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3화 (4/261)
  • #3화. 홀로서기

    지수연이라고?

    교통사고를 당한 뒤,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을 때 나는 긴 꿈을 꿨다.

    이자현이 나를 떠나고 지수연이라는 신인 배우를 맡아 톱스타로 키우는 꿈이었다.

    꿈은 보통 잊히기 마련인데 그 꿈만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지수연의 앞으로의 필모를 말해 보라고 하면 당장에 줄줄 읊을 정도로 모든 기억이 선명했다.

    내가 지수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록 팀장 말했다.

    “원 팀장이 보자마자 꽂혔나 보네. 수연아, 이래 봬도 원 팀장이 신인 키우는 데는 알아주는 사람이야. 내가 말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자현을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톱스타로 만든 게 다 원 팀장 덕이라고.”

    “알아요. 몇 번이나 말씀하셨잖아요.”

    지수연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록 실장을 흘겨봤다.

    “어때? 수연이가 톡톡 튀는 매력이 있지? 작년에 내일의 기억이라는 드라마에서 진지혜 아역으로 데뷔했어. 나이는 스무 살. 어릴 때 아이돌 연습생이었다는데 그것까진 알 것 없고.”

    아역으로 데뷔했다는 것까지 내 기억 속의 지수연과 일치했다.

    내가 본 미래가 맞는 걸까?

    나는 록 실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KBC 지영록 PD와는 무슨 관계죠?”

    내가 묻자 록 실장의 동공이 커졌다.

    지수연도 깜짝 놀랐는지 딴짓을 하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원 팀장 어떻게 알았어? 수연이 지 PD 딸인 거 이미 알고 있었어?”

    역시 그렇구나.

    내가 꾼 꿈은 진짜 미래였다.

    록 실장은 지수연을 잠시 내보내고 나와 마주 앉았다.

    “내가 지 PD랑 친해서 연예인 하려고 알아보는 지수연 설득한 거야. LOK에서 키우는 차세대 스타니까 원 팀장이 맡아 줘.”

    “LOK가 키우는 차세대 스타를 왜 저 같은 사람한테 맡기시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원 팀장이 이자현도 스타로 만들었잖아.”

    “이 배우는 이미 저를 떠났습니다.”

    록 실장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 팀장이 그 일로 마음이 많이 상했나 보네. 안 하던 투정도 다 부릴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이자현 매니저는 이제 재미없지 않아? 사실 매니저 일은 아무것도 없는 신인을 라이징 거쳐서 톱스타로 키우는 게 제일 재미있잖아.”

    내 앞에서 뻔뻔하게 웃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록 실장은 내 굳은 얼굴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한 달 휴가 줄 테니까. 천천히 쉬고 복귀해. 돌아오면 지수연이랑 같이 일할 거야.”

    록 실장과 지수연이 돌아간 뒤, 나는 병실에 홀로 남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에는 불운한 내 인생을 원망했었는데 지수연을 만나자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삼 년간의 미래를 봤다.

    내 남은 삶이 삼 년이니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내가 본 미래는 뭐였을까?

    더럽게 운 없는 내게 하늘이 마지막으로 주는 행운인 걸까?

    아니면 그저 나에게 이런 미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약 올리는 걸까?

    내가 이 몸으로 다시 매니저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화장실로 이동했다.

    화장실 불을 켜자 거울이 보였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찬찬히 뜯어 봤다.

    지금은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것 말고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내 두 손을 내려다봤다.

    내 손안에 삼 년간의 보장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없던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다.

    내 손으로 다시 한번 스타를 키워 내고 싶다.

    불완전한 스타가 아닌 완전무결한 스타를 만들고 싶다.

    * * *

    청담동에 있는 LOK 건물 앞에 서자 기분이 남달랐다.

    이자현이 톱스타로 뜬 사이, LOK도 업계 톱 쓰리로 성장해서 이제 이 청담동에만 건물을 두 채나 보유하고 있다.

    내가 지팡이를 짚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빈선예 스타일리스트가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달려와 인사했다.

    “원 팀장님. 오셨네요.”

    “선예 씨.”

    빈선예는 석 달 전 채용된 스타일리스트다.

    “의외로 지팡이가 잘 어울리네요. 병약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평생 가지고 다니면 좋을 텐데 한 달밖에 못 가지고 다니네요.”

    “원 팀장님이 웬일로 농담도 다 하세요?”

    “왜요? 제가 딱딱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까?”

    “예. 팀장님 재미없는 상사잖아요.”

    빈선예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그런 빈선예의 돌직구가 마음에 든다.

    퇴원을 축하해 주러 온 동료들은 나와 빈선예의 대화를 듣고 놀란 듯 보였다.

    ‘이자현을 빼앗기고 대표 자리도 물 건너갔는데 왜 저렇게 표정이 좋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선예와 수다를 떠는데 멀리 록 실장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록 실장은 내가 이렇게 일찍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급 휴가를 한 달 줬는데 왜 벌써 나왔어?”

    나는 록 실장과 함께 회의실에서 나온 다른 임원들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모두 내 시선을 피한 채 바쁜 척을 했다.

    아마도 록 실장이 나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았나 보다.

    나는 록 실장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한성제 대표님은 안 계시나요?”

    “대표님은 김선우 일본 팬 미팅에 따라가셨어. 팬 미팅 끝나고 김선우랑 베트남 여행 가실 거야.”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한성제 대표는 나를 피해 김선우의 팬 미팅까지 따라갔다.

    끝까지 치졸한 사람들이구나.

    사표를 내기 위해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고작 삼 년밖에 남지 않은 내 삶에 더는 기다림이란 없다.

    나는 록 팀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야?”

    “사직서입니다. 한성제 대표님께는 돌아오시면 따로 찾아뵙고 인사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톱스타 매니저 하다가 다시 신인을 맡으려니 짜증이 나겠지. 다 이해해. 원 팀장 결정을 굳이 말리진 않을게.”

    록 실장이 내 사직서를 경영지원팀 윤 팀장에게 건네며 말했다.

    “한성제 대표님 돌아오시기 전에 처리해.”

    자그마치 십 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식구인데 록 실장은 나를 붙잡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사직서가 처리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록 실장은 주위를 돌아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라고. 본인이 나가겠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분명히 다른 회사로 이직 결정하고 찾아온 걸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병실로 지수연을 데리고 온 건 록 실장의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

    좌천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이직할 거라 생각했을 거다.

    빈선예는 더는 못 참겠는지 록 실장에게 한마디 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나는 빈선예의 팔을 잡아 뒤로 당기고 록 팀장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록 실장님. 뭔가 오해하신 모양인데요. 저는 이직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직이 아니야?”

    나는 록 실장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매니저 그만두고 제 회사를 차릴 겁니다.”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록 실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주변에서 구경 중인 동료들을 바라봤다.

    내가 이직할 거라고 생각했지, 회사를 차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고심하며 내린 결정은 이거다.

    나는 예정된 내 미래를 버릴 거다.

    지수연도 내 배우가 아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내 배우를 찾아내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할 거다.

    나는 록 실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컴퓨터 공학과 나온 거 다들 아시죠?”

    내 말을 들은 동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원 팀장이 대학도 나왔어?”

    “모르셨어요? 무려 한국대잖아요.”

    “미친 거 아냐? 한국대 출신이 왜 매니저를 하고 있는데?”

    “졸업은 못 했을걸요. 단기 아르바이트로 로드 뛰러 왔다가 그냥 주저앉았다던데요.”

    사람들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나는 모른 척하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컴퓨터는 감정이 없는 고철 덩어리지만 제가 원하는 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해 줍니다. 하지만 엔터 산업은 다릅니다.

    지난 십 년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배우가 잘생기고 연기만 잘한다고 해서 스타가 되지 않더군요. 흥행할 대본을 보는 안목도 있고 운도 따라 줘야 합니다. 실패하고 구르다 보면 성공이 찾아올 것 같지만 한번 대중의 눈에서 멀어진 스타는 신인보다 뜨기 어렵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본론만 말해.”

    잠자코 듣고 있던 록 실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나는 록 팀장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나와 함께합시다. 실패는 없다고 장담은 못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같은 곳을 바라보겠습니다. 같은 꿈을 꾸겠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면 내가 앞으로 삼 년간의 보장된 흥행작을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안다는 것만큼 강력한 치트키는 없다.

    나는 굳이 이 말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아무도 안 따라올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제 회사의 규칙은 하납니다. 배우를 배우로 대해 주고, 스태프를 스태프로 대할 겁니다. 인기가 없다고 버리지 않고, 스태프를 부품으로 소모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다시 한번 동료들을 돌아봤다.

    지난 십 년간 내가 어떻게 구르고 깨지며 이 바닥에서 버텨 왔는지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하나씩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와 함께하실 분이 있으신가요?”

    동료들이 하나둘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나와 오랜 시간 일한 동료들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록 실장은 나를 비웃으며 주위의 사람들과 귓속말을 했다.

    내게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뭐, 어쩔 수 없네요. 저 혼자 갈 수밖에요.”

    나는 말을 마치고 한쪽에 세워 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탁. 탁.’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걷기 시작하자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내가 사무실 문 앞에 섰을 때 누군가의 손이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놀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스타일리스트 빈선예였다.

    * *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빈선예에게 말했다.

    “걱정 마요.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망해도 상관없어요. 원 팀장님과 같이 일하고 싶어요.”

    빈선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빈선예가 먼저 밖으로 뛰어나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천천히 오세요.”

    “나 그렇게까지 챙겨 주지 않아도 돼요. 여기 올 때도 택시 타고 왔습니다.”

    “차 안 가져오셨어요?”

    “차 없습니다.”

    나는 원래도 차가 없다.

    회사 차를 타고 다니면 되기 때문에 굳이 차를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빈선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차도 없는 주제에 회사를 차리겠다고 사직서를 내던진 나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는 걸까?

    그녀는 금세 표정을 풀고 말했다.

    “제 차 가지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세요.”

    내가 본 미래에서 빈선예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스타일리스트 빈선예가 아닌 다른 빈선예를 나는 알고 있다.

    그때 한 마리 표범같이 생긴 외제 차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내가 알기론 저 차 한 대 가격만 해도 이억이 넘어간다.

    “타세요. 지팡이는 트렁크에 넣을 테니 주시고요.”

    “그러죠.”

    나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빈선예에게 지팡이를 넘겼다.

    “원 팀장님은 제 차를 보고도 안 놀라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놀라던데요.”

    “저도 놀랐습니다. 차 멋지네요.”

    내가 본 미래에서 빈선예는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갤러리스 백화점의 사장이었다.

    지수연이 백화점 모델로 계약하면서 그녀와 재회했다.

    백화점 상속녀가 왜 스타일리스트를 했냐는 내 질문에 빈선예는 말없이 웃었더랬다.

    “대학 졸업 선물로 받은 거예요. 내 차긴 한데 내 돈 주고 산 건 아니죠.”

    그때였다. 지하 주차장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뛰어나왔다.

    “저도 같이 가요.”

    여자 목소리에 놀란 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중심을 잃고 휘청하자 빈선예가 나를 잡아 줬다.

    나는 내게 걸어오는 그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지수연이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저도 원 팀장님을 따라가도 될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