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삼 년의 계약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 나와 빈선예는 아무 대화도 없이 오디션장으로 들어가는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시계만 바라보던 빈선예가 더는 못 참겠는지 내게 물었다.
“이렌 씨는 잘하고 있을까요?”
마치 자신이 오디션을 보는 당사자처럼 잔뜩 긴장한 빈선예를 보자 웃음이 나왔다.
“아까 봤잖아요. 오디션을 앞두고 그렇게 안 떠는 신인 배우는 십 년 차인 나도 처음 봤습니다.”
“하긴. 이렌 씨 깡이 보통이 아닌 거 같아요. 연기도 너무 잘하고. 그럼, 오디션도 문제없는 거겠죠?”
“실전은 연습이랑 다르죠. 그런데 느낌이 좋아요.”
“붙을 거 같아요?”
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던 빈선예는 내 미소를 보자마자 얼굴이 풀어졌다.
대박 신인은 보면 안다.
내가 이자현을 처음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이 떠올랐다.
윤조가 떠나고 연예계 일을 접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내게 이자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심어 줬다.
하지만 서이렌은 어떠한가?
고작 반나절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내 감이 말하고 있다.
저 사람이다.
내 마지막 배우는 바로 저 사람이라며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그때 오디션을 마치고 나가려던 무리가 멈춰 섰다.
“저 사람 LOK 원세강 아니냐?”
“뭔 소리야? LOK 원세강이 왜 여기에 있어? 오디션 따라다닐 짬이 아니잖아.”
“봐 봐. 진짜 원세강이야.”
“정말이야?”
놀란 매니저가 안경을 고쳐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안경 낀 매니저는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어라. 진짜 원세강이네.”
“야. 조용히 해. 듣겠다.”
보아하니 숲 엔터의 로드 매니저들인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모른 척했다.
그들은 그때부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이 아무리 작게 떠들어도 대기실이 텅 비었기에 내 귀에 그들의 대화가 쏙쏙 들어와 박혔다.
“JTV에 원세강이 왜 왔지? 이자현 JTV 드라마 찍어?”
“야. 너 못 들었어? 원세강 이제 이자현 매니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들었어? 이자현이 매니저 배신하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그게 정말이야? 대박 사건이네. 그럼, 원세강이 여기에 왜 있지? 설마 로드로 강등된 건가?”
“팀장급을 어떻게 로드로 강등시키냐? 들어 보니 LOK 나와서 회사 차렸다고 하던데.”
“대단하네. 회사를 차릴 생각을 다 하고. 그런데 이자현 정도면 자기 키운 매니저도 갈아 치울 수 있구나. 와. 소름 돋는다.”
숲 엔터의 로드 매니저들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빈선예가 더는 못 참겠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냥 놔둬요.”
“나는 못 참겠는데 대표님은 괜찮아요?”
“이 바닥에서는 보이는 것도 안 보이는 척하고, 들리는 것도 무시해야 할 때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빈 팀장님이 참으세요.”
“어휴. 진짜. 내가 대표님 말이니까 참을게요.”
빈선예는 고개를 획 돌려 숲 엔터의 로드 매니저들을 째려봤다.
그들은 빈선예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이 원세강이 키우는 신인인가? 강렬하게 생겼네.”
“설마 신인 배우겠어? 예쁘긴 한데 배우감은 아닌데.”
큰일이다. 빈선예도 다 들은 거 같다.
나는 빈선예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나온 신인 배우들이 굳은 얼굴로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조연급 배우는 급하게 오디션장을 떠났고, 숲 엔터의 최유진은 로드 매니저가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제일 늦게 나온 서이렌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서이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빈선예가 서이렌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디션 어땠어요? 잘 본 거 같아요?”
“그럼요. 잘 봤어요.”
서이렌이 미소지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빈선예는 그 모습을 보고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반나절 연습하고 들어간 건데. 어쩜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요?”
“저는 뭐든 잘하거든요.”
당연하다는 듯한 서이렌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서이렌과 함께 오디션을 본 다른 배우들의 굳은 얼굴을 보면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최유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요. 여기 더 있기 싫으니까.”
“알았어. 유진아. 다른 선배들은 먼저 갔어. 우리만 가면 돼.”
빈선예는 서이렌의 어깨에 코트를 둘렀다.
“대표님. 우리도 가요. 이렌 씨 힘들겠어요.”
“예. 빈 팀장님. 갑시다.”
나와 빈선예가 양쪽에서 서이렌을 호위하고 가는듯한 모습으로 대기실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숲 엔터 일행을 지나치며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 예.”
내 인사를 받은 숲 엔터 로드 매니저들이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눈앞을 지나치는 서이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경 낀 매니저는 입까지 벌리고 서이렌을 쳐다봤다.
최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을 냈다.
“뭐 하는 거예요. 빨리 가자니까요.”
* * *
스타탄생으로 돌아온 후, 빈선예를 평소보다 일찍 퇴근시켰다.
어젯밤부터 지수연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뛰어다녔던 빈선예는 피곤한지 사양하지 않았다.
서이렌과 단둘이 남자 나는 그녀 앞에 섰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내 눈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요?”
“당신 마네킹 맞죠?”
서이렌은 내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난 서이렌입니다. 대표님이 나를 그렇게 불러 주셨잖아요.”
“진짜 이름은 뭔데요?”
“서이렌이요.”
“나는 지금 당신과 말장난 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도 장난치려는 게 아니에요. 난 이름이 없었고 대표님이 내게 서이렌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내 이름은 서이렌이에요.”
서이렌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나 서이렌이나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어제오늘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네요. 다 꿈같아요. 이제 곧 꿈에서 깨는 걸까요?”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꿈일지도 모른다.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다.
“이거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건 아니죠? 어떻게 마네킹이 살아 움직이는 거죠? 내가 말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정신을 차려 보려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서이렌이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느낀 나는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신이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겁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원하는 배우. 그 사람이 나예요.”
지금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설마 지난밤에 어머니의 양장점에서 주책맞게 눈물을 흘리며 말한 그걸 말하는 걸까?
서이렌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피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서이렌.”
“이것만 대답해 줘요. 당신 마네킹 맞죠? 그렇죠?”
“내가 마네킹이었던 건 중요하지 않아요. 난 이제 서이렌이니까.”
나는 그녀를 피해 뒷걸음질 치다 그만 벽에 부딪혔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벽에 딱 붙어 있는 내 눈 바로 앞에 섰다.
그녀의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지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내가 달을 보면서 뭐라고 소원을 빌었었지?
고작 며칠 전 일이건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 서이렌의 신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완벽한 배우. 그게 바로 나예요.”
* * *
여우비 제작사인 소울에서는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회의가 한창이었다.
박수현 작가가 진기오 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연 바꿉시다. 오늘 보셨잖아요. 연홍은 서이렌이 더 잘 어울립니다.”
진기오 감독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숲 엔터와 이미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어떻게 파기합니까? JTV에서도 안 받아 줄 거예요.”
“아까 JTV 관계자 표정 못 봤어요? 서이렌 오디션 끝나자마자 물개 박수까지 쳤다고요.”
“그래도 안 돼요. 이미 캐스팅 기사까지 다 나갔습니다. 이건 못 바꿔요.”
“아. 진짜. 서이렌이 연홍 역에 딱인데. 이렇게 내가 쓴 캐릭터 이미지랑 딱 맞는 배우를 찾기도 어려운 일인데.”
박수현 작가는 안타까운지 애꿎은 펜에 신경질을 부렸다.
진기오 감독도 박수현 작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서이렌은 연홍 역과 안성맞춤이었다.
“어디서 그런 신인을 데리고 왔을까요?”
“예?”
“이자현 매니저가 발굴한 신인이라면서요?”
“그건 저도 모르죠. 나중에 원 대표 만나면 물어보시든가요.”
“그럼, 캐스팅은 하겠다는 건가요? 계약할 때 만나야 하니까요.”
박수현 작가의 물음에 진기오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박수현 작가와 진기오 감독은 결국 서이렌을 연홍 역으로 캐스팅은 못 하지만 다른 방안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배역이 뭐가 남았죠?”
진기오 감독의 물음에 박수현 작가가 태블릿 PC를 켰다.
“그나마 나이 때가 맞고 비중 있는 역은 연홍의 동료인 매향이랑 노비인 단오가 남았어요.”
매향은 연홍과 같은 기생이지만 알고 보면 악역의 간자로 키워진 인물이다.
정체가 탄로 나며 극의 반전을 꾀하는 중요한 역이지만 그래서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단역처럼 숨어 있다가 정체를 드러내는 역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단오는 서브 캐릭터인 연홍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니는 역이기에 분량은 많다.
단지 대사가 별로 없을 뿐.
그 순간 박수현 작가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단오 줍시다.”
“매향이 낫지 않을까요? 매향은 그래도 중요한 키가 되는 인물이잖아요.”
“안 돼요. 매향이는 그 반전 때문에 들어가는 인물이고 별로 나오지도 않잖아요.”
“단오가 대사가 없어서 그렇지 화면에는 자주 등장하긴 하네요. 그런데 서이렌이 단오를 하기엔 너무 튀지 않겠어요?”
“아까 오디션 촬영한 화면 봤잖아요. 연기로 충분히 커버 칠 수 있어요. 그리고 분량은 걱정하지 말아요.”
박수현 작가의 말에 진기오 감옥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비중을 늘리겠다는 건가요?”
“극에 영향이 가지 안 가게 해 볼게요. 어때요?”
진기오 감독도 서이렌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금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면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내게는 삼 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저것 따질 게 없단 말이다.
서이렌은 어느새 종이와 펜을 가져와 내 앞에 섰다.
서이렌은 나를 향해 계약서를 쓰라고 독촉하고 있다.
내가 서이렌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없을 거다.
온 대한민국을 뒤져도 못 찾겠지.
외모, 연기, 아우라.
모든 게 완벽한 준비된 배우.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나는 눈앞에 온 기회를 잡아야 한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나는 서이렌의 손에서 종이와 펜을 빼앗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내 책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계약서 서식을 출력해 온 나는 서이렌의 눈앞에 그것을 내밀었다.
“계약 기간은 삼 년입니다.”
“그렇게 짧아요?”
“삼 년이면 충분합니다.”
내겐 그것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계약서에 삼 년이라고 명시하고 그것을 서이렌에게 넘겼다.
“내가 당신을 삼 년 안에 톱스타로 만들어 줄게요. 나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서이렌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내 손에서 계약서를 채가며 말했다.
“삼 년이든 십 년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배신하지 않아요. 난 마네킹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