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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의 매니저-2화 (3/261)
  • #2화. 한순간의 꿈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누군가에게는 이 모습에 가슴이 철렁해서 숨도 쉬지 못할 테지만 나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잠시 커진 동공으로 나를 응시한 이자현은 놀라서 달려드는 한지욱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이 배우. 지금 원 팀장 표정이 안 좋으니까 내가 잘 타일러서 보낼게.”

    “내가 방금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이자현이 매서운 눈빛으로 한지욱을 노려봤다.

    사장이라지만 TOP은 이자현을 위한 회사다.

    한지욱은 이자현의 말에 주눅이 들어 뒤로 물러났다.

    “원 팀장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비키세요.”

    깨어난 후로 모든 것이 개 같았는데 한지욱의 굳은 표정을 보니 그나마 살 것 같다.

    한지욱을 밀치고 이자현이 내게 걸어왔다.

    로비에 있던 관계자들이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자현은 내게 눈짓했다.

    ‘따라와요.’

    * * *

    TOP 엔터 건물의 최상층에 마련된 접대실로 들어왔다.

    특급 관계자들만 모시는 곳이라서 그런지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고 멀리 한강이 내다보였다.

    하지만 저런 그림 같은 풍광이 지금 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때 이자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왜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겠어요. 그날 사고가 안 났다면 이적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겠죠.”

    냉담한 이자현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언제부터 안 겁니까? 오늘 기사가 뜬 걸 보면 꽤 오래 준비했을 텐데요.”

    “12월 31일에 한성제 사장님께 처음 들었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자현 배우님은 미리 알고 있었죠?”

    나는 이자현의 눈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그녀가 천상 연기자라서 그런 걸까?

    이자현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상황에서도 존댓말을 하시네요. 배우님이라는 호칭까지 말이에요. 끝까지 내게 벽을 둬야겠어요?”

    나는 내 두 번째 배우 윤조가 떠난 이후로 말투부터 바꿨다.

    일로 만난 사람과는 오로지 존댓말과 제대로 된 호칭을 사용할 것.

    내가 세운 철칙이었다.

    “배우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합니까? 교통사고 때문에 누워 있다가 일주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내가 십 년을 몸 바쳐서 일한 회사에서는 나 몰래 내 배우를 빼돌려서 회사를 차렸어요.”

    평정심을 유지하던 이자현의 눈썹이 뒤틀렸다.

    “내가 떠난 게 원 팀장님께 타격이 갔나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쩌렁쩌렁한 내 목소리가 접대실에 울려 퍼졌다.

    이자현은 놀랐으나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은 진짜예요. 12월 31일에 한 대표님이 저를 직접 찾아오셨어요.”

    “언제요?”

    “집에서 연기대상 시상식 대기 중일 때요.”

    “그럼, 정말로 그때 결정된 거란 말입니까?”

    “한 대표님이 부탁하시더군요. Y&C 엔터를 TOP이라고 사명을 바꾸고 대표 자리에 한지욱을 올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TOP의 첫 번째 배우는 반드시 나여야 한다고요.”

    “자현 배우님은 그걸 허락하셨고요. 내가 Y&C의 대표로 갈 거란 걸 아셨잖아요.”

    “보고 싶지 않았어요.”

    “예?”

    “원 팀장님과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며 일하고 싶지 않아요.”

    이자현의 말에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걸까?

    이자현이 나를 이렇게나 미워한다고?

    그녀는 뒤이어 내 가슴에 비수가 되는 말을 이어 내뱉었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말에 계약이 만료되겠죠. 난 어차피 LOK를 떠났을 거예요.”

    차가운 그녀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왜?”

    “난 배우로 살고 싶으니까.”

    “나와 함께는 배우가 아니었나?”

    흥분한 나는 어느새 이자현과 반말로 대화하고 있었다.

    “남이 골라 준 작품만 찍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내 심장이 반응하는 내 작품을 만들 거야.”

    “지금 ‘사막’ 못 하게 했다고 그러는 거야?”

    사막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자현은 당시 국제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고 주가가 올라 있는 김기하 감독의 사막에 캐스팅되었다.

    영화는 청춘의 목마름을 잘 그린 수작이었다.

    대본만 봐도 잘만 찍으면 명작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자현의 출연을 극렬히 반대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막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베드신이 많았다.

    청춘을 그리는데 왜 그렇게 많은 베드신이 필요한지 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영화판에 공공연하게 퍼진 김기하 감독의 소문 때문에 그 영화의 출연을 막은 것이다.

    “내게 공포심을 심어 줬잖아. 저런 거 잘못 찍으면 낙인찍힌다. 절대 찍으면 안 된다고.”

    내 말은 사실이다.

    대배우들도 고심해서 찍는 것이 베드신이다.

    고작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인 배우라면 더욱 심사숙고해야 한다.

    문제는 사막이란 영화의 결과물이었다.

    “김이솔이 그 영화 찍고 어떻게 된 줄 알아? 영화제에서 받은 상만 수십 개야.”

    이자현은 이를 악물고 나를 몰아붙였다.

    김이솔은 이자현과 데뷔 연도가 같아 그녀와 함께 라이벌로 묶이던 배우다.

    그녀는 사막을 찍고 날개를 달고 먼저 영화계에 안착했다.

    하지만 이자현은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하고 싶을 것이다.

    자현이 사막을 찍었다면 그 정도 반향이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

    김이솔은 한국예술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 중의 천재다.

    어설픈 연기를 보여 주던 신인 시절의 이자현과는 비교 불가다.

    이자현은 사막 이후로 달라졌다.

    내가 권유해서 찍은 작품이 모두 잘되었으나 자신은 인형일 뿐이었다며 자책했다.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우리 사이는 어느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이자현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요, 배우님. 다시는 찾아오는 일 따윈 없을 겁니다.”

    나는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돌아왔다.

    활화산처럼 날뛰던 피가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뚝. 절뚝.

    내가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자 이자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시네요. 우리 문제가 사막 하나 때문일까요?”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통창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이자현이 서 있다.

    이자현의 눈빛에는 나를 원망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미 다 끝났는데 뭐가 문제인지 찾아서 뭘 할까요.”

    “매번 그렇게 도망가시는군요.”

    “네 말대로 이대로 계속 배우와 매니저로서 함께 가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나 봐. 그냥 그렇게 생각할게. 너에 대한 원망은 없으니까 안심해.”

    이자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초조할 때마다 하는 버릇이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욱 빨개졌다.

    이자현은 뭐라 더 말하고 싶었는지 주저했으나 이내 입을 닫았다.

    나는 이자현이 끝내 내뱉지 못한 말을 대신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행복해.”

    * * *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나는 이자현과 대화를 나눈 뒤, 씁쓸히 TOP 엔터 밖으로 나왔다.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막내를 보자마자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다시 병원으로 실려 왔다.

    나는 배신당했고 지금 이렇게 병실에 누워 있다.

    어이가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긴 한숨을 쉬고 있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담당의와 간호사가 들어와서 내 침상 옆에 섰다.

    “원세강 씨.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간호하시던 분께 여쭤보니 가족이 없다고 하시던데요.”

    “그렇습니다.”

    “혹시 가족과 같은 절친한 분은 안 계십니까?”

    의사의 질문에 나는 순간 바보같이 이자현을 떠올렸다.

    “없습니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담당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이런 건 보호자가 함께 있을 때 이야기하는 게 맞는데.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 말씀해 주세요. 저 쉬고 싶습니다.”

    담당의는 침상 옆에 의자에 앉더니 내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나도 사람인지라 불안해졌다.

    담당의가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 눈앞에 보여 줬다.

    PC에는 흉부 CT 사진이 보였는데 온통 새카만 배경에 뭐가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원세강 씨 심장 CT입니다.”

    “혹시 교통사고로 문제가 생겼나요?”

    “사고로 난 상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른쪽 다리도 한 달 정도 목발을 짚고 다니시면 될 겁니다. 문제는 심장입니다.”

    “제 심장이 왜요?”

    나는 그제야 몸을 앞으로 당기고 의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의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거면 내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담당의는 CT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장 섬유화 증세가 보입니다. 어제 병원에 실려 오셨을 때 재검사를 했는데 확실합니다.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수술을 해야 합니까?”

    “심장 섬유화는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병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딱히 치료법이 없습니다.”

    지금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치료법이 없다니요. 그럼, 불치병이란 말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순간 온 세상이 멈춘 것같이 느껴졌다.

    내 사고도 함께 멈춘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담당의는 뭐라 뭐라 내 병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용어들을 들으며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저 죽는 겁니까? 치료도 못 해 보고요?”

    “섬유화 진행을 늦추도록 약을 드실 예정입니다.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진행을 최대한 늦출 수는 있습니다.”

    “그럼, 당장 죽지는 않는다는 거죠?”

    “외국의 사례를 보면 십 년까지 생명을 유지한 예도 있습니다.”

    “십 년이라고요?”

    내가 엔터 업계에 몸담은 지 십 년째다.

    십 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짧은데, 십 년이라니.

    그때 의사가 더욱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원세강 씨의 심장 상태로 보면 약을 먹고 최대한 진행을 늦춰도 삼 년이 맥시멈일 겁니다.”

    “지금 저한테 삼 년 후에 죽는다고 하시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지금 심장의 상태로 보면 이미 진행이 많이 돼서 삼 년이 한계일 듯싶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오진일 확률은 없나요?”

    “없습니다. 교통사고로 실려 왔을 때와 어제, 두 번이나 꼼꼼하게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래도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실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말도 안 된다.

    내 생이 삼 년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는 눈과 귀와 입을 굳게 닫았다.

    의사가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 * *

    내 삶이 삼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내일 병원에서 퇴원한다.

    병원에서도 딱히 치료법이 없어서 내게 해 줄 게 없단다.

    대신 매일매일 챙겨 먹어야 할 약을 한 봉지 받았다.

    앞으로도 잊어버리지 않고 하루에 세 알씩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큰 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겪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지금 나는 아마 분노 단계에 있는 것 같다.

    온종일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고 세상이 망해 버렸으면 했다.

    이자현도 싫고, LOK도 싫었다.

    그때 병실 문 열리고 보기 싫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록 실장.

    평소 나를 싫어하던 사람이 문병이라니.

    내 병문안 따위는 올 리 없는 그가 왜 찾아왔을까?

    내 의문은 곧 풀렸다.

    그는 신인 배우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앞으로 내가 이자현 대신 맡을 신인 배우란다.

    LOK를 이끌던 톱 여배우 이자현의 매니저에서 다시 신인을 맡는 매니저로 강등된 것이다.

    지금 회사에서 나가라고 등 떠미는 건가?

    나는 록 실장과 함께 온 배우를 쳐다봤다.

    첫 만남인데 검은색 선글라스로 얼굴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

    신인인데 벌써 스타병인가?

    그때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내게 얼굴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원 팀장님. 저는 지수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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