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내 인생의 마지막 배우
LOK 사무실은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듯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수군거렸다.
“원 팀장님 미친 거 아닐까요? 교통사고로 뇌를 다쳤다거나 그런 거 말이에요.”
“무슨 드라마 찍어?”
“제가 찍지는 않지만 매일 드라마 촬영 현장에 출근하는데요.”
그때 원세강과 같은 해에 LOK에 입사한 강진석 팀장이 입을 열었다.
“이자현 그렇게 되고 원 팀장 방황할까 봐 걱정했더니 결국 일을 쳤네. LOK 차기 수장 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예? 원 팀장이 그렇게 유능하다고요?”
매니저들은 강진석의 의견에 놀라 반문했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래. 원 팀장 능력 있어. 이자현 띄운 거 봐 봐. 작품 보는 눈은 또 얼마나 좋은데. 이자현이 망작 찍은 적 있어?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좋잖아.”
“그런 유능한 인재가 아직 팀장이라고요?”
“그건 원 팀장이 정치를 잘 못해서 그런 거고.”
“에이. 못 믿겠네요. 그리고 사람 좋다는 것도 글쎄올시다인데요? 이자현이 원 팀장이랑 못하겠다고 배신했잖아요.”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록 실장이 나왔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임원급 인사들이 함께였다.
“강 팀장. 유일 기획 다녀올 테니 원 팀장 자리 정리해 놔.”
록 실장이 다른 임원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사무실에서 나가자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록 실장님은 무슨 원 팀장이 사표 내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행동하네.”
“록 실장님이 원래 원 팀장 싫어했잖아. 그래서 그렇겠지. 대표님 돌아오시기 전에 확실히 처리하고 싶은 거 아닐까?”
“쳇. 자기 생각은 안 하나 봐. 회사에서 제일 인기 없는 게 록 실장인데.”
“조용히 해. 록 팀장이 스파이라도 심어 놨으면 어떻게 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네.”
직원들이 왈가왈부하는 걸 더는 듣기 싫었던 강진석이 일어서서 매니저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자, 그만들 나가. 일하자고.”
* * *
압구정동의 한 건물 앞에 빈선예의 외제 차가 멈춰 섰다.
이 층짜리 건물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았다.
“커피숍보다는 여기가 조용할 거 같아서요.”
“지금 영업을 안 하는 거 같은데 들어가도 될까요?”
“괜찮아요. 제 건물이에요. 편집숍 운영하려고 리모델링만 먼저 한 거예요. 들어가세요.”
“아. 그렇군요.”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지수연과 함께 빈선예의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보니 이미 멋들어지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지금 있는 게 커피 머신밖에 없네요.”
빈선예가 웃으며 커피잔을 건넸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머그잔을 내려놓자 사방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선예 씨. 김선우 좋아해서 LOK에 입사했었다고 했죠?”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김선우 버리고 나 따라온 거 후회 안 해요?”
빈선예는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선우 가까이에서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뭐가 아닌데요?”
“실물로 보니까 재수 없는 스타일이에요. 드라마랑은 너무 달라요.”
빈선예의 돌직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럼, 원래 회사를 그만두려고 한 거예요?”
“예. 그랬죠. 집에서는 가업을 이으라는데 그건 싫거든요.”
“그런데 왜 나를 따라온다고 한 겁니까?”
빈선예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이미 LOK를 그만두고 이렇게 멋진 편집숍까지 운영하려고 결정한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맘이 바뀌어요?”
“제가 원래 즉흥적인 성격이라서요.”
빈선예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빈선예의 이런 성격 때문에 LOK 내에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빈선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난 시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에요.”
“전 삼 년 안에 이자현 같은 톱스타를 만들 생각이에요.”
커피를 홀짝거리던 지수연이 내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원 팀장님 의외로 허세도 있으시네요.”
“자신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런데 원 팀장님 모아 놓은 돈은 있으세요?”
빈선예가 또 돌직구로 치고 들어왔다.
물론 지금은 가진 돈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앞으로 삼 년간 무슨 영화와 드라마가 성공할지 안다고 하면 믿을까?
“아파트 전세금 빼고, 고향에 내 명의로 된 건물을 팔면 회사를 운영할 비용은 될 겁니다.”
빈선예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할게요.”
“그렇게 쉽게 결정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선예 씨는 재미로 일해요?”
“그럼, 재미도 없는데 왜 일하는데요?”
재미가 없어도 먹고 살려면 일해야지.
월급날만 기다리며 사는 재미를 저 아가씨는 알까?
나는 지수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수연 씨는 이래도 우리 회사와 함께할 거예요?”
지수연은 겁을 먹었는지 아무 말도 못 했다.
“LOK 소속인데 우리 회사와 계약하면 이중 계약인 거 알죠?”
“아직 계약 안 했어요.”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수연은 뾰로통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꾸 아역 시나리오를 들이밀잖아요. 그래서 짜증 나서 계약한다고 말만 하고 미뤄 놨어요.”
신인이 저렇게 당돌하다.
아마도 아버지인 지 PD의 배경을 믿고 저러는 거겠지.
“왜 나와 함께하려는 거죠?”
“저도 재미…….”
“재미있을 거란 말은 하지 말아요. 재미만으로 바닥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지수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원 팀장님이 이자현 키우셨다면서요. 저도 이자현처럼 되고 싶어요.”
“동종 업계 선배님입니다. 예의를 갖춰 부르세요.”
내가 뭐라고 하자 지수연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보시다시피 난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만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와 계약하고 싶어요?”
“저는 하고 싶어요.”
지수연이 절실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원래 지수연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내가 본 미래의 지수연은 스스로 반짝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만들어진 스타.
내 인생의 마지막 배우는 완벽해야 한다.
그런데 미래와 다른 길을 택한 나에게 지수연이 제 발로 찾아왔다.
그녀가 내 인생의 마지막의 배우인 걸까?
우리는 운명일까?
* * *
차를 렌트해서 청주 본가로 가고 있다.
렌터카 업체는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나를 보고 걱정했지만 내가 문제없다고 설명하자 걱정하면서 차를 내줬다.
청주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 주신 작은 건물이 있다.
삼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처분하지 않고 남겨 뒀던 양장점이다.
하지만 이제 내 꿈을 위해 팔아야 한다.
빗장을 걷어 내자 지난 삼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양장점 문이 열렸다.
날리는 먼지 사이로 예전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양장점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생활 전선에 뛰어드셔야 하셨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셨던 어머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이곳 청주에 양장점을 여셨다.
서울에서 청주로 내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께 남긴 이 층짜리 작은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 층에 양장점을 열고 우리는 이 층에서 함께 살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머니는 꽤 능력자셨다.
내가 어머니와 찍은 과거의 사진을 보여 주면 모두 놀라곤 했다.
사진 속의 나와 어머니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마치 방금 찍은 사진 같았다.
어머니의 감각은 남달랐고 취향은 고급스러우셨다.
어머니의 솜씨가 소문이 나서 옆 동네 아주머니들도 우리 양장점을 찾아오곤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이 층 가정집이 아니라 일 층 양장점에 가져다 두셨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옷을 만들며 텔레비전을 보시느라 그렇게 됐다.
쑥스러움을 많이 탔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할 때마다 일 층에 내려와 놀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둘러싸여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창피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덧 나도 그들과 섞여 수다도 떨고 그랬다.
아직도 양장점에 그때의 그 텔레비전이 남아 있다.
지금도 전원을 켜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여배우 진설의 영화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나는 소파 위의 천을 치우고 그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학교가 끝나면 이곳으로 달려와서 텔레비전을 보며 놀았다.
공부만 하던 소심한 내가 연예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대단해 보였고 그걸 동경하기도 했다.
옛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엄마.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어머니께서 앉아 일하시던 재봉틀 의자를 보자 나도 모르게 하소연하고 싶어졌다.
“엄마, 나 이제 죽는대. 삼 년 남았어. 말도 안 되지?”
아무도 없는 양장점에 떨리는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이렇게 죽게 생겼는데 이자현이 날 배신하고 도망갔어. 엄마도 알지? 그때 내가 한참 키우던 배우 있잖아.”
이 순간에도 이자현이 떠오르다니 미련이 깊구나.
나는 지금 이게 뭐 하는가 싶어서 일어서려다 말고 조용히 읊조렸다.
“꼭 나만의 배우를 찾을 거야.”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만월의 밤.
달빛이 조용히 내려와 작은 양장점을 비추고 있다.
순간 내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어딘가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내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
내가 마음껏 사랑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
온갖 루머가 판치는 이 바닥에서 오로지 내 말만 믿고 따라와 줄 사람.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완벽한 배우.
나만의 배우를 찾게 해 줘.
* * *
사흘 뒤, 건물을 처분한 나는 짐을 정리하기 위해 양장점에 다시 들렸다.
어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양장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LOK의 강진석 팀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님. 접니다.”
[야. 원세강.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갔으면 네가 먼저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냐?]
“죄송해요, 형님. LOK 분위기는 어때요?”
[짜증 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아. 사람들이 아주 못됐어. 십 년이나 같이 일했던 동료가 사표를 냈는데도 아무 일도 없어.]
“형님은 안타까워해 주시잖아요.”
[원 팀장이 그동안 LOK 내에서 적을 많이 만들어서 그래. 다 이자현 케어해 주느라 그런 거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아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지금 한창 일하실 때잖아요.”
[아. 내 정신 봐라. 다른 게 아니라 퓨전 사극 오디션이 하나 떴는데 볼래? 네가 지수연 채 갔다면서? 록 실장이 그것 때문에 벼르고 있어. 암튼 지수연이 할 만한 작품인데 어때?]
퓨전 사극?
순간 내 머릿속에 지수연의 첫 번째 작품이 떠올랐다.
“제목이 뭐예요? 언제 오디션 하는데요?”
[제목은 여우비고 박수현 작가 거야.]
왔구나.
드디어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시작됐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강진석에게 물었다.
“오디션이 언제예요?”
[다음 주야. 내가 오디션 정보 받은 거 네 개인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 봐.]
“고마워요. 형님.”
[알면 술이나 한잔 사. 너 없으니까 술친구 할 사람이 없어서 죽겠다.]
“그럴게요. 형님.”
나는 전화를 끊고 달력을 확인했다.
다음 주다.
내가 본 미래가 맞는다면 지수연은 여우비 오디션에서 합격한다.
일주일이면 준비할 시간이 짧다.
나는 급하게 양장점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양장점을 치우고 있는데 구석에 세워진 흰 천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흰 천을 벗겨 냈다.
벗겨진 천 사이로 아름다운 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네킹.
내 첫사랑이 바로 이 마네킹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우습지만 사실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의 비밀이다.
어머니가 양장점에 이 마네킹을 들고 들어오셨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전의 백화점에서 큰불이 났고, 그 안에 있던 값비싼 옷들이 다 타 버렸다고 했다.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백화점 폐업 처리 행사에 몰려가셨고 어머니는 그곳에서 이 마네킹을 사 오셨다.
명품 판매장에 서 있던 고급 마네킹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제 마네킹이 생겼으니 더 예쁜 옷을 만들 수 있다고 좋아하셨다.
나는 천을 다시 덮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내 첫사랑을 쓰레기장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는 마네킹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