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유 있는 자신감
여우비 오디션이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이나 지났다.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배어 나왔다.
조감독 우영민이 진기오 감독에게 슬쩍 물었다.
“조금 쉬었다가 하실까요, 감독님?”
진기오 감독이 박수현 작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작가님. 어떻게 할까요? 이제 두 팀만 더 보면 끝나는데요.”
박수현 작가가 옆자리에 앉은 JTV 관계자들을 슬며시 살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가요. 단숨에 끝내 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러시죠. 영민아. 사람들 들여보내 줘.”
“예. 감독님.”
조감독 우영민이 스태프에게 사인을 보내자 신인 배우 세 명이 오디션장으로 들어왔다.
한편, 대기실에는 드디어 마지막 조만이 남았다.
나는 대본을 보고 있는 서이렌을 보며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빈선예도 같은 생각인지 내게 귓속말을 걸어왔다.
“대표님. 서이렌 씨 대체 어디서 캐스팅한 거예요? 길거리 캐스팅 맞아요?”
“아. 뭐. 왜 그러는데요?”
“지금 저걸 한번 봐요. 발성이며 표정 연기며 한두 번 연습해 본 솜씨가 아닌데요? 혹시 원래 알던 사람이었어요?”
“네. 그런 셈이죠.”
“진짜요? 대표님 아는 사람이라고요?”
놀란 빈선예는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커졌고 대기실에 남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 쪽을 쳐다봤다.
이 와중에 서이렌만은 대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빈선예는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물었다.
“지수연이랑 비교도 안 돼요. 지수연은 일주일 동안 맹연습시켰어도 사극 발성이 안 나왔잖아요.”
빈선예의 말이 맞다.
내가 본 미래에서도 지수연은 연기로 스타가 된 경우는 아니었다.
행운이 겹치고 겹쳐서 스타가 된 케이스가 그녀였다.
따지고 보면 소속사가 LOK라서 가능한 거였다.
이미 내가 본 미래와 달라졌지만 나는 웬일인지 서이렌이 배역을 따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준비된 신인을 안 뽑을 리가 없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진짜 꿈은 아니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내 다리를 꼬집었다.
아프다.
* * *
세 명의 신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박수현 작가가 이마를 짚었다.
“대체 숲 엔터에서 몇 명이나 보낸 거예요?”
“글쎄요.”
진기오가 프로필을 훑어보고 말했다.
“다섯 명이네요. 이제 마지막 한 명 남았습니다.”
진기오 감독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주인공이랑 조연 꽂았으면 됐지. 단역까지 죄다 숲 엔터에서 뽑으라는 건 조금 양심 없는 거 아녜요?”
박수현 작가의 불만에 옆자리에 앉은 JTV 관계자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JTV 관계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는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했다.
“어쩌겠어요. 이진아 계약할 때 조건이 소속사 배우들 끼워팔기였는데요.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죠. 오디션 보고 우리가 결정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오디션 보는 거기도 하고요.”
진기오의 말에 박수현은 혀를 찼다.
“내가 진짜 이진아가 마음에 드니까 참는 거예요. 그런데 JTV랑 숲 엔터는 무슨 관계죠? 왜 이렇게 숲 엔터를 밀어주는데요?”
진기오는 씁쓸하게 웃으며 박수현의 질문에 답했다.
“대주주.”
“하. 방송국이 연예기획사 대주주라고요?”
“숲 엔터는 제작도 하니까요.”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JTV 관계자들이 들어왔다.
진기오 감독은 빨리 오디션을 끝내고자 조감독에게 눈짓을 보냈다.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드디어 마지막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들어온 신인 배우들이 먼저 자리에 앉고 제일 마지막에 들어온 서이렌이 남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지정 연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차례대로 시작해 주세요.”
우영민 조감독의 말에 신인 배우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제일 왼쪽에 앉아 있던 배우가 일어나더니 감독과 작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삼십이 번 최유진입니다.”
앳되게 생긴 신인 배우의 목소리가 오디션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돌 가수 캐럿 출신이네요?”
진기오의 말에 박수현 작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캐럿이라면 대한민국이 다 아는 인기 아이돌이다.
“캐럿은 작년에 해체했고 이제 연기자로 전향했습니다.”
“그동안 찍은 작품이 꽤 되네요.”
최유진은 시작부터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웹드라마를 세 개 찍었고, 그중 하나는 주연이었어요.”
자신의 경력을 읊는 최유진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럼, 최유진 씨 연기 시작할게요. 우선 지정 연기를 먼저 합니다. 저희가 미리 대본 전달했을 텐데요. 그중에서 한 장면을 골라서 연기해 주세요. 조감독이 대사 맞춰 줄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최유진은 조감독이 아니라 눈앞에 설치된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조감독은 미리 나눠 준 대본에서 한 신을 선정해 대본을 읊기 시작했다.
조감독이 고른 신은 여우비의 주인공인 홍리아가 죽은 줄 알았던 남동생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우영민 조감독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누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동생 연기를 시작했다.
어설픈 조감독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최유진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오디션장에 울려 퍼졌다.
최유진은 사극 발성은 물론 기본적인 배우 발성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찌푸린 진기오 감독이 노트에 뭔가를 써서 박수현에게 보였다.
[숲 엔터]
박수현 작가는 최유진이 숲 엔터 신인이라는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박수현 작가는 진기오 감독의 노트 아래 답글을 적었다.
[최악. 숲 엔터 너무 싫어. 진지혜도 별론데 ㅠㅠ]
박수현 작가의 글을 본 진기오 감독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진지혜는 여우비의 서브 여주로, 숲 엔터의 끼워팔기를 통해 캐스팅된 인물이다.
최유진의 연기가 끝나자 진기오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JTV 관계자만 최유진을 향해 감탄사를 쥐어짜 냈다.
“최유진 씨가 카메라를 참 잘 받아. 그렇지 않나요?”
“아. 예.”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는 흙 씹은 얼굴로 JTV 관계자의 시선을 회피했다.
최유진은 자신의 오디션이 완벽했다고 생각했는지 자신감이 가득 찬 상태로 자리로 돌아왔다.
두 번째 배우는 조연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였으나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 주지 못했다.
두 배우의 오디션이 끝나고 드디어 서이렌의 차례가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이렌이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의 앞으로 다가왔다.
멀리서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주위에 아우라가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박수현 작가도 서이렌의 미모에 놀란 것인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진기오 감독은 그제야 이 배우가 원세강이 키운 배우임을 알아채고 노트에 뭔가를 써서 박수현 작가에게 보였다.
[34번. 이자현 키운 매니저가 새로 발굴한 신인 배우]
노트의 글귀를 본 박수현의 두 눈이 커졌다.
이자현이라면 박수현도 좋아하는 배우다.
진기오는 밖에서 원세강과 했던 말이 떠올라 서이렌에게 물었다.
“오늘 갑자기 오디션 보게 된 거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서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기오 감독은 그제야 서이렌의 프로필을 제대로 펼쳐 봤다.
사진도 없고 달랑 이름만 있는 성의 없는 프로필이었다.
박수현 작가도 서이렌의 프로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이자현을 키운 매니저가 데리고 온 신인이라지만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렇게 예쁘면 연기를 기대하기 힘든데. 경력도 한 줄도 없고. 예쁘기만 한 거 아냐?’
박수현 작가는 김이 팍 샜다는 표정으로 진기오 감독에게 말했다.
“뭐 하세요? 오디션 보셔야지요.”
“아. 예. 그럽시다.”
서이렌의 미모에 홀렸던 진기오 감독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이렌에게 물었다.
“연기 경험이 하나도 없네요.”
진기오 감독의 물음에 서이렌이 드디어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오디션장에 서이렌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의 두 눈이 커졌다.
JTV 관계자는 물론이고 뒤에 앉아 있던 배우들도 놀라 서이렌을 쳐다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던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는 서이렌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목소리가 아주 예쁘네요.”
박수현 작가의 칭찬에 서이렌이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박수현 작가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이렌의 미소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박수현 작가가 옆을 보니 진기오 감독도 입을 벌리고 서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수현 작가가 진기오 감독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뭐 해요. 뭐라도 물어봐요.”
“아. 예.”
진기오 감독이 떨리는 목소리로 서이렌에게 물었다.
“프로필에 정보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연극동아리 같은 활동은 해 본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연기 학원은요?”
“안 가 봤습니다.”
“연기를 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단 말인가요?”
“이 오디션 보려고 준비한 게 다입니다.”
“허.”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이 정도면 얼굴 하나 믿고 배우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닌가?
진기오 감독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대본은 언제 받으셨나요?”
“오늘 아침에 받았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지정 연기의 대본은 일주일 전에 오디션을 보는 배우들께 전달된 상태다.
그런데 서이렌은 오늘 오전에 처음 대본을 받아 봤단다.
“대본을 이제야 받았으니 다 숙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보면서 연기해도 되니까 마음 편하게 하세요.”
진기오 감독은 이미 서이렌은 안 될 거라며 마음을 접었다.
싸늘한 진기오 감독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서이렌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다 외웠습니다.”
오디션장에 모인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쳐다봤다.
아무리 토막 신이라지만 준비된 것만 다섯 개다.
그중에 하나를 랜덤하게 골라서 오디션을 보는 것이다.
‘오늘 오전에 처음 대본을 봤다는 초짜가 그걸 다 외웠을까?’란 물음표가 모두의 얼굴에 떠올랐다.
“기억력이 뛰어나신가 보네요. 잘 외우는 배우들이 있긴 하죠. 그런데 신인들이 놓치는 게 있습니다. 대사만 외우는 게 아니라 대사와 함께 있는 지문도 같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간혹가다가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 신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연기를 처음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멋모를 때야 그런 거지 이렇게 연기한 첫날부터 그러지는 않는다.
진기오 감독은 서이렌의 프로필을 조용히 덮으며 조감독에게 사인을 보냈다.
“자, 늦었으니 시작합시다.”
조감독이 대본을 들고 일어서자 갑자기 서이렌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바닥에 곱게 접어 내려놨다.
서이렌은 코트 안에 퓨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빈선예가 지수연을 위해 준비한 오디션 복장이었다.
흰색 저고리에 무릎길이의 잿빛 치마를 보자 박수현 작가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잠시만요.”
서이렌은 갑자기 손을 들더니 그녀의 긴 삼단 같은 머리를 땋기 시작했다.
서이렌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디션장에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이렌은 곱게 땋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을 바라봤다.
정식 분장은 아니었지만, 한복에 머리까지 곱게 땋자 사극 촬영장에서 본 듯한 모습이었다.
서이렌은 감독과 작가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멍하니 서이렌의 변신 장면을 지켜보던 조감독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놀라 말했다.
“아. 예.”
조감독은 아까 최유진이 연기했던 신을 꺼내 들었다.
조 감독의 어색한 연기가 시작됐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동생이 자신을 붙잡는 이상한 여자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다.
순간 서이렌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람을 빨아들이던, 당당하던 그녀의 눈빛에서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윤아. 나를 모르겠느냐?”
잃어버린 동생을 애타게 부르는 서이렌의 목소리가 오디션장에 울려 퍼졌다.
진기오 감독과 박수현 작가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서이렌을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완벽하게 대본 속의 홍리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