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72화 (172/198)

# 172

전면전(8)

탁문수가 사장실을 나간 직후, 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흥 이제 조금 자신의 신세를 깨닫게 되었나?’

그 거만하던 수연그룹 차기 회장도, 내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다. 나는 내 앞에서 쩔쩔매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게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그렇지.’

문득 난 생각에 나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서 바로 장 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 띠리리~ 띠리’

그는 곧 전화를 받았다.

“부사장님? 접니다.”

“예 사장님 무슨 일로 전화하셨는지?”

“다름이 아니고, 수연 그룹 매수 속도를 조금 더 빠르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가 수연그룹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누가... 말씀이십니까?

“탁문수 말입니다. 수연그룹 회장.”

“아아... 그렇군요. 결국 오늘 만나셨군요.”

“네.”

“음... 그가 알고 있다라... 그럼 뭔가 대비를 하기 전에 빨리 더 사들여야 겠군요.”

“네 일단 4.99%까지는 폭발적으로 사고, 그 다음에 레드모스 쪽하고도 이야기를 해보죠.”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적대적 M&A가 들어갔을 때 주가는 마치 성벽의 높이와도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공격하는 측은 가격이 낮으면 낮을수록 유리하지만, 수비하는 측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방어에 유리해진다. 공격자가 높은 성벽을 넘어서 공격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높은 가격의 주식을 매수하면서 지분을 사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통화를 마친 뒤, 나는 방금 있었던 대화를, 탁문수의 말을 생각했다.

‘네가 만약 끝까지 쳐들어오겠다고 한다면. 나도 수연그룹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수밖에 없어.’

“진정한 힘이라... 무슨 개뿔”

내가 가진 돈은 40조다. 수연 그룹 계열사 전부에서 현금을 끌어 모아야 그 정도 될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하건 간에, 나는 내 미래 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 역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무슨 방어를 한다고 해도, 내가 미리 먼저 알고서 그걸 차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건 불공평한 장기, 체스다. 나는 상대가 할 것을 미리 알고, 그는 내가 뭘 할지 모른다. 애초에 싸움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재롱을 피우나 한 번 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이번 주에, 수연건설은 6% 수연전자는 8%대 상승을 했다. 중국발 금융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이레적인 상승이었다. 내 지시를 받은 장 부사장이, 대량으로 주식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4.99%. 지분을 꽉꽉 채운 나는 다음 페이즈로 넘어갔다. 글로벌 투자 기업 레드모스와의 협상 말이다.

*

2021년 6월 2일. 나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레드모스와의 미팅을 가졌다. 30조 기업의 7%. 그러니까 시장가로만 2조원이 넘는 빅딜이었기 때문에, 레드모스인베스트먼트 쪽에서도 거물들이 왔다. 미국 본사에 있는 거물들 말이다.

“In the U.S. We have heard of Han Sang-hoon's great fame”

“미국에서도 한상훈 대표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Thanks. I appreciate it”

양 측 모두 번역으로 이루어지는 협상은 오고가는 말 자체는 아름다웠지만, 내용에서만큼은 치열했다. 잠시 쉬는 타임에 내가 불평을 할 정도였으니까.

“저 녀석들 진짜 어지간한 녀석들이군요.”

“자기들 지분만 확보하면 수연전자 경영권이 우리에게 넘어온 다는 것을 알고 비싸게 구는 겁니다. 어쩔 수 없지요.”

“아니 그래도 나름 잘 쳐주려고 했는데.”

“본래 이런 협상에는 닳고 닳은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이야기 해보시지요.”

하지만 결국 1차 협상은 큰 이견을 남기고 끝났다. 레드모스 인베스트먼트는 내가 진짜 수연전자 경영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엄청나게 가격 부풀리기를 해댔다. 40조원이 있는 나조차 꺼려질 정도로 말이다.

‘결국 팔 녀석들이. 더럽게 비싸게 구네.’

나는 툴툴 거리면서 혹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 생각을 해보았다.

‘미국 놈들을 어떻게 엿 먹일 수도 없고.’

사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쪽은 미국 놈들도 아니었다. 국적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다국적 기업. CEO는 인도 사람이고, CTO는 스위스 사람이고 뭐 그런 식이다.

‘어떻게 뭐라도 하나 더 터쳐 볼까? 수연전자 주가라도 하락시키게?’

하지만 이미 터트릴 건 다 터트렸다. 특검에, 세무조사에, 대주주가 죽었다는 뉴스까지 내보냈는데,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아... 그래... 여기서 더 끌어내리는 건 어려워. 애초에 중국 때문에 꽤나 내려간 상태인데 말이야.’

지금 수연전자 주가는 가만히 있어도 올라갈 판이었다. 전 세계 경기는 대위기를 겪고 조금씩 기지개를 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탁문수도 뭔가 손을 쓸 수도 있었다. 주가 부양을 위해서 자사주 매수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는 조금 요상하긴 했다. 나와의 만남이 있던 뒤로, 일주일 째, 탁문수는 아무런 일 없이 조용히 있었다.

그건 정말 수상한 일이었다. 진짜로 우리 회사가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래서 레드 모스와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는 것까지 알았다면 뭔가 조치를 더 취해야 했어야 정상인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 내가 탁문수였다면 최소한 수연그룹에 친화적인 언론에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 한상훈이 수연전자를 사려고 한다.’

라고 뻥뻥 소리를 치고 다녔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달려든 기관 돈, 개미 돈이라도 끌어들이게 말이다.

‘주가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판인데... 왜 그러고 있는 거지?’

딱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그쪽도 몰래 지금 지분 확보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랑 같이 달리기를 하시겠다... 그건가? 정말로? 40조 대 부자랑?’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정도 시나리오 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서는 말이다.

*

그러던 6월 4일. 내게 손님 하나가 찾아왔다. 찢어진 눈에 매부리코, 붉은 얼굴까지. 나이가 먹었어도, 여전히 카이지와 똑같이 생긴 남자. 이원재 대표가 말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한 대표님.”

“네네. 잘 지내셨지요?”

“네 그럼요 잘 지내다마다요.”

그는 얼굴이 꽤나 밝다. 지난 번, 탁우경의 죽음을 밝힌 기사가, 결국 진실로 확인됨에 따라 말 그대로 올해의 호외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내게 들고 온 작은 가방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나는 그 가방을 받으면서 말했다.

“이게... 뭐지요?”

“열어보시면 알 겁니다.”

나는 그걸 열어보았다. 그리고,

“와우.”

육성으로 말했다. 거기에는 DVD가 있었다. 모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빅 피쉬’, ‘프롬 헬’, 그리고 ‘버드 맨’까지. 하지만 평범한 DVD가 아니라 모두 친필 사인이 쓰여 있는 DVD였다.

“틴 버튼 감독, 조니 뎁, 마이클 키튼의 사인입니다. 왜 예전에 지나가듯 좋아하시는 영화 이야기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추려서 저희 회사 계열사, 영화잡지사에 있던 것인데, 제가 가져왔습니다.”

나는 그걸 들어보았다. 꼭 마음에 드는 선물들이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에게 뭐 비싼 거 사드리는 것은 조금 이상하고, 이런 걸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

그는 슬쩍, 내가 우리나라 최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흘렸다. 대원일보 정보력이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정말.”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제 취향까지 고려해서 선물을 해주시다니 정말 고맙군요. 대표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운 거야. 제가 더 고맙지요. 지난 번 일 덕분에 아버지에게서 암묵적인 응답이 왔습니다. 제가 대원일보의 차기 CEO가 되는 것으로. 거의 정해진 듯합니다.”

나는 살짝 입을 모으며 말했다.

“아아 그러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는 거의 절을 하듯 몸을 반쯤 접으며 말했다.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뭘요. 다 저를 믿고 따라주신 덕에 가능한 일이었는걸요.”

생각해보면 그 역시 그 기사를 내보내는데 꽤나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 기사를 써서 냈다가, 탁우경이 살아서 병상에서 걸어 나오기라도 하면. 그러면 엄청나게 큰일이 났을 것이다. 대원일보는 수연 그룹의 대대적인 공격(엄청난 규모의 소송을 포함한)을 받을 것이고, 이원재 대표는 거기서 커리어가 끝이 난다. 나야 뭐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선택입니다. 성경에 예수님도 그러셨다고 했죠.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해서 자신을 보지도 않고 믿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허리에 손을 넣어보고 믿는 사람에게는 작은 상을 줬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팩스 보내요? 말아요?’

성경 구절 운운해가면서 그를 압박했지만, 그에게는 정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그런 대담한 베팅을 했으니, 아버지에게서 인정을 받을 만도 하다. 나 역시 인정해주고 말이다.

“이원재 대표가 차기 대원일보 사장이라면 저도 한결 마음이 편하겠군요. 이런 일 저런 일 할 때 같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언제든, 무슨 일이든 불러만 주십시오. 대표님. 즉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머릿속에 내가 원하는 것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 뭐가 있을까.’

그런 것은 딱히 없다. 하나 있다면 레드모스 인베스트먼트가 조금 고분고분히 굴었으면 하는 것 정도. 나는 별 생각 없이 그걸 밖으로 내뱉었다.

“별다른 건 없는데... 지금 협상 중인 레드모스 인베스트먼트 녀석들이 조금 까다로워서 그것 좀 해결됐으면 하는 생각은 있습니다.”

“아아 레드모스 인베스트먼트요? 거기가 아마 수연전자 2대주주였지요?”

“네. 잘 아시는군요?”

“레드모스가 우리나라 기업 사냥하는 거야 뭐 유명한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레드 모스라... 그런데 그 녀석들은 저희도 어떻게 도와드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예전 신흥은행 먹튀 논란 있었던 것 끄집어 내봐야, 이미 8년 전 일이라... 애초에 도덕적으로 공격을 해봐도 그런 건 먹히지 않을 녀석들이기도 하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녀석들은 애초에 돈 밖에 보질 않으니까요. 우리나라 언론이 뭐라고 한다고 한들 눈 하나 껌뻑거릴 녀석들이 아니지요.”

“돈 밖에 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가격을 더 낮추는 방안은...?”

“그것도 생각해봤는데. 이미 제가 쓸 카드는 다 썼습니다. 그래서 조금 비싸더라도 제값 주고 사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시군요. 뭐 그래도, 제가 저희 회사 계열, 기자들에게 메일 돌려서 수연그룹 약점 아는 사람 있으면 뭐든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받은 은혜가 있는데 어떻게든 갚아야지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가 뭘 더 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드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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