역인 서이렌은 촬영은 조금 늦다.

스타탄생 사무실에서는 빈선예가 책상 위에 앉아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내가 지금 안 보게 생겼어요? 대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일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왜 대표님이 하시냔 말이에요.”

나는 지난주에 빈선예에게 기획팀장이란 직함이 찍힌 명함을 건네줬다.

내 명함에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이라고 찍혀 있다.

스타탄생의 정식 직원은 대표와 기획팀장 단둘뿐이다.

나는 지금 사무실 경비와 세금계산서를 처리하는 중이다.

“돈 많잖아요. 왜 사람을 안 쓰고 사서 고생해요?”

“돈 없어요. 우리 기획팀장님 월급 주려면 빠듯해요. 그리고 나 한국대 컴퓨터 공학과 나온 거 알잖아요.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해요. 볼래요?”

내가 눈을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자 빈선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봤더니 대표님 짠돌이였네. 십억이 넘는 마네킹을 모셔 두고 뭐 하는 짓인지.”

빈선예가 마네킹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흠칫 놀랐다.

“그나저나 마네킹은 언제 가져가셨어요? 얼마 전부터 안 보이던데요.”

“집에 가져갔어요. 그건 안 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감정이나 받아 보자는 거였는데.”

불만을 토해 낸 빈선예가 혀를 찼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빈선예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전화를 하고 온다며 밖으로 나갔다.

서류를 정리하던 나는 빈선예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빈선예가 마네킹 이야기를 할 때마다 죄를 지은 것만 같다.

지금 서이렌은 연기 선생님께 수업을 듣고 있다.

LOK에 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연기 선생님께 서이렌의 지도를 맡겼다.

나도 서이렌이 연기하는 영상을 몇 번이고 모니터링해 봤는데 확실히 서이렌은 연기를 잘한다.

하지만 몇 개의 영상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서이렌의 연기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서이렌은 대스타 진설의 연기를 고대로 카피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전설적인 스타 진설.

서이렌은 아마도 양장점에서 어머니가 보시던 진설의 영화를 함께 본 것 같았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빈선예가 환한 얼굴로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대표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저 광고 따냈어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광고를 따내다니요?”

“친구네 회사에서 내일 광고를 찍을 건데 출연하기로 한 모델 중 한 명이 일이 생겨서 못 나온대요. 그 친구가 제가 아직도 LOK 다니는 줄 알고 연락했더라고요. 괜찮은 모델 좀 소개해 달라고요.”

광고라고?

순간 내 머릿속에 촤라락 하고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찍으면 여우비 방송 나갈 때쯤에 광고도 방송을 탈 거다.

잘 만하면 시너지가 날 수도 있다.

“무슨 광고래요?”

“음료 광고요. 복숭아 음료래요. 회사는 태양제과.”

순간 내 머릿속에 미래에서 봤던 CF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 그거구나. 복숭아 여신.

태양제과에서 나온 복숭아 음료 광고 시작이 올해부터였구나.

태양제과의 복숭아 음료 모델은 해마다 바뀌었는데 매번 그해의 라이징 스타를 섭외했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았던 지수연도 그 광고를 찍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빈선예에게 물었다.

“우리가 한다고만 하면 출연할 수 있는 건가요? 미팅 안 해도 돼요?”

“제 친구가 광고 책임자예요. 제가 이렌 씨 프로필 사진 톡으로 보내 주니까 당장 계약하자고 하던데요. 그리고 당장 내일이 촬영이라 그쪽에서도 급하네요.”

“촬영 장소는 어디예요?”

“내일 오전 여덟 시까지 서울호텔 수영장으로 오래요.”

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 의중을 파악한 빈선예가 웃으며 답했다.

“우리가 한다고 연락할게요.”

* * *

촬영장에는 이미 수많은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이번 광고는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진행된다.

원래는 실내 수영장에서 촬영 예정이었으나 호텔 측의 문제로 급하게 야외 촬영으로 바뀌게 됐다.

피치업 광고의 콘티는 단순하다.

수많은 여자 모델들이 수영장에서 서로 웃고 떠들며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메인 모델이 등장한다.

피치업 음료수를 들고 걸어오는 그녀.

엑스트라들은 메인 모델에 매료되어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복숭아 알갱이가 빛나는 투명한 피치업 음료다.

어느덧 엑스트라들이 메인 모델 주위로 몰려들고, 메인 모델은 엑스트라들이 바라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치업을 남김없이 모두 마신다.

상쾌한 자극. 피치업이라는 카피가 뜨며 광고가 끝난다.

이 CF의 주인공은 LOK의 신데렐라 강하나다.

강하나는 LOK에서 차세대 이자현으로 띄우려고 하는 배우다.

오늘 강하나를 둘러싼 스무 명의 엑스트라가 출연 예정이다.

엑스트라들은 다른 중소 기획사의 신인으로 구성되었다.

서이렌은 그 스무 명의 엑스트라 중 하나로 캐스팅된 것이다.

시동을 끈 원세강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은 내리지 말고 여기서 대기해요. 잠깐 현장에 좀 다녀올게요.”

이른 새벽부터 숍에 다녀온 서이렌과 빈선예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린 나는 감독을 찾아다녔다.

어제 오후 늦게 급하게 광고 대행사를 찾아가서 미팅하고 서이렌의 출연을 확정 지었다.

하지만 감독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에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조감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때 익숙한 음성이 내 귓가에 들렸다.

“이게 누구야. 원 팀장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굳은 표정을 풀고 뒤로 돌아섰고, 내 눈앞에 록 실장이 보였다.

록 실장이 여긴 왜 왔지?

강하나는 록 실장이 관여하지 않을 텐데?

나는 사무적인 표정으로 록 실장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원 팀장도 오랜만이야. 이제 원 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록 실장은 나를 위아래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 대표가 키우는 신인도 광고를 촬영하나 봐. 엑스트라 중의 하나인가?”

“예.”

대충 대답한 나는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주위의 감독을 찾았다.

나는 그제야 조감독을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제 회사에서 뵀었죠. 스타탄생의 원세강입니다. 혹시 감독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조감독에게 인사를 하자 조감독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 스타탄생…….”

조감독은 윗선에서 꽂아 놓은 모델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뒤에서 지켜보는 록 실장은 떨떠름한 조감독의 표정을 보고 실소를 흘렸다.

그때였다. 촬영장 저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록 실장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군중을 헤치고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야. 뭐야? 왜 그래?”

조감독은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는지 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스태프들이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여신이 그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다름 아닌 서이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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