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화 (7/261)

#6화. 움직이는 마네킹

살다 보면 가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다.

마네킹은 천천히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매끄러운 도자기 같은 뺨에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의 첫사랑.

어머니의 양장점에 있던 마네킹.

그녀가 살아났다.

빈선예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밀치고 그녀 앞에 섰다.

“대표님. 이분은 누구예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그녀를 누구라고 설명해야 하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두 여자를 향해 눈만 끔벅거렸다.

빈선예는 내 마음도 모르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내가 지수연 입히려고 준비한 의상인데…….”

마네킹은 빈선예가 준비했던 퓨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빈선예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원 대표님 혹시 나 없는 사이에 길거리 캐스팅하셨어요?”

당황한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는데, 마네킹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빈선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미소 짓자 조명을 켠 듯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빈선예도 그녀의 아우라를 느꼈는지 뒷걸음질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대표님. 어디서 저런 사람을 데리고 온 거예요? 장난 아닌데요.”

빈선예는 그녀가 마네킹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건가?

저렇게 살아 숨 쉬는 인간을 보고 누가 마네킹이라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왜 내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있어요? 혹시 오늘 오디션을 저분이 보시나요?”

마네킹이 오디션을 본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때였다.

마네킹의 굳게 닫혀 있던 조그만 입술이 열렸다.

“제가 오디션을 볼 거예요.”

빈선예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마네킹은 놀란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다시 한번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우비 오디션. 제가 할 겁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좋아해야 하는 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리바리하고 있는 사이, 빈선예는 가방을 챙겨 들고 그녀와 함께 뛰었다.

“대표님.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와요. 시간 없다고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빈선예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혼란한 상태로 아무것도 못 하고 서 있던 나의 눈이 번쩍 떠졌다.

꿈이라면 알아서 깨겠지.

지금은 가야 한다.

마법같이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나는 황급히 재킷을 챙겨입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LOK 사무실에서 강진석 팀장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LOK 회의실로 향해 있었다.

투명한 유리로 된 회의실에서는 록 실장이 지수연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세강 된통 당했네. 그래도 같은 식구였던 사람인데 저렇게 짓밟고 싶을까?’

그때 대화를 마친 록 실장과 지수연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강진석은 사무실을 나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주변 동료들이 이번 일을 안줏거리 삼아 떠들기 시작했다.

“록 실장 뒤끝은 알아줘야 해. 원세강 따라간 지수연 꼬드긴 게 록 실장이라며?”

“지수연이 후회했다잖아. 이자현 후광 때문에 원세강 선택한 건데 막상 가 보니 LOK랑 비교됐겠지. 그나저나 신인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고 역시 빽이 무섭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KBC 지영록 딸이잖아. KBC 차기 드라마 국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인데. 빽이야 충분하지. 원 팀장만 똥 밟은 거지.”

“록 실장이 그러는 거 어디 한두 번인가? 우린 가자. 말 새어 나가서 좋을 거 없다.”

한참 동안 떠들던 동료들이 사라지자 강진석 팀장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 * *

강진석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뒷자리에 앉은 두 여자를 살폈다.

우리는 지금 스타탄생의 차량인 카니발을 이끌고 오디션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머리도 못 하고 화장도 할 수 없었기에 빈선예가 직접 마네킹을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와. 도화지가 따로 없네.”

빈선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선예 씨. 화장하지 말아 주세요.”

“그냥 쌩얼로 오디션 보라고요?”

“역할이 그런 역이에요. 너무 꾸미고 가도 좋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분 외모가 너무 튀는데요?”

빈선예의 말대로 그녀는 주변을 압도하는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빈선예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정신이 없어서 통성명도 못 했네요.”

빈선예가 이름을 묻자 그녀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빈선예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대표님이 예명 지어 주시기로 하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원세강 대표님이 제 이름을 아실 거예요.”

나는 운전을 하면서 힐끔 백미러를 확인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지금 이 모든 게 꿈은 아니겠지?

어쩌면 미래를 봤을 때부터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긴 꿈을 꾸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원 대표님. 예명이 뭐냐고요.”

빈선예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마침 신호등도 파란불로 바뀌었고 나는 액셀을 밟으며 입을 열었다.

“서이렌. 예명은 서이렌입니다.”

* * *

JTV 별관에 스타탄생 카니발이 도착했다.

“오늘 오디션을 지수연 이름으로 올려서 다른 사람이 대신 볼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럼, 프로필이 있어야 하잖아요.”

“여기 사진 없는 프로필은 있습니다. 가서 말로 풀어 볼게요.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나는 서이렌과 빈선예를 오디션 대기 장소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여우비는 아이돌 출신 배우 이진아와 멜로가 장기인 인기스타 김태섭이 주연을 맡은 퓨전 사극이다.

주연은 이미 캐스팅이 끝났고 오늘 오디션은 조연과 단역을 뽑기 위해 열리는 거다.

지수연이 맡을 역할은 조연을 따라다니는 노비 단오 역할이다.

조연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역이지만 그래서 대사 없이도 화면에 얼굴을 비추는 일이 많다.

그러다 비중 있는 조연이 하차하고 운 좋게도 그 분량을 몽땅 가져가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신인에게는 꿈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때 여우비를 제작하는 소울의 직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의 원세강입니다.”

“스타탄생이요?”

소울 직원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명함을 받았다.

“왜 그러시는데요? 오디션은 십 분 후에 시작됩니다.”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만, 사전에 프로필을 제출한 배우가 못 올 거 같아서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직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벌써 프로필이 안에 다 들어갔다고요. 감독님이랑 작가님이 벌써 보고 계실 텐데.”

소울 직원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제출한 프로필 말고 다른 사람으로 오늘 오디션을 보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아. 짜증 나네. 그럼, 프로필이나 줘 봐요.”

“제가 급하게 오느라 정식 프로필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진 한 장 없이 이름만 달랑 적힌 서이렌의 프로필을 직원에게 건넸다.

소울 직원은 프로필을 보고 실소를 흘렸다.

“지금 장난해요? 이딴 프로필로 당일에 찾아와서 오디션을 보게 해 달라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사정을 봐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소울 직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울 직원은 여전히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처음 들어 보는 회사다 했더니. 이래서 초짜들이랑 일을 못 하겠다니까.”

직원이 화내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나라도 어이가 없었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황금 같은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나는 뻔뻔해지기로 하고 다시 한번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정했다.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이봐요. 나 시간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이 바닥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요.”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진짜, 이 사람이 미쳤나?”

소울 직원과 내가 실랑이를 벌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그때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소울 직원은 그 사람을 보고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다름 아닌 소울의 이사이자 여우비의 감독인 진기오였다.

진기오가 나를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LOK 원세강 팀장님 아니세요?”

“진기오 감독님. 안녕하셨습니까?”

나와 진기오는 작품을 같이해 본 적은 없지만, 사석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사이다.

진기오가 나를 알아보자 소울의 말단 직원이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명함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저 LOK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자현도 이적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이 배우님은 아직 LOK 소속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다른 배우와 일하는 겁니까?”

“예. 신인을 키우고 있습니다.”

진기오는 톱스타 이자현을 버리고 신인을 키운다는 내 말에 놀란 듯 보였다.

진기오는 곧 당황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 말했다.

“원세강 팀장님. 아니지, 이제 대표님인가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원 대표님이 지금까지 키운 배우들 다 좋았습니다. 특히 몇 년 전에 은퇴한 윤조 양과도 언젠가는 꼭 같이 일해 보고 싶었습니다.”

윤조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엔 왜 오신 겁니까? 혹시 원 대표님이 키우는 신인이 오늘 오디션을 보는 겁니까?”

진기오의 말에 나는 다급하게 서이렌의 프로필을 건네며 말했다.

“문제가 생겨서 원래 프로필을 제출했던 배우가 못 오고 다른 배우가 왔습니다. 이게 그 배우의 프로필인데 오디션을 볼 수 있을까요?”

진기오는 프로필을 펼치지도 않은 채 내게 말했다.

“그럼요, 원 대표 안목은 제가 믿지요. 잘됐네요. 이번에 원 대표가 키운다는 배우 얼굴이나 한번 봅시다. 잘하면 여우비가 그 배우의 데뷔작이 될 수도 있겠네요.”

진기오는 웃으며 서이렌의 프로필을 소울의 말단 직원에게 건넸다.

소울 직원은 내가 진기오 감독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그는 공손하게 진기오 감독의 손에서 서이렌의 프로필을 가져갔다.

“그럼, 저는 이제 곧 오디션 시작이라서요. 가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독님. 오늘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오디션 기대할게요.”

진기오 감독이 사라지고 나는 소울 직원을 바라봤다.

소울 직원은 아까는 목에 깁스라도 한 듯 뻣뻣하게 굴었는데 지금은 눈빛까지 달라져 있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직원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까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바닥에서 십 년을 넘게 굴렀지만 이렇게 강약약강으로 구는 사람들이 오래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연예계는 지금 잘나간다고 해서 내일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이지만 내일은 전 국민이 아는 톱스타가 되는 게 이 바닥에선 일상이다.

나는 소울 직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 실수인걸요. 그럼, 제 배우 프로필을 잘 부탁합니다.”

* * *

오디션 번호표를 받은 내가 대기실로 돌아왔다.

이미 오디션이 시작돼서 대기실 안은 분주했다.

프로필을 가장 마지막에 제출했기에 서이렌은 오늘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보게 될 거다.

심사를 하는 사람들이 지칠 대로 지친 극악의 상황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떨고 있는 빈선예의 옆에 도도하게 앉아 있는 서이렌이 보였다.

나는 서이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렌 씨. 할 수 있겠어요?”

오디션 대본을 보던 서이렌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한없이 투명한 눈동자를 빛내면서 내게 말했다.

“자신이 없어요.”

“정말요?”

“오디션에 떨어질 자신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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