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86화 (186/198)

# 186

아이슬란드의 지하왕국

“어떻게 할까요?”

통화기 너머로, 장 부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까짓 거 100억 더 얹어 주지요.”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러면 계약 체결 하고 한 달 안에 퓨어&네이처를 사장님 회사로 만들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네. 그리고 다음 건입니다. 요성푸드빌 사장이 갑자기 말을 바꿨습니다. 지난 번 매각에 대략적으로 동의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싸답니다.”

나는 잠깐 세 손가락을 모아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협상이 진행되니까 갑자기 돈 욕심이 났나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조금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줘야 겠군요.”

나와 협상을 하는 건 좋지만, 협상을 해놓고 말을 바꾸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수연그룹이 박살 난지도 이제 거의 1년 업계에서는 수연그룹과 탁문수를 몰락시킨 것이 나라는 괴소문(때때로 시장에 나도는 소문이 사실인 경우도 있다.)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녔음에도, 요성푸드빌 사장은 그것을 간과한 모양이다.

“아... 그렇군요.”

내 말에 장 부사장은 더 묻지 않고, 단지

“네. 그럼 그렇게 되는 것으로 알고 조금 기다리겠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대답했다.

“네에 한 일주일 정도면 아마... 조금 공손하게 바뀔 겁니다.”

“네 사장님. 그 다음 건은...”

장 부사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으아아아앙~”

긴 울음소리가 전화 바깥쪽에서 들려온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장 부사장에게 말했다.

“아 잠시만요.”

장 부사장은 살짝 웃음기 띈 목소리로 말한다.

“네 사장님.”

장 부사장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잠에든 것 같았던 딸 서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나는 울고 있는 서현이를 안으며 달래기 시작했다.

“왜 우리 아가. 왜”

하지만 서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 새 문을 열고, 아내가 들어선다.

“엄마. 엄마 왔다. 서현아.”

나는 울고 있는 서현이를 아내에게 건넨 후, 다시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네네 부사장님. 말씀 계속하세요.”

장 부사장은 지체 없이 이어 말했다.

“뷰박스 정용균 부사장 전언입니다. 이번에 상해에서 뷰박스 100호 점 개점 행사를 하는데, 마침 장펑이 상해 당서기가 이 행사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정 부사장 말로는 이 때 사장님이 한 번 참석하셔서 인사 나누는 게 어떤가. 그런 말을 하네요. 중국 분들도 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한 번 직접 뵙고 싶어 하신다고 하더군요.”

상해는 중국 금융위기 전이나 후나, 중국 경제의 최 중심지이다. 그곳 당서기와는 안면을 터 놓을 필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행사가 있는 날이 언제지요?”

“다음달 17일입니다.”

“아아 그래요. 그러면... 그 때 잠깐 중국 출장 나갔다 오는 것으로 하지요. 장 부사장님도 동행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사장님 그러면 저도 그 날 동참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다른 안건이 있나요?”

“없습니다. 사장님.”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나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딸 서현이는 마치 자기가 언제 울었냐는 듯 엄마의 품에서 얌전히 눈을 굴리고 있다. 아내는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 고집부리지 말고 출근해. 서현이는 내가 볼게.”

“아니...”

나는 아내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는데, 딸을 보는 게 너무 좋아서 출근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는 살짝 아쉬움이 남는 목소리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딸에게 뽀뽀하며 말했다.

“아빠는 일하고 올게.”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 하겠지만,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게 딸을 위하는 길이다. 나의 경우는 다른 아버지들과 조금 의미가 다르지만 말이다. 정장을 챙겨 입고, 출근을 하니 역시나, 박 비서와 이 비서 두 사람이 나를 반겨 준다.

“오셨습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받은 다음 말했다.

“박 비서 나 다음달 17일에 중국 가기로 했어. 상해.”

“아 방금 전에 장 부사장님에게서 연락 와서. 일정표에 추가해놓았습니다.”

“아아 그래? 그럼 그런 줄 알고 두 사람 모두 준비해 알았지?”

“네 사장님.” “네 사장님.”

두 사람은 일시에 대답한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이 비서가 나를 붙잡는다.

“사장님.”

“응?”

“폴 오션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쪽에선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한 번 직접 오셔서 컨펌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라고 하시네요.”

“음... 그래? 그러면...”

나는 사장실 앞에서 선 채로 잠시 고민하다가,

“중국 가기 전에 먼저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다음주... 아니 다다음 주 즘에 찾아본다고 해.”

“네 사장님. 메일 보내셨다니까 확인 해보시고요.”

“응.”

“저 영어 어려우시면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교육의 피해자야. 다른 걸 못해서 그렇지 읽는 건 원어민 수준이라고.”

이 비서는 살짝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네 사장님.”

그 말을 남기고 나는 사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일한 지 한 달여, 이 비서는 빠르게 비서 일에 적응했다. 확실히 똑똑하긴 똑똑한 것 같다. 나는 메일함에 가보았다. 메일함에 가보니 이 비서 말대로 폴 오션 씨에게서 메일이 와 있다.

‘사장님 적당한 지역 찾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클릭해보았다.

‘레이캬비크 근처 양 방목장인데, 땅 주인인 올라비르 하르다르손 씨께서는 적당한 금액만 지불 되면 팔 의향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이름을 소리내 읽어보았다.

“올라비르... 하르다르손.”

‘~손’으로 끝나는 것이 딱 전형적인 바이킹의 후예, 아이슬란드 사람 이름이다. 나는 메일을 더 읽어보았다.

‘...주변 환경과 지반 등을 고려했을 때, 이곳 보다 더 좋은 곳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한 번 사장님께서 오셔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약 완료되면 바로 저희 쪽 사람들이 공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신,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팜플렛 동봉합니다.’

나는 메일에 첨부된 파일을 받아보았다. 파일은 그림 파일이다. 그리고 그 그림 파일 전면에 쓰여 있는 단어는 바로 둠스데이 프레퍼스(Doomsday preppers). 이른바 ‘운명의 날을 준비하는 사람들’. 파일에 나오는 것은 거실, 침실, 화장실 등등이 딸려 있는 우리나라 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것이 그것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 부동산 모델은 아이슬란드의 지하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폴 오션이란 사람은 꽤나 괴짜로. 본인도 나보단 못하지만 100억 대 자산을 가진 부자였다. 그런데 그는 언제부터인지 세계종말 SF소설에 빠지기라도 한 것인지, 이런 종말 대비 프로젝트에 빠져서 먼저 자신이 살 쉘터를 만들고, 이어서 남들에게도 이런 것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사업이 잘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아마 후자일 것 같다. 그와 같은 괴짜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진지하게 이 일을 하고 있었고. 마침 플랜B로 핵 전쟁을 대비하려는 내 눈에 띄게 되었던 것이다.

‘좋아... 여기다가 쉘터를 만들어 놓으면... 최소한 30년은 버틸 수 있겠지?’

아이슬란드는 내가 미래뉴스 글로벌 설정에서 50여개 국가를 돌려본 결과 가장 길게 연속적으로 뉴스가 나오는 곳이었다. 게다가 여러 조건이 좋았다. 미국과 중국 반대편에 있는 대서양 중간에 위치. 우리나라랑 면적은 비슷한데, 인구는 40만이 채 안 된다.

그러니까 강원도 원주시에 사는 사람들 전부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사는 것과 비슷한 수준인 것이다. 그 와중에 천연자원은 풍부하고, 지반은 안전하고. 누가 세계대전 중에 공격을 해 올만한 요소도 없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플랜B가 설계될 곳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가격은... 30억에서 500억 사이라고...’

사실 나야 진짜로 핵전쟁이 난다고 하면 1조원 넘게 쓸 의향이 있다. 아니 사실상 전 재산을 모두 쏟아 부어도 된다. 어차피 핵전쟁이 터지면 모두 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코카콜라 병뚜껑 모아갈 것도 아니고.’

나는 일단 최대치인 500억 정도로 예산을 잡아두었다. 그 정도도 내게는 별로 안 되는 금액이다. 요새 2배로 늘린 내 선물트레이딩 팀은 한 달에 2천억씩 벌어들이고 그랬으니까. 만약에 종말의 날까지, 내가 핵전쟁을 막지 못한다는 확신이 들면, 아예 일찌감치 아이슬란드에 이주해 지하에 내 왕국을 세우는 수준으로, 확장을 할 생각이 있다.

아이슬란드는 금융이 발달한 나라라서, 한국 제일의 부자가 왔다고 하면 얼씨구 좋구나 하고 반겨줄 것이다.

*

시간은 다시 흘러 2023년 12월이 되었다. 둠스데이까지 2년 남짓. 나는 앞으로는 돈을 벌고, 미국, 중국 정치 쪽에 인맥을 쌓았지만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슬란드에 쉘터 짓는 데에 조금 더 무게를 두게 되었다. 왜냐하면 크로우가 물어오는 정보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하면 핵전쟁을 막을 수 있겠군.’

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이거 둘 다 핵전쟁을 생각하고 있었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장님 이번 달 보고서입니다.”

“그래요. 크로우 수고했어요.”

나는 12월 달 보고서는. 해리 카터필드 미해군참모총장에 관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사실상 미국의 국가기밀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서 스파이의 첩보문서에 가까웠다.

‘...이걸 중국정부에 돈 받고 팔면 못해도 몇 백억은 받을 수 있겠군.’

싶은 수준. 어찌되었든, 미국의 국방기밀을 읽다보면 미국은 사실상 중국을 적국으로 생각하고, 이런 저런 전쟁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핵전쟁은 옵션에 없었지만, 어쨌든. 사실상 슈퍼 파워 대 슈퍼 파워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 까지는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중국도 마찬가지라는 점. 중국도 남중국해 봉쇄를 풀고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나설 생각이 있었다. 대만은 당연히, 자국으로 편입될 영토이고 말이다.

‘후우... 이거... 핵전쟁은 어찌 어찌 막아도... 그 다음에 전쟁은 나게 생겼는데?’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회의감이 든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길이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어도, 혹은 중국 주석이어도,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아이슬란드 지하에 왕국이라도 세워야하나? 내가 왕이 되고... 서현이는 공주로 키우고 말이야...’

나는 그런 괴상한 상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쪽도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일단 최대한 몸을 던져 본 후, 안된다면 거기서라도 행복을 찾아야할 것 같다. 나는 이 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곧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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