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73화 (173/198)

# 173

전면전(9)

6월초 시작된 RMI와의 협상은 6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급물살을 탔다.

‘너무 싸게 협상을 하려고 하면 RMI이 수연그룹 쪽으로 방향을 틀지도 모릅니다.’

평소 쫀쫀한 편인 장 부사장이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나도 승낙을 했다.

‘그래요 그럼. 2조 7천억에 매입합시다.’

무려 5천 억 가까이 되는 프리미엄. 이번 금융위기가 끝나고, 내 손을 타게 되면 금방 그 갭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4.99%의 지분에, 7.3%를 가진 RMI지분을 합치면 12%가 넘는다. 그것은 대주주인 수연건설 11%보다 많은 양이다. 수연그룹의 핵심 중 하나인 전자가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군. 그렇게 되면 바로... 탁문수 해임부터 해야겠지?’

나는 벌써부터 탁문수의 후임을 누구로 할지 생각했다.

‘수연전자 이사 중에서 하나 뽑을까? 아니야 거긴 다들 탁문수 휘하에 있던 녀석들이라 내 말을 잘 들을 지... 그럼 다른 그룹에서 스카웃 해올까? 음... 차라리 깔끔하게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도 나을 지도...’

그런데, 그런 내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

6월 18일. 사장실에 출근한 나는 평소처럼 미래뉴스들을 훅 훑었다. 중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한지도 이제 거의 1년. 이제 슬슬 ‘12달 뒤’ 뉴스에서 희망적인 내용들이 흘러나왔다.

‘중국발 금융위기에 휘청거렸던 국제 경제. 완만한 회복추세’

‘코스피, 2300선 탈환. 금융위기 악몽 끝나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신용경색 풀리는 신흥국들, 한국도 원화 반등.’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흠 그래. 그럼 1년 내로 될 수 있으면 40조원을 푸는 게 좋겠군. 일단 수연전자, 건설부터 사고...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건 하나 둘 씩 집어 삼키는 거야.’

미래뉴스를 본 나는 이어서 내 이름으로 인물검색을 해보았다.

‘인빅투스 한상훈 대표 레드모드인베스트먼트에게서 2조 6천억원에 수연전자 7% 지분 인수. 수연전자 최대주주에 올라.’

나는 그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내용을 볼 것도 없다. 내 의지가 있으니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 당연하다.

‘좋아 그럼 그렇게 되고...’

나는 그 다음 이름으로 뭘 써넣을까 하다가 그래도 ‘탁문수’를 집어넣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가 뭔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탁문수, 딥블루코퍼레이션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경영권 지켜내는데 성공해. 수연전자 경영권 공방 2라운드 공 울려.’

그런 뉴스가 떴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딥블루코퍼레이션?”

전혀 들어보지 못한 회사다. 나는 그걸 읽어보았다.

‘최대주주로 부상한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가 탁문수 대표의 해임안을 올렸으나, 지분 11%를 소유한 수연건설과 5%를 소유한 딥블루코퍼레이션이 거부를 표시함으로서 가까스로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탁문수 대표와 딥블루코퍼레이션은 앞으로 한상훈 대표의 적대적 M&A에 결사항전을 펼칠 것을 다짐하면서 수연전자를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장기화 될 것을 예고했다.’

나는 그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이러면 어떻게 되지... 여기까지 눌러버리려면... 일반인들에게서 주가를 높이면서 사들이거나, 수연건설 인수까지 마무리를 해야 해... 하지만 수연건설은 당장 공략하기가 어렵지. 이러나저러나, 수연건설은 탁우경이 20%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속세 분납까지 한다고 몇 년 질질 끌면...’

이렇게 되면 대단히 복잡해진다. 전 세계 자산 대 바겐세일 구간인 금융위기는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끌고 있을 수 없다. 돈을 줘서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지만 그러면 그 과정에서 내가 탁문수에게 고액의 돈을 주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탁문수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어차피 수연전자, 수연건설은 아버지 세대에 주가 되었던 회사니까. 여기서 내게 수비 하는 척 시간 끌면서 넘긴 다음 거액의 돈만 챙겨 수연화학을 키우면 그도 나쁠 게 없다.

“딥블루? 여긴 뭐야 대체?”

나는 포털사이트에 ‘딥블루코퍼레이션’을 검색해보았다.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나는 혹시나 해서 해외포털에도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그래봐야 나오는 게 없었다. 그나마 뜨는 것이라고는 죠스 영화, 혹은 참치 잡이 원양어선 등등.

‘아니 어떻게 검색해도 나오지도 않는 회사가... 수연전자 지분 5%를 사는 거지? 게다가 탁문수에게 우호적인 표를 던졌다고...?’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탁문수는 적대적M&A임을 알고도 주가 방어를 하지 않았어. 게다가 레드모스 인베스트먼트와의 협상에도 끼어들지 않았지. 그런데 그 와 중에 비밀에 쌓인 회사가 지분을 사들이고 탁문수에게 우호적인 표를 던진다... 이거... 설마...’

딱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페이퍼컴퍼니. 탁우경의 숨겨진 돈으로 만들어진 해외 자산. 떠도는 풍문으로는, 우리나라 재벌들은 대부분 리히텐슈타인, 바하마, 모나코, 케이멘 제도와 같은 조세피난처에 검은 돈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여태까지는 음모론에게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위급 상황... 장롱 속 돈다발을 꺼낸건가...’

그렇다면 탁문수가 말한 ‘진정한 수연의 힘’이란 말과도 대충 맞아 떨어진다.

‘흥 진정한 힘이 조세피난처에 짱 박아둔 돈이냐 설마?’

설마 같지만, 조각난 퍼즐들을 맞춰보면 그것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럼 딥블루코퍼레이션을 파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크로우를 보낼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딥블루코퍼레이션은 아예 존재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 크로우가 이 임무를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크로우에게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음... 어쩐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난 번 찾아온 이원재가 떠올랐다. 그는 지난번에 내게 충성맹세를 하면서

‘저 나름대로 수연그룹의 약점을 한 번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띠리~’

그는 전화연결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내 전화를 받았다. 문 밖에 있는 박 비서보다도 빠른 속도다. 놀라울 정도.

“네 대표님.”

“아 대표님 지금 통화되시지요?”

“네네 물론입니다. 대표님 통화야 24시간 받아야지요.”

“네 다름이 아니고, 지난 번에 수연그룹 말 나왔었지 않습니까?”

“네네.”

“그... 페이퍼컴퍼니, 조세포탈, 그쪽에서는 관련해서 뭔가 자료가 없을까요? 아 딥블루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 유령회사 포함해서요.”

“아아 제가 바로 조사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대표님.”

“네 그래주세요.”

통화가 끝나고, 10분이나 지났을까. 바로 이원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대표님. 찾았습니다.”

“뭘 찾으셨나요?”

“딥블루코퍼레이션이란 회사 말입니다. 영국령 지브롤터에 기반을 둔 회사인데. 예전에, 수연건설과 거래를 한 적이 있더군요. 관련 기사가 저희 쪽에 있었습니다.”

“아아 그래요.”

“네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그거 인터넷에는 안 올라와 있나요?”

“아 그게... 이게 2009년도 기사인데 당시에 나왔다가 얼마 지난 후에 내려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그 말은, 수연그룹에서 압박을 넣거나, 혹은 돈을 넣었다는 말이다. 엄청나게 구린 냄새가 난다. 이원재는 내게 두 개의 기사를 보내주었다. 첫 번째 기사는

‘수연건설 칠레 구리 광산 사업 철수. 광산 개발권 딥블루코퍼레이션에 2400억에 매각.’

라는 제목이었고, 두 번째 기사는

‘버스 지난 뒤 손가락 빨고 있는 수연건설. 팔고 난 구리광산에서 대규모 광맥 드러나 매장 가치만 3조 2천억 원에 달해’

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두 줄의 기사제목만 읽고도 스토리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여기 이 딥블루코퍼레이션이 탁우경의 페이퍼컴퍼니라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거. 수연건설이 구리광맥이 나올 걸 알면서도 싸게 판 것이로군요.”

“아마 그렇겠지요...”

탁우경에게 이건 엄청난 이득이 된다. 왜냐하면 수연건설은 탁우경의 지분이 20%밖에 없지만. 딥블루코퍼레이션은 탁우경이 100%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2조 짜리 광맥이라고 하면 수연건설이 찾아내면 4천억원이고, 딥블루가 찾아내면 2조 고대로 탁우경 지갑에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하아... 이거 완전 개미 물먹이는 건데... 배임이네요. 배임 이 때 검찰이나 그런 곳은 가만히 있었습니까?”

“당시에도 말은 나왔는데... 보시다시피 기사는 다 내려가고... 특검도 한다 만다 했었는데 흐지부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더럽군요.”

하여간 위로 파보면 파볼수록 더러운 이야기가 많다. 만약 이 구리광산이 정말로 수연건설이 찾아낸 것이 되었다면 아마 수연건설을 가지고 있는 개미들은 상한가 한 두 번은 맛봤을 것이다.

‘절대 개미들한테 돈 되는 일은 하지 않는군.’

그런데, 이원재대표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건설업 쪽에서도 이런 일 많다고 들었습니다. 왜 우리 건설사들 해외에 건물 많이 짓지 않습니까? 대표님. 예를 들어서 막 300층짜리 건물들. 그게 만약 정가가 10조원짜리라고 하면 대개 8조원으로 저가 입찰하는 척 한 다음. 뒤로 1조원은 오너 계좌로 입금 받는다고 하더군요. 건물 받는 입장에서는 1조원 싸게 받고, 오너는 뒤로 1조원 챙기고 서로 좋은 거죠.”

서로 좋다. 여기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선량한 개미투자자들이다. 바보 같은 국민연금하고. 이러면 우리나라에서 우량주 산다, 대기업 투자를 한다, 해도 사실상 사기를 당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대주주만 좋은 특급 사기. 재무제표는 깔끔하게 나오니까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이원재 대표는 혼자서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조선쪽에도 뭐 이런 거 많다던데... 왜 배도 몇 조씩 하지 않습니까?”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알겠습니다.”

더러운 이야기 더 듣고 싶지 않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이원재 대표님.”

“예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뭐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더 연락 주십시오.”

“네네”

이원재 대표와의 통화를 마친 후, 나는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봐서 적당히 끝내 줄까 했는데... 이거 완전 쓰레기들이잖아?’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탁우경, 탁문수 이 일가는 완전히 대한민국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배임으로 개미들 아우성도 외면하고, 탈세로 세금도 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단지 자신들의 이익을 쫒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아예 뿌리를 뽑아 놔야겠어.’

나는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다음 수를 생각했다. 먼저 이메일을 켜서 크로우를 불렀다. 페이퍼컴퍼니긴 하지만 기사에 지브롤터에 있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정보가 더 쓰여 있었으니 그 정도면 찾아볼만 할 것이다.

‘딥블루가 수연그룹의 페이퍼컴퍼니라는 게 밝혀지면, 이건 탁우경도, 탁문수도 끝이다. 오라클 뉴스에서 호외로 내면, 주성원 대통령이 손을 써주겠지. 이건 나라의 문제니까.’

궁지에 몰린 정말 탁우경은 최악의 수를 두었다. 위기에 몰렸다고, 자신의 불법행위를 스스로 드러냈으니 말이다.

‘...아마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

지난 번 ‘체크 메이트’를 당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게임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항을 한답시고 더욱 더 더러운 수를 쓰고 말았다. 내가 체스판을 다 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군. 아예 완벽하게 모든 패를 잡아내는 수밖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