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라진 계약서
“원 대표님은 어디 갔어요?”
지수연이 빈선예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빈선예는 자신에게 물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돌려 지수연을 바라봤다.
지수연은 빤한 얼굴로 빈선예를 쳐다봤다.
‘이것 봐라. 원 대표님 있을 때랑 말투부터 다르네.’
빈선예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내 말 안 들려요?”
“들려.”
빈선예는 여전히 잡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뭐야? 짜증 나게.”
지수연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빈선예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이런 회사가 다 있어.”
지수연이 나가자 빈선예는 읽던 잡지를 탁자 위에 던졌다.
“지 이쁘게 입히려고 잡지 좀 보고 있었건만.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무슨 아수라 백작이야, 뭐야? 왜 내 앞에서만 저렇게 달라지는 건데? 웃기지도 않아.”
빈선예는 툴툴거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연결음이 울리더니 이내 원세강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선예 씨.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대표님. 언제 오시는 거예요?”
[지금 가고 있어요. 저녁에는 도착할 거 같아요.]
“알았어요. 빨리 와요.”
[제가 메일 보낸 거 보셨죠?]
“오디션 말씀하시는 거죠?”
[예. 메일에 적힌 대로 미리 준비 좀 해 주시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바쁜 일도 없잖아요.]
“알았으니까 빨리 오기나 해요.”
[예. 저. 그런데…….]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선예 씨 건물을 쓰는 건 아닌 거 같아서요.]
“뭔 소리예요? 이미 이야기 다 끝난 거잖아요. 내가 언제 꽁으로 빌려주나요? 임대료 받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시세보다 너무 적게 받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올라오기나 해요.”
[고마워요. 선예 씨.]
“어휴 또 그런다. 나 끊어요.”
전화를 끊은 빈선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빈선예는 탁자 위에 놓인 잡지를 뒤적거렸다.
원세강의 부탁으로 다음 주 오디션에 퓨전 한복을 입고 가기 위해 사 온 한복 잡지다.
“짜증 나서 안 보련다.”
* * *
저녁 여덟 시가 되자 빈선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쇼핑은 재미있어.”
빈선예는 사비를 털어 원세강이 앞으로 입고 다닐 옷을 쇼핑했다.
“이제 대표님이신데 깔끔하게 입고 다니셔야겠지.”
빈선예가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마침 도착한 내가 들어왔다.
“아직 있었어요? 먼저 들어가라고 했잖아요.”
“대표님. 그게 뭐예요?”
빈선예는 내가 들고 있는 마네킹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거 마네킹인데요. 지금 내 방이 없어서 잠시 여기에 둘까 하고 가져왔어요. 괜찮겠죠?”
나는 빈선예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를 이상한 취향의 변태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염려된 것이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빈선예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마네킹을 쳐다봤다.
“대표님. 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나는 불타 버린 백화점 이름을 떠올렸다.
당연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와. 진짜 관리 잘하셨다. 혹시 대표님 주위에 패션 업계에서 일하시던 분이 계세요?”
“어떻게 알았어요?”
“이거 진짜 유명한 마네킹이잖아요.”
“그래요?”
나는 마네킹과 빈선예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선예 뒤에 서 있는 목이 없는 일반 마네킹과 비교하면 내가 가져온 마네킹은 확실히 남달랐다.
하지만 그래 봤자 마네킹일 뿐이다.
“이거 이름이 세이렌이었나 그럴걸요?”
“마네킹이 이름까지 있어요?”
“명품 브랜드 칼리의 수석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마네킹이잖아요. 전 세계에 딱 열 개밖에 없는 명품이라고요. 몰랐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나도 다큐멘터리에서 본거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이게 우리나라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빈선예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도 마네킹에 관해 술술 말해 줬다.
삼십 년 전, 칼리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당시 전 세계 패션계를 이끌던 ‘장 루이’는 자신의 옷을 소화할 수 있는 모델을 찾지 못해 직접 마네킹을 만들었다고 했다.
장 루이가 만들었던 마네킹은 총 열 개고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만든 마네킹의 퀄리티가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그 마네킹을 보고 있으면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것처럼 빠져든다고 해서 사람들은 마네킹을 세이렌이라 불렀다고 한다.
빈선예는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해 보더니 놀라서 나에게 말했다.
“지금 전 세계에 완전하게 남아 있는 세이렌이 하나도 없다는데요?”
“열 개라면서요?”
“사고로 망가지거나 불타 없어졌대요.”
빈선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네킹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짭으로는 안 보이는데.”
빈선예는 마네킹의 길고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봐요. 이거 인모라고요. 누가 마네킹에 인모를 달아요. 이거 진짜 맞아요. 대표님. 이거 팔려고 가져온 거죠?”
“이걸 판다고요?”
“회사 설립비용 만들어서 오신다고 고향에 내려가신 거 아니었어요?”
“그랬죠.”
“이건 설립비용 아니에요?”
“설마요?”
나는 빈선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고작 마네킹을 팔아 봤자 얼마나 할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내가 이걸 왜 팔아?’라는 생각이 두 번째로 들었다.
빈선예는 핸드폰을 들어 기사 하나를 검색해서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가격이 이런데도요? 내가 보기엔 이거 진짜 같아요. 확인도 해 볼 겸 감정 한번 받아 봅시다.”
나는 눈앞의 기사를 보고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장 루이의 그녀, 세계에 하나뿐인 세이렌. 백만 달러에 낙찰.]
백만 달러?
순간 너무 놀라서 환율 계산이 되지 않았다.
고장 난 나를 보며 빈선예가 말했다.
“팔 하나가 없는 게 십억이 넘으면 완벽하게 보존된 이건 얼마야?”
“십억이라고요?”
“대충 따지면 그렇겠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마네킹을 바라봤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청주의 작은 양장점 구석에서 우리 어머니의 말벗이 돼 줬던 그녀의 신분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 이름 결정했어요.”
“뭔데요?”
“스타탄생입니다.”
나는 빈선예의 표정을 살폈다.
스타탄생은 칠십 년대 영화 제목이다.
최근에는 스타 이즈 본이라는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영화다.
“촌스러울까요?”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빈선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내 취향은 아닌데요. 원기획 이런 거보다는 낫네요.”
“나쁘지 않다는 거죠?”
“그럭저럭 봐줄 만해요. 스타탄생이라고 박힌 명함 주면 쪽팔리지 않을 수준이라고 하면 될까요?”
“알았어요. 빨리 명함 파 줄게요.”
내가 명함 이야기를 꺼내자 빈선예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대표님이 집이랑 고향 건물 팔아서 회사 만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다행히 저 마네킹 팔면 몇 년은 아무 소득 없어도 버티겠네요.”
“아.”
나는 한쪽 구석에 세워 둔 마네킹을 바라봤다.
팔 생각 없는데…….
“내 직함은 뭐예요? 사무 직원도 뽑아야 할 거고. 사무실은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이 건물 쓰면 되고요.”
“천천히 좀 해요. 뭐가 그리 급해요. 우선 오늘은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요. 오디션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아이고. 알았습니다, 대표님.”
나는 빈선예를 돌려보내고 문을 닫았다.
방금까지 쉴 새 없이 떠들다 간 수다쟁이 빈선예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 정신없네.”
나는 순간 마네킹이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마네킹은 은은한 조명 아래 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마네킹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세이렌이었구나.”
내 첫사랑의 이름을 이제 알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팔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남은 삼 년 동안 잘해 보자.”
나는 마네킹을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 * *
일주일 뒤, 업무를 보고 있던 내가 빈선예를 찾았다.
“빈 팀장님. 지수연 씨 계약서 못 봤어요? 분명 여기에 뒀었는데요.”
나는 서랍을 뒤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주에 지수연과 정식으로 계약하고 이 서랍에 고이 모셔 뒀는데 지금 보니 사라진 것이다.
“저도 모르죠. 계약서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니니까 거기 있겠죠.”
“이상하네요. 없습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빈 팀장님. 지금 지수연 배우님께 전화 좀 해 봐요. 내일이 오디션이라서 지금 피부 관리받고 있다고 했죠?”
잠시 후 빈선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대표님. 지수연 피부관리실에 안 왔다는데요?”
“그래요?”
나는 일어서서 책상 주위를 서성였다.
“대표님. 왜 그래요? 지수연 배우한테 무슨 일 생긴 걸까요?”
나는 빈선예의 말에 대꾸도 못 하고 어제저녁 지수연과 헤어질 때를 떠올렸다.
사무실에서 나가던 지수연은 내 인사를 본체만체하고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급한 일이 있었겠거니 생각했다.
내 예감이 틀린 거겠지.
하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의 지수연의 싸한 행동을 보면 뭔가 석연치 않았다.
“선예 씨. 나 지금 LOK에 좀 다녀올게요.”
“LOK에는 왜요?”
나는 빈선예를 그곳에 남겨 두고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LOK에 가 보니 강진석 팀장은 영화 때문에 지방 촬영장에 갔다고 했다.
나는 LOK에 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지난날 내 병실을 지켰던 경영지원팀 막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 팀장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아! 이제 원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막내야. 혹시 지수연이라고 LOK랑 계약하기로 했던 배우 기억나?”
[지수연이요? 당연히 알죠. 우리 회사 신인 배우잖아요.]
“신인 배우?”
[이번 주 월요일에 계약서 썼어요. 지난번에는 계약할 거같이 굴고는 결국 안 했는데 록 실장님이 맘을 돌렸대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지수연이 KBC 지영록 PD 딸이래요. 대박이죠?]
막내의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어. 저 팀장님이 부르셔서 전화 끊어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나중에 시간 되면 얼굴 한번 보자.”
[대표님도 대박 나세요. 파이팅.]
전화를 끊은 나는 지난 일주일간을 복기했다.
나는 지난주에 지수연과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지수연은 계약금을 나중에 받겠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때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그것부터 잘못된 거 같다.
대체 왜?
내가 본 미래는 대체 뭐였지?
록 실장은 또 뭘까?
* * *
여우비 오디션이 열리는 당일, 스타탄생 사무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어제오늘 한숨도 못 자고 지수연을 찾아다닌 결과 드디어 오늘 아침 아홉 시가 돼서야 그녀와 연락이 닿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계약 파기에 대한 서류가 사무실 팩스로 전송됐다는 게 맞을 거다.
처음부터 계약금은 없었기에 돌려줄 돈도 없었고, 계약서도 사라졌으니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구두계약이라도 계약이니 따지고 들 수 있었으나 지수연은 LOK 자문 변호사를 앞에 세우고 그 뒤에 숨었다.
빈선예는 지수연이 원래부터 싸했다며 화를 냈다.
지수연과 계약을 진행한 당사자인 나는 책임을 통감했다.
명백한 내 실수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고민한 나는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지수연을 빼앗긴 건 뼈아픈 일이지만 아쉽지는 않다.
처음부터 나와 진짜 인연이 있는 사람인지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여우비는 다르다.
여우비는 내 기억 속의 첫 작품이다.
지수연이 했던 배역은 단역이지만 조연이 불미스러운 일로 하차하고 그 덕을 톡톡히 보는 케이스다.
단역에서 조연급으로 비중이 올라간 것이다.
내가 본 미래에서 이 시기에 괜찮은 작품은 여우비 하나뿐이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에겐 배우가 없다.
한편, LOK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고 온 빈선예는 나를 대신해서 열을 내고 있다.
“LOK 앞 카페에서 지수연 봤어요. 진짜 무슨 그런 애가 다 있어? 나를 보고 뻔뻔하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지수연 정식으로 데뷔하기만 해 봐요. 내가 댓글 부대라도 고용해서 악플 남길 거야. 지수연 데리고 간 록 실장도 두고 봐요.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어?”
빈선예는 속이 타는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냈다.
생수를 들이켜던 빈선예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란 빈선예는 하마터면 공중에 물을 뿜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이 층 계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이 층에 누구 있어요?”
당황한 나는 고개를 들어 이 층 계단을 올려다봤다.
불이 꺼져 있어야 할 이 층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일렁이는 노란 불빛 사이로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천천히 다가와 이 층 계단의 벽면을 가득 채웠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이내 계단에 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치마 사이로 부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발목이 보였다.
난간을 짚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이는 팔이 보이고 드디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이 장면을 이전에도 한번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십여 년도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그날의 모든 것이 떠오른다.
“말도 안 돼. 대표님 저분은 대체 누구세요?”
빈선예는 들고 있던 생수병이 기울어져 바닥에 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를 응시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그녀가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어머니가 데려왔던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세이렌.
마네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