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화 (2/261)

#1화. 내가 본 미래

12월 31일.

LOK 엔터테인먼트는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연말이라 바쁜 것도 있지만 오늘의 이 소란은 LOK의 여신이라 불리는 이자현 때문이다.

“원세강 팀장. 지금 방송국으로 가나? 어디로 가? KBC? 아니면 MBS?”

사무실을 나가던 나를 붙잡은 사람은 LOK의 터줏대감이라 불리는 김경록 실장이다.

그는 평소에 LOK에 뼈를 묻을 거라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는 인물로 모두가 그를 이름이 아닌 록 실장이라 불렀다.

“록 실장님. 연말인데 출근하셨네요.”

“왜 말을 돌려. 어디로 갈 거냐고?”

“록 실장님은 제가 어디로 갈 거 같으세요?”

“KBC로 가는 거 아닌가?”

“방송으로 직접 확인하세요. 미리 알면 김새잖아요.”

내가 대답을 회피하자 록 실장의 눈에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걔도 진짜 대단하네. 일 년 동안 다른 방송국에서 역대급 작품을 두 편이나 뽑아내다니 말이야.”

나는 내 배우를 저렇게 함부로 부르는 사람을 싫어한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록 실장은 뻘쭘해졌는지 시선을 피했다.

이자현은 내가 신인 때부터 키운 배우다.

그녀는 올해 상반기에는 KBC 방송국에서 대박이 났고, 하반기에는 MBS 드라마로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이자현이 오늘 어느 시상식에 참석하냐고?

우선 두 방송국 모두 자현이가 대상이라고 넌지시 알려 왔다.

자현이가 자기들 방송국 연기대상에 참석해야 하니까 미리 알려 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현이는 둘 다 참석한다.

자현이는 지금 집에서 방송국 카메라와 대기 중이다.

이원 생중계로 두 방송국의 연기대상에 모두 출연할 예정이다.

“록 실장님. 저는 이만 바빠서 가 봐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봬요.”

“끝까지 안 알려 주시고 가네.”

록 실장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날린 나는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나는 지금 MBS 방송국으로 가고 있다.

MBS 연기대상에는 내가 가고, KBC는 LOK의 한성제 대표가 참석한다.

일 년 중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도로에는 일찍 일을 마친 사람들의 차로 가득 차 있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 표시를 보니 이자현과 함께 있는 스태프 현미의 전화였다.

“예. 현미 씨. ”

“자현 배우님이 팀장님 MBS에 도착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셔서요.”

“곧 도착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도착하시면 꼭 전화해 주세요. 오늘 자현 언니 심기가 불편해요.”

“알았어요. 현미 씨가 잘 지켜봐 주세요.”

전화를 끊은 나는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십 분 후면 MBS 방송국에 도착한다.

나는 왜 이자현의 심기가 불편한지 알고 있다.

자현이는 MBS에 직접 가서 대상을 받고 싶어 했다.

그녀는 MBS에서 한 드라마가 훨씬 작품성 뛰어났고, 자신의 연기도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결정으로 두 방송국 모두에서 이원 생중계로 대상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자현이의 심기가 불편한 것이다.

이제 톱에 오르고 입지를 굳건히 다질 시간인데 굳이 방송국과 척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텀을 두고 작품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하반기에 한 MBS 드라마는 자현이가 나 몰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와서 어쩔 수 없이 찍은 작품이다.

이제 내 말은 듣지 않으려고 하니 큰일이다.

자현이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오 년 전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내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따랐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이는 예전 같지 않다.

그때 다시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자현 배우님]이라는 표시를 확인한 나는 목을 풀고 핸드폰 통화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 내 귀를 찢어발길 듯 큰 소음이 들리고 내가 탄 자동차가 도로를 벗어나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 * *

내 눈앞에 갓 스무 살로 보이는 청순한 여자가 앉아 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저는 지수연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지수연이라고 밝힌 여자는 나에게 인사하며 수줍게 웃었다.

지수연.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장면이 훅 바뀌었다.

나는 지금 촬영장 한가운데 서 있다.

생소한 사극 촬영장에 눈에 익은 여자가 보였다.

지수연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나는 오늘 지수연이라는 여자도 처음 보고 이런 드라마 촬영 현장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지수연의 약력과 해당 드라마의 모든 정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내 기억과 상황은 계속 변했지만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았다.

지수연.

나는 지수연이라는 배우의 매니저가 되어 그녀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삼 년간 지수연과 함께 앞만 보고 달려왔고 드디어 지수연도 톱의 자리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지난날 이자현보다 빠르게 스타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자현은 어디에 있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때 내 머릿속에 이자현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이자현은 내 배우가 아니었다.

꿈이 시작된 삼 년 전, 이자현은 나를 떠났고 그녀를 대신해 지수연을 키우게 된 것이다.

이자현에 대한 기억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파도가 되어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이자현.

나를 배신했구나.

나를 떠났어.

나는 눈앞에서 상을 받으며 기뻐하는 지수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웃는 지수연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자현에게 가야 한다.

가서 물어야 한다.

왜 나를 배신했는지 알아야 한다.

* * *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익숙한 패턴의 커튼을 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병원이구나. 꿈이었나?

신기하게도 방금 꾼 꿈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무려 삼 년간 지수연이라는 배우를 키워 스타로 만드는 꿈이었다.

개꿈도 참 정성스럽게 꾸는구나.

나는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커튼이 쳐져 있었으나 공간을 보아하니 일인실인 것 같았다.

몸을 좌우로 움직여 봤는데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것 말고는 다친 곳이 없었다.

다행이다. 큰 사고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침대를 일으켜 세우고 앉았다.

그때 내 시야에 태블릿 PC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진 것으로 보아 병실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 보고 있던 것이었나 보다.

나는 태블릿 PC를 들고 터치했다.

잠금 해제 패턴 창이 나오자마자 나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패턴을 입력했다.

LOK 엔터에서 사용하는 태블릿 PC에 공통으로 사용하는 패턴이었다.

내 예상대로 잠금 화면이 풀렸고, 나는 바탕 화면의 날짜를 먼저 확인했다.

1월 6일.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네.

머리를 부여잡은 나는 검색창을 띄우고 ‘이자현’을 검색했다.

대상이야 탔겠지만 어떤 기사가 올라왔을지 확인해야 한다.

[단독] 이자현 TOP 엔터로 이적.

제일 먼저 눈에 띈 기사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TOP 엔터?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황급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누군가 커튼을 들쳤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들어온 남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어. 어.”

남자는 내가 유일하게 남동생처럼 대하는 LOK 경영지원팀의 막내였다.

“막내야. 어떻게 된 거야? 이자현 배우님이 왜 이적을 해?”

“원 팀장님.”

“말 좀 해 봐. 이 기사 사실이야? 혹시 오보 아니야?”

“원 팀장님. 왜 이제 일어나셨어요.”

막내는 이제야 이자현을 찾는 나를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배우님 어디에 있어?”

“자현 배우님은…….”

막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내 눈치만 살폈다.

“TOP 엔터에 있어?”

내가 다그쳐 묻자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침상 아래로 내려오려고 몸을 움직이자 세상이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바닥에 주저앉자 놀란 막내가 나를 부축했다.

“원 팀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 교통사고 당해서 일주일 만에 일어났는데 내 배우가 나 몰래 다른 회사로 이적을 했다고.”

막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눈을 피했다.

“차 키 있지? 줘 봐.”

“뭘 하시게요?”

“안 도망가. 이 배우 좀 만나려고 그래. 그러니까 차 키 좀 줘 봐.”

“지금 이 몸으로 어디를 가시려고요.”

“막내야. 나 좀 도와줘. 나 자현이를 만나야겠어. 부탁이야. 그러니까 차 키 줘.”

막내는 고민이 되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간 없어. 빨리.”

내가 재촉하자 막내의 입이 열렸다.

“그럼, 제가 운전할게요. 대신 자현 배우님만 보고 바로 병실로 돌아오시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제가 혼나요.”

“알았어. 가자.”

* * *

1월의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나는 차창을 최대로 열었다.

시린 바람이 내 몸 구석구석에 들어오자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미안하다. 막내야. 춥겠지만 조금만 참아.”

“예. 팀장님.”

막내가 TOP 엔터로 차를 모는 사이 나는 이자현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자현은 두 방송국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TOP 엔터로 이적한다는 기사를 발표한 것이다.

TOP 엔터는 뭘까?

이 바닥에서 십 년 넘게 일해 왔지만 TOP 엔터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황급히 TOP 엔터에 대해 검색했다.

핸드폰에 뜬 TOP 엔터의 상세 페이지를 본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허탈하게 웃자 막내는 내가 걱정되는지 운전을 하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막내야. TOP 엔터가 결국은 LOK구나.”

“아. 예. 그런 거로 알고 있어요.”

TOP 엔터는 작년 연말부터 LOK가 인수 준비하던 Y&C 엔터다.

LOK는 Y&C 엔터를 인수했지만, 회사를 그대로 두고 사명만 TOP 엔터로 바꾼 것이다.

소속 배우가 삼십 명 넘자 LOK는 배우 관리를 위해 Y&C를 인수해서 그쪽 시스템을 사용할 예정이었다.

이건 나도 알고 있다.

이자현이 Y&C로 가면 내가 그곳의 사장으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팀장에서 사장으로 올라가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런데 애초에 내가 계획했던 회사의 사명이 아니다.

시기도 빠르다.

나는 천천히 준비해서 하반기에 회사를 오픈할 생각이었다.

물론 사장도 다른 사람이겠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막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막내야. TOP 엔터 사장이 누구야?”

“저. 그게 저는 이런 일은 잘…….”

“어차피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냥 말해 줘.”

“사실은…….”

막내가 몰던 차가 어느새 청담동의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LOK 사옥과 십 분 거리에 있는 새로 지은 화려한 건물이다.

차가 멈춰 서자 내가 막내를 붙잡고 물었다.

“막내야. 말해 줘. 알고 들어가야 나도 대비를 할 거 아냐?”

막내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지욱 사장님이 오셨어요.”

“한지욱?”

그 순간 내 두 눈이 커졌다.

한지욱은 LOK 한성제 사장의 외아들이다.

미국에 유학 가 있다던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엔터 업계는 하나도 모르는 초짜한테 사장 자리를 줘?

그것도 이제 톱스타 자리를 굳건히 다져야 할 이자현을 맡긴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자현 배우가 싫다고 했으면 다 소용없었을 텐데. 어떻게 한지욱이 사장이 된 거지?”

“제가 듣기로는 자현 배우님도 찬성했다고 했어요. 원래 TOP 엔터를 만들 계획이었대요.”

그때 주차장으로 고급 외제 차가 들어왔고 차 안에서 한지욱과 이자현이 내렸다.

이자현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턱하고 막혔다.

이자현은 12월 30일, 마지막 봤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지만, 우리 사이는 완전히 변했다.

내가 차 문을 열자 막내가 내 손을 잡았다.

“원 팀장님. 이거라도 입고 가세요.”

“고마워. 막내야.”

나는 막내의 코트를 받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얇은 환자복에 막내에게 빌려 입은 코트를 걸쳤다.

나는 슬리퍼를 신고 눈앞의 이자현과 한지욱을 쫓아갔다.

걸을 때마다 오른쪽 다리가 욱신거렸다.

내가 들어서자 로비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한겨울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나를 보고 놀란 것이다.

그때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이자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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