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간 뒤-153화 (153/198)
  • # 153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침대 옆자리가 비어 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주방 쪽으로부터 칼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나는 눈을 비비며 주방 쪽을 향해 말했다.

    “일찍 일어났네? 오늘은 김치찌개야?”

    주방 쪽에서 아영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오늘 참치 넣어서 참치김치찌개로 만들어봤어. 씻고 와서 드셔요.”

    “응.”

    나는 샤워실로 향하려다가 문득 밖을 보았다. 하늘에서 굵은 눈이 내려와 서울을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그걸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 아영이가 내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아니 그냥... 눈이 많이 온다 싶어서.”

    “그러게 이제 곧 봄인데.”

    나는 아영이의 말을 되뇌었다.

    “곧 봄인가...”

    새해맞이 카운트다운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2월도 중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내 말에, 아영이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장님 요새 너무 바쁘게 살으셔서 시간이 빨리 가시나 보네요.”

    하긴 요새 조금 바쁘게 살긴 했다. 2021년 해가 바뀜에 따라 나는 평소보다 몇 배는 일했다. 퓨쳐 싱크 건 매각을 완료하고, 자회사들을 점검하면서. 아마도

    ‘곧 쓰나미가 온다.’

    는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그 덕분에 일은 시원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아마존에 퓨쳐싱크 51%지분을 1조2천억 원에 매각하고, 현금을 챙겼다.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에는 거의 5조원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각종 언론들은

    ‘보유 현금만 약 5조원. 인빅투스 인베스트먼트의 다음 행보는?’

    ‘거대 M&A를 준비하는 한상훈 대표. 5조원 총알 장전.’

    그런 기사를 쓴다든가

    ‘한상훈 대표의 다음 타깃은? 글로벌 제약사 인수 임박.

    그런 찌라시성 기사도 쓰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돈에는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요새는 워낙에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어떤 정보든 퍼지면 퍼질수록 그 가치가 줄어드는 법이다. 나는 봐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재지 못하게 조용히 움직일 참이다. 나는 아영이에게 물었다.

    “너는 오늘 뭐해? 괜찮으면 오늘 같이 어디라도 놀러갈까?”

    “오늘 나 어머님이랑 쇼핑하기로 했는데, 동생 분 까지 셋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아 그래?”

    “응 이틀 전에 말했잖아. 오늘 어머님 올라오셔서 내가 모시고 쇼핑 간다고.”

    생각해보니 스쳐가며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아니 오빠는 오지 마. 오빠가 오지 않아야 오히려 친해질 수 있으니까.”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영이는 우리 집에 갔다 온 이후로, 점차 우리 가족에게 조용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행이도 양 쪽 모두가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 커플은 점차 결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나, 아영이나 ‘결혼’이라는 그 단어를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늘 그렇지만 연인 사이에 서로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굳이 입에서 꺼내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여름에 있을 사건이 잦아들 무렵, 그러니까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어놓았다.

    *

    오전 8시 반.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로 출근했다. 박 비서가 나를 보고 인사한다.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입니다. 사장님.”

    “별일 없지?”

    “아 네. 별건 없는데. MBE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슈퍼개미를 만나다’에 다시 한 번 출연을 해달라고 하네요. 시청자들 요구가 빗발친답니다.”

    대충 스토리는 짐작이 간다. 나 따라서 창해식품, 송해양조를 샀는데 가격이 살짝 오르다가 더 이상 오르질 않으니 그걸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건 어렵다고 해. 너무 바빠서.”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솔직히 말해서 거기 나가지 못 할 정도로 바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대중들이 내게 바라는 말은 그거 딱 하나였을 테니까.

    ‘창해식품, 송해양조 두 배, 세 배 갑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주자면, 두 종목 다 떨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진실을 말해주자면, 나 따라서 산 사람들 때문에 올라간 가격마저도 폭락할 가능성이 있었다. 말을 할 수 없는 때에는 차라리 입을 닫는 게 낫다. 내게 전화번호를 건네며 나를 유혹했던 그 단발 아나운서 얼굴 보기도 미안하고 말이다.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박 비서에게 말했다.

    “오늘 지훈이 오는 날이지?”

    “네 그렇습니다.”

    오늘 작년까지 비서로 일했던 서지훈이 회사로 찾아오기로 했다. 지훈이 말을 고대로 인용하자면

    ‘딱히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스타트업 중간보고 겸, 새해인사도 할 겸 해서.’

    온다고 한다.

    “그래 오랜만에 셋이나 밥이나 먹자고.”

    “네 사장님.”

    사장실 안으로 들어온 나는 평소처럼 미래 뉴스를 읽고, 내 이름으로 무슨 뉴스가 있나 검색을 해보고 HTS를 켜서 자동매매 알고리즘을 가동시켰다. 컴퓨터는 내가 설정을 한 대로 매매를 하면서 내게 돈을 더 가져다주었다.

    자화자찬을 하자면 나는 요새 여기서 버는 돈 많은 부분은 소아암에 걸린 아이랄지, 아니면 군 복무를 하다가 장애를 가지게 된 장병이랄지, 아니면 돈이 없어서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애들이랄지 그런 곳에다가 많은 부분 기부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명성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요새 몇 조 단 위 돈이 우리 회사에 들어오면서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하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말이다. 물론 내가 돈 뭉치를 가지고 집에서 샤워를 하든, 강남의 유흥가에 뿌리고 다니든, 12시간 뒤 메일은 오고, 고객센터에서 아무 말 하지는 않을 테지만. 엄청난 행운으로 돈을 벌게 된 내가 이 돈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으면 왠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나야 어차피 돈이야 평생 써도 모자를 정도로 있었고, 앞으로 더 많은 돈이 벌릴 것이 분명했으니까. 점심때가 될 즈음. 전화가 울렸다. 나는 굵직한 박 비서의 목소리를 기대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들려온 것은 그것보다 살짝 얇은 서 비서의 목소리였다.

    “사장님 저 왔습니다.”

    박 비서의 전화기를 들어서 본인이 말했나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

    곧 다소 얄쌍해진 서 비서가 들어와 내게 인사를 했다.

    “잘 지내셨죠?”

    나는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응. 나야 늘 잘 지내지. 그나저나 너 살 많이 빠졌다.”

    “요새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다보니.”

    “그래. 바빠야지. 내 돈 가지고 일하고 있는데 말이야. 앉아.”

    서 비서는 사장실 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일은 잘 되가?”

    “네 이제 필요한 인력은 모두 구했고. 이제 개발 시작입니다. 일단 한번 봐 보시지요. 사장님.”

    그는 내게 A4용지로 된 몇 장의 종이를 건넸다.

    ‘빅 데이터 수집 및 활용이 적용 된 채팅 앱.’

    이건 예전에 내가 그와 창업을 준비할 때 생각했던 아이디어 중 하나다.

    “이거 진짜로 다시 해보게?”

    “네 사장님. 이번엔 자본도 있겠다.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요.”

    “음... 그 때 문제가 됐던 것이 자본도 있었지만 규제도 있었잖아.”

    “개인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하는 선진국들도 최근에 사용자 동의를 받는 조건 하에 규제를 풀었습니다. 한국도 따라서 가지 않을까요?”

    “글쎄다. 내가 느끼기로 한국은 조금 규제에 보수적이라서...”

    나는 그 말을 하다가 문득, 떠올렸다. 나는 국내 정책도 어느 정도 조정을 할 수 있었다. 곧. 그래서 나는 하려던 말을 고쳐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올해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니까. 어쩌면 조금 변화의 바람이 불지도 모르지. 일단 열심히 해봐. 준비된 사람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니까.”

    “네 사장님.”

    나는 그 보고서를 옆에다가 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회사는 어디다가 차리려고?”

    “판교입니다.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은 능력자들이 거기 자리 잡은 사람들이 많아서.”

    “으음 그래.”

    “아 참 그거 때문에 사장님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뭔데?”

    “저희 회사 사무실을 살까 해서요. 지금 들어가려는 곳 임대료가 다들 만만치 않은데 고정비용을 지출하느니 차라리 처음에 돈 몇 억 들여서 사고 시작하는 게 낫지 않나...”

    “일단 단기임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럴까요?”

    “응. 내 생각에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음... 역시...”

    “역시라니?”

    “아니 요새 소문이 돌던데요. 사장님이 가지고 있는 주식 모두 처분하고 현금만 쥐고 있다고. 그래서 조금 경기가 안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재밌지. 매번 새로 일어나는 일 같아도, 과거를 뒤져보면 분명 비슷한 일이 있고. 그러니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

    내가 뜬금없이 역사 이야기를 꺼내니 지훈이는 잠자코 내 말을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경기호황기에 접어들면 사람들은 달콤한 꿈에 젖게 돼. 집값은 매일 오르고, 주가는 우상향. 공장은 쌩쌩 돌아가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 건물이 들어서지. 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공장에서 나온 생산물은 팔리지 않아 재고창고에 쌓이고 새 건물은 공실이 돼서 텅텅 비게 됐을 때, 그 꿈은 악몽이 되는 거야.”

    나는 턱에 손을 괴며 말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걸 반복한다니까. 근대 세계 역사를 보면, 모두 그래. 어떤 나라건, 다들 한 번 씩은 겪었어. 특히 동북아시아 나라들은 매우 유사한데, 근면하고 교육열 높고 문화권이 비슷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제조업 기반, 수출 기반 국가라는 것도 비슷하기 때문이야. 사주는 사람이 없어지면, 금방 망하게 되지.”

    나는 침을 참키며 말을 이었다.

    “일본은 1980년대에 미국을 넘볼 정도로 최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플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겪게 돼버렸지. 한국은 일본을 카피하고 재벌 중심 국가주도 성장을 해서 승승장구했지만 1990년대 때 IMF를 맞은 이후로 그 성장이 꺾여버렸어. 그걸 대장이 용납하지 않았거든”

    지훈이는 내게 물었다.

    “대장이요?”

    “응. 미국.”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미국은 현제 경제 체제의 대장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럼 생각해봐. 다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날 곳이 어딜까?”

    일본, 한국. 그 다음 이어질 국가는 뻔하다. 지훈이는 바로 정답을 말했다.

    “중국... 말씀이십니까?”

    나는 계속해서 창밖을 보는 채로 말했다.

    “플라자 합의는 대놓고 미국이 일본을 친 일이었고, 외환위기도 미국의 묵인 하에 일어난 일이지. 애초에 부족한 외환이라는 것은 달러를 말하니까. 그리고, 지금 중국이 딱 그런 꼴이지. 등소평은 1997년에 자신이 죽을 때 후계자들에게 유언으로 앞으로 100년간은 미국 앞에서 웅크리라고 했어. 하지만 지금 그 유언이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말에 지훈이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에게 말해놓았다.

    “일단 월세 살아. 집 주인이라고 건물주라고 다 속 편한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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